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 96장. 한국문화교육원 (3) >
명인대 인문관 근처 주차장에서 진섭의 차가 멈췄다. 민우는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는데 진섭은 시동을 끄지 않았다.
“온 김에 서지훈 선생님께 인사나 드리지?”
“다음에. 왠지 차에서 내리면 도서관에 끌려갈 것 같은 느낌이 날카로워서.”
“쓸 데 없는 데서 촉이 좋네.”
피식 웃은 민우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차 문을 닫았다. 진섭의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민우는 인문관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즉시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마침 그는 연구실 안에 있었다.
“웬일이냐? 바쁜 분께서 연락도 없이.”
“도서관에 가려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인사도 드릴 겸 해서요.”
“청문대에도 도서관 있으면서 왜 여기까지 와?”
“장서량 비교가 안 되잖아요. 청문대는 인문서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본부에 요청을 해보고 있는데 쉽게 안 늘려주네요.”
“뭐 그게 다 돈이니까. 잠깐 기다려라. 쓰던 것 좀 마무리하고.”
마침 서지훈 교수는 논문 심사를 하고 있었다. 냉혹한 어투로 평가서를 가득 채운 그는 소파로 와서 앉았다. 민우는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여유가 생긴 느낌인데? 책 읽으러 여기까지 오고 말이다.”
“여유까지는 아니고 오늘 수빈이 출국했거든요. 돌아올 때까지 실컷 공부해 놔야죠.”
“하하하. 결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됐어?”
“선생님은 어떠세요?”
“나야 늘 신혼이지.”
“2세 소식은 없으시고요?”
“아직 계획은 없다. 와이프 나이도 좀 있고 서로 하는 일도 바쁘니 육아는 아무래도 힘이 들지. 외롭게 키울 바엔 안 낳는 게 낫다고 합의했어.”
두 사람은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부다비에 국빈으로 방문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라 쌓인 이야기가 많았다.
얼마 전 있었던 청문대 정례회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턱을 괸 채 신중히 듣던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학술교류 쪽에서는 손을 뗀 건가. 뭐, 잘 생각했다. 어설프게 하는 것보단 욕심을 버리는 게 낫지. 그래도 교육원장직은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너도 비교문학이나 번역학을 하니까 아예 전문성이 없다고 할 순 없잖아.”
“이권사업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요. 진섭이도 여기서 크게 데였잖습니까. 가뜩이나 우리 쪽 애들 초빙되는데 오해사고 싶지는 않았어요.”
“두려운 건가?”
일침을 날린 서지훈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칙, 마찰음을 내며 라이터가 불을 뿜었다.
서지훈 교수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꼭대기에 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지.”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민우는 가만히 그 말을 음미해 보았지만 뜻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은 뭐냐? 아니, 질문을 좀 바꿀까. 대학에서 양질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물론 있습니다.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문성을 갖춰야겠죠. 학생들과 거리를 좁히는 것도 필요하고요. 현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캐치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범 답안이었다.
예상했다는 듯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담배 연기 너머로 보이는 표정은 오히려 걱정에 가까웠다.
“307호 멤버들 모아서 한국어문학 파트 맡기로 했다지? 교육원에서.”
“그렇죠.”
“커리큘럼은 어떻게 됐냐?”
“일반문학, 문예창작, 번역학, 언어학 이 네 가지 분야로 나눠서 기획중입니다. 내일 모여서 다 같이 이야기 해보기로 했어요.”
“흐음, 구성은 나쁘지 않은 거 같군.”
서지훈 교수의 어투와 태도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민우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요?”
“근본적인 문제랄까. 하나 가정을 해 보자. 너희들이 모두 모여서, 아. 이수빈 선생은 미국에 가 있으니 모이지는 못하겠군. 아무튼 너와 진섭이와 예린이가 모여서 커리큘럼을 짰어. 며칠 동안 열심히 머리를 맞대서 말이다. 그런데 준비한 것들을 교육원장에게 들고 갔다가 막상 커트당하면 어쩔 생각이지? 덧붙여 강사 구성에 대해 문제제기가 들어온다면?”
“······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잠시 멍해있던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청문대는 상아대와 완전히 다르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곳이었다.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준비할 테니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다라······ 순진한 발상 아닌가? 아까 네가 말했잖아. 진섭이가 여기서 크게 데였다고. 바꿔 생각해 봐. 9학점, 그러니까 세 개나 되는 강의가 한 번에 드랍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바로 대한민국의 대학이다.”
서지훈 교수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짧은 사이에 민우의 표정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심각해 보였다.
서지훈 교수가 다시 물었다.
“자고로 권력자들이 왕좌에 오르면 가장 먼저 했던 게 뭔지 아나?”
민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지훈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공신들의 숙청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시키지. 대학도 작은 왕국과 다를 바 없어. 권력이란 그런 거니까. 껍데기만 다를 뿐 알맹이는 똑같지.”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황과 사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야.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단순 조언이다.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마.”
그렇게 말한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민우로서는 단순 조언으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게감이 있는 말들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왔던 걸까?’
한편으로는 다른 의문이 들었다. 왜 서지훈 교수는 이 타이밍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자신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인가?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권력을 잡지 않으면 네가 하려는 이상적인 교수법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뭐, 실제로 네 말처럼 일이 잘 풀릴 가능성도 꽤 높지. 그러니 마음에 새겨둘 필요는 없어. 참고만 하라고. 앞으로 네가 청문대에 계속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냐.”
“알겠습니다.”
민우는 이 부분에서 서지훈 교수와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계신 겁니까?”
“질문이 모호한데.”
“전부터 순혈주의가 좋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우리 국문과를, 나아가서는 명인대를 새롭게 바꾸겠다고 늘 말씀해 오셨는데요. 그걸 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아, 그거?”
자리에서 일어난 서지훈 교수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올려 있던 서류철을 열어 확인하고는 그것을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읽은 민우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 언제 이렇게 되신 거예요?”
“얼마 안 됐다.”
“뭔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네요.”
“하하하. 뒤통수까지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어?”
그것은 보직 임명 서류였다. 그가 가져온 서류에 따르면, 올해 2월부로 서지훈 교수는 명인대 국제어학원장이 된다.
민우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아마 다른 307호 멤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이건 21세기에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지. 손에 끈적한 피가 좀 묻겠지만 어쩔 수 있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서지훈 교수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책장 한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민우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남 걱정할 때냐? 네 걱정이나 해.”
그때 뭔가를 떠올린 서지훈 교수가 민우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참, 너 요즘 논문 뭐 쓰고 있냐?”
“한국비교문학을 테마로 쓰고 있습니다.”
“방법론은?”
“역사와 전망을 중심으로 기술할 생각입니다.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논문 청탁이 와서 그쪽에 낼 거고요.”
“국제비교문학회라. 알았다.”
서지훈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반응이 조금 다른 것 같아 민우가 가만 넘기질 못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궁금해서. 너 요즘 은근히 공부 이야기는 안 했잖아. 프로젝트다 뭐다 해서 공부는 손에서 놓은 줄 알았지. 박사 논문도 슬슬 다음 달부터 들어가야지?”
“그래야죠. 개요 나오면 바로 들고 오겠습니다.”
생각해 둔 개요는 있었다. 거기에 루카치의 만년필로 완벽한 뼈대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거라면 서지훈 교수도 책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개요는 논문의 골격과 같다.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이 나오지.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쓰도록 해.”
서지훈 교수는 소파에서 일어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다리를 꼬며 민우에게 충고를 계속했다.
“석사논문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겠지?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녹다운될 거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들 박사논문 쓰는 거 실컷 봤으니까요. 그래도 자신 있습니다. 송현우 선생님의 유산, 확실히 물려받았으니까요.”
딱!
서지훈 교수는 손가락을 튕기며 검지로 민우를 가리켰다.
“바로 그 점이 흥미롭단 말이야. 과연 송 선생님의 문학론을 어떻게 변용할 생각인지······ 다만 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되는 짓은 내가 용납 못한다.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 봐. 책 읽으러 온 사람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구만.”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꾸벅 인사한 민우가 연구실을 나갔다. 이제 연구실에 남은 것은 서지훈 교수 혼자뿐이었다.
“민우 녀석. 아직 너무 무르단 말이지······.”
잠시 의자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기던 서지훈 교수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 명인대의 서지훈입니다. 잘 지내셨죠? 하하. 저야 늘 그렇죠 뭐. 다름이 아니라 박민우 선생 발표 건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예. 이야기는 들었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 발표 토론자 정해졌습니까?”
서지훈 교수는 가만히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들었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바라고 있던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을 드리죠.”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폴라리스 연구실에 출근한 민우는 폴라리스 회원 총회 준비를 시작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회원을 서울로 초대하는 큰 이벤트였다.
항공권과 숙박시설까지 모두 제공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다보니 준비 예산의 자릿수가 확 늘어났다.
‘단순 계산으로 쳐도 1억 이상은 필요하겠는데? 의장님 재단에서 얼마나 끌어올 수 있으려나······.’
민우는 볼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지만 쉽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겠네.’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9시. 지금 아부다비는 새벽이었다. 그래서 조교들과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알 카흐파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의장님. 박민우입니다. 」
「 오, 이렇게 직접 전화를 다 하시고. 어쩐 일입니까? 」
「 공익재단사업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폴라리스 회원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생각인데 예산 부분에 대해서 좀 상의를 드리려고요. 」
「 그렇군. 예산은 얼마나 잡혔소? 」
「 단순 계산으로 9만 달러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부 항목을 잡기 시작하면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
「 하하하! 이봐요 박 교수님. 」
「 네? 」
「 그 정도로 적은 금액은 비서인 하메드와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얼마든지 청구하세요. 총회라면 꼭 필요한 일일 테니까. 」
「 알겠습니다. 」
그에게 1억 정도는 우스운 돈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민우였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하메드에게 연락해 총회에 대해 상의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준비를 하메드가 직접 맡아 진행해 주기로 했다. 민우는 총회 장소를 섭외하고 행사 진행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좋아. 한 고비는 넘겼고. 이제 다음 이벤트를 준비해 볼까?’
민우는 옷걸이에서 외투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황금빛 회원 카드를 챙겼는지 확인하고는 연구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