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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66화 (266/500)

266화 : < 96장. 한국문화교육원 (4) >

비밀 회합은 이번에도 골든팰리스 호텔에서 열렸다.

연회장에 도착한 민우는 맞은편에 준비된 접수대로 향했다. 플래티넘에서 했던 것처럼 방명록을 쓴 뒤 카드를 제시했다.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민우 교수님.”

“고맙습니다.”

카드를 다시 넘겨받은 민우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전에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적다. 인원은 50명 정도 되려나? 확실히 외국인들이 많군.’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본래 모임은 조찬 시간에 열리지만 이번에는 애프터눈 티 형식으로 열렸다. 테이블마다 핑거 푸드가 마련되어 있었고, 다들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연주와 지은이는 아직인가? 녀석들 분명 온다고 했었는데.’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민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시야에 포착된 젊은 남자는 확실히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았다.

「 자얀! 」

「 오, 이게 누구야? 」

바로 알 카흐파 의장의 아들인 자얀이었다.

오늘은 아랍의 하얀 전통복이 아니라 근사한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자얀은 민우와 가볍게 포옹했다.

「 내가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

「 너무 근사해서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던데. 」

「 가벼운 성의 표시라고 생각하라고 친구. 별장 인수에 서류가 좀 필요할 건데, 내 비서관이 연락을 할 테니 그때 준비를 좀 해줘. 」

민우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 아니. 인수까지는 됐어. 그냥 쉬고 갈 수만 있으면 충분해. 」

「 하하하. 얼마 전에 아버지에게 9만 달러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통이 작은 친구였군. 부담 갖지 마. 그 정도는 포켓 머니로도 충분하니까. 」

민우는 그가 사용한 포켓 머니라는 표현의 의미를 잠시 떠올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단어가 맞는지 사전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결론은 간단했다. 아무래도 적응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 그런 게 아니고 별장을 좀 더 좋은 일에 쓰려고 그래. 」

「 좋은 일? 흥미롭군. 우리 프로페서의 플랜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하지. 뭔데? 설마 도서관으로 쓴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

「 그런 건 아니고. 폴라리스 회원들을 위한 휴양지로 만들면 어떨까 싶어서. 부지가 꽤 넓으니 정기 세미나도 열고 다용도로 쓸 수 있어 보이더라고. 」

「 말하자면 전초 기지인가. 」

「 그런 셈이지. 」

「 그거라면 대환영이야. 그런데 네 약혼자 반응은 어땠어? 신혼여행 때 올 거지? 」

「 좋아하더라. 신혼여행은 좀 더 생각해 볼게. 아직 아무것도 정해 놓은 게 없거든. 」

「 그렇군. 아무튼 난 한국에 며칠 더 체류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인사나 드릴까 하는데. 약혼녀 소개해 줘. 」

「 아쉽게도 얼마 전에 미국에 갔다. 」

「 이런, 길이 엇갈렸군. 」

민우는 아예 자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마실 차를 권했고, 민우는 오랜만에 홍차를 집었다.

홍차를 홀짝이며 물끄러미 자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뭘 그렇게 봐? 」

「 어쩌면 네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진짜 있어서. 좀 신기하네. 」

「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군.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지성인이 다이아몬드에 초대되지 않는다면 이 모임의 의미는 눈곱만큼도 없는 거겠지. 」

「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 아냐. 작은 나라의 대학교수일 뿐이지. 」

그 말을 들은 자얀은 싱긋 웃었다. 잘 정리된 턱수염이 씰룩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는 손가락으로 마들렌을 집어 홍차에 적셨다.

「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지. 왜 눈에 보이는 땅덩이에 비교를 하나? 너의 이름은 이미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데 말이야. 」

말을 마치며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는 피식 웃었다.

아랍에서 온 친구가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프랑스인 흉내를 내서가 아니었다. 괜히 겸손을 떨다가 한 방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민우 오빠!”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하지은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연주는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합류했다. 연주는 민우의 옆자리에, 지은은 자얀의 옆에 앉았다. 사각형으로 된 4인석이라 자리가 꽉 찼다.

연주가 자얀을 보며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잘 지내셨어요? 자얀 씨. 」

「 저야 뭐 늘 즐겁죠. 그런데 두 사람, 아는 사입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흐음, 한국도 일부다처제였던가? 」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연주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오해를 풀었다.

「 같은 대학원 다녔어. 전공은 다르지만. 덧붙이자면 한국은 일부일처제다. 그리고 하지은. 그만 웃어. 실례야. 」

하지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얀이 박수를 한 번 치며 환하게 웃었다.

「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과연 박민우.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불릴 만하군. 」

「 낯부끄러운 소리는 그만 하고. 그런데 넌 어떻게 연주랑 알아? 」

「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알게 됐지. 대한그룹이라면 세계적인 기업이니까. 그리고 이쪽에 계신 분하고는 다이아몬드에서 몇 번 만났고. 」

알고 보니 자얀은 하지은과도 안면이 있었다. 자얀은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그녀가 그린 그림을 몇 점 구입하기도 했다.

「 다음엔 아부다비에서 개인전을 열어 드리지요. 」

「 어머, 그날만 기대하고 있어야겠네. 고마워요. 자얀 씨. 민우 오빠도 개인전에 올 거죠? 」

「 아부다비는 너무 멀어. 」

「 너무하네. 연주하고는 둘이 일본여행도 잘 갔다 왔으면서. 」

「 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

「 일본 여행까지? 역시 인텔리의 표본이라 불릴 만해. 일부일처제라는 법률적인 틀에 구애받지 않고 과감히 밀애를 즐기는 것인가? 」

자얀의 뼈 있는 농담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비록 연주는 마음이 좀 아렸지만, 민우를 위해 끝까지 미소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차를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 *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가 끝나고 민우는 바로 청문대로 복귀했다.

‘큰 수확은 없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자리였어. 만족스럽다.’

특히 아랍계 인사들이 민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그들은 민우의 업적을 칭찬하고 알 카흐파 의장의 프로젝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역량 때문인지, 아니면 알 카흐파 의장의 인복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민우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나마 미래를 꿈꿨다.

‘학자들도 제법 있었지. 플래티넘은 사업가들이 많았는데······ 다이아몬드는 사회적인 성공보다 지식의 성취도를 따지는 건가?’

민우는 그렇게 추측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회원 선정 기준은 회장만이 알고 있다고 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겠지.’

민우는 앞서 만난 아랍계 인사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그러면서 마치 농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 뿌리는 명함이 얼마나 자라 어떤 결실을 맺을까. 마치 긁지 않은 복권을 산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가슴에서 샘솟았다.

‘이제 다음 단계다.’

민우는 폴라리스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넓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존보다 세 배는 넓어진 거대한 연구실. 이제 짐 정리도 끝나 제법 연구실다운 구색을 갖췄다.

다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했다.

“오셨어요?”

“그래. 근데 희석이는 퇴근했나? 안 보이네.”

“오늘 데이트 있다나 뭐라나.”

“갑자기? 애인 없다고 들었는데.”

“몰라요. 손님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뚱한 표정을 지은 이다혜는 턱을 괴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민우는 마음속으로 다혜를 응원하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의 정체는 진섭과 예린이었다. 예린은 민우의 컴퓨터 앞에 앉아 쇼핑을 하고 있었고, 진섭은 소파에 벌렁 누워 있었다.

“아주 지들 안방이구만.”

“오, 왔냐? 어땠어?”

진섭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오늘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가 열린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진섭의 맞은편에 앉은 민우는 자얀을 만났던 이야기를 포함해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진섭은 한없이 부럽다는 표정이었다.

“캬, 대단한데. 나도 그 모임에 들어가고 싶다. 어떻게 비빌 수 없나?”

“될 리가 있겠냐? 남의 연구실에 발 뻗고 누워있는 사람을 누가 초대해?”

“아 거참 사람 빡빡하게 구네.”

“빨리 회의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민우가 채근하자 두 커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은 각자 준비한 인쇄물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강의 경력이 전무한 주예린은 주로 듣기만 했다.

주도권을 잡은 진섭이 강한 어조로 의견을 피력했다.

“중요한 건 외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으면 안 된다는 거야. 관광하려는 느낌으로 온 애들도 있고 비협조적인 애들도 있으니까.”

“명인대 쪽에서도 그랬냐?”

“당연하지. 뭐 수가 많지는 않긴 했지만. 국제어학원에서는 어학만 가르쳤으니 크게 문제가 안 됐는데 여기 교육원은 달라. 문화 전반에 대해 가르치는 거니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 교수든 학생이든.”

“확실히······.”

민우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옆에서 자료를 이리저리 넘겨보던 주예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커리큘럼을 조금 축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이상적으로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문예창작도 왠지 한글쓰기반이 될 것 같고.”

“문예창작은 레벨 제한을 둬야지. 한국어 중급 이상으로. 아무튼 전반적으로 전공자들이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다.”

“그럼 다시 조정을 해 보자.”

다시 머리를 맞대니 중구난방하던 커리큘럼이 훨씬 더 깔끔해졌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안정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과목을 구성했다.

그 결과물을 본 세 사람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교육원장님 재가만 남은 건가.”

“그렇지.”

민우는 가볍게 대꾸했지만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어제 서지훈 교수에게 들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수빈보다 그를 더 오래 알아왔던 예린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선배는 왜 아까부터 표정이 그래요?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 설마 자기 컴퓨터로 쇼핑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불만이 아니라 좀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

“뭔데요?”

민우는 손에 든 서류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우리가 만든 이 커리큘럼, 그리고 강사진······ 윗선에서 부정당하면 어떻게 하지?”

“엑?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주가 세운 안건이잖아요.”

예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연주라는 존재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준비 과정에서야 그렇지만 교육원장이 들어서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권한이 통째로 그쪽으로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거든.”

“교육원장이 누군데요?”

“김한진 교수.”

“어떤 사람인데?”

이번엔 진섭이 물었고, 민우는 그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나이는 50대. 대외협력처장이자 역사학과 교수라는 것만 알아.”

“처장 라인을 탄 전형적인 엘리트 교수인가.”

“지레 겁먹지 말고 일단 올려 봐요. 안 되면 그때 부딪치면 되니까. 선배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이게 되니까.”

예린은 오른손을 입에 대고 나불거리는 시늉을 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부딪쳐보기도 전에 걱정하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날, 민우는 완성된 커리큘럼이 담긴 결재파일을 들고 한국문화교육원장실을 찾았다.

* * *

“어서 오세요. 박 교수.”

“안녕하십니까.”

민우는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마주한 김한진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차에 잘 왔어요. 전에 그······ 박 교수가 교육원장 자리를 권해 준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내가 무척 애착을 가지고 준비해 오던 것이었거든.”

“원장님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제가 아니라도 다른 분들께서 추천을 해 주셨을 겁니다.”

“허허허.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

“한국어문학 파트 커리큘럼 검토를 요청 드리려고 왔습니다.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이쪽을 봐 주시죠.”

결재파일을 받은 김한진 교수는 검토를 시작했다. 정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정독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 역시 박 교수다운 제안이군요. 애쓴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하지만······ 음 뭐랄까. 이걸로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

그렇게 말한 김한진 교수가 파일을 다시 돌려주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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