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 < 96장. 한국문화교육원 (2) >
회의의 마지막은 민우가 장식했다. 이번 아랍에미리트 국빈 방문에서 거둔 성과를 간략히 설명하고, 앞으로의 대응책에 대해 논했다.
하지만 민우가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제 일은 여기까집니다. 앞으로의 협상은 대학 당국에 일임하겠습니다. 곧 새 학기가 시작되니 교수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싶습니다.”
“뭐라고요?”
“잠깐만요, 박 교수. 하지만 실무진 회의 때는 참석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이름값이라는 게 있는데.”
몇몇 교수들이 우려를 표했다. 그것은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말을 아꼈지만, 눈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민우를 응시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 모든 것들을 단호히 물리쳤다.
“오히려 실무 부분은 제가 아는 게 없습니다. 아마 짐만 되겠죠. 이 부분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대학을 위해 훨씬 이익입니다.”
“허······.”
“저도, 대학도 모두 도움이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마무리가 아닐까요? 물론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되었다는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살려 멋진 연구 성과를 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민우는 여러 일을 겪으며 대학의 생리를 체득했다. 이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면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든 것이다.
적당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것. 그것이 민우가 계획하던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박자희 총장은 민우를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다른 교수들도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박민우 교수. 여기 계신 정연주 이사님과 양한선 교수님이 박 교수를 모셔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군요.”
“과찬이십니다. 청문대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제가 없더라도······.”
“아닙니다. 이야기가 좀 다르지요.”
간단히 말을 끊은 박자희 총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우리는 이번 일을 통해 배워야 할 게 하나 늘었습니다. 박 교수가 보여준 열정과 노력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부지런히 뛰면서 말이오.”
그것으로 정례회의가 막을 내렸다.
민우는 교수들과 가볍게 티타임을 나누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때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뒤쪽에서 빠르게 들렸다.
“박 교수님.”
돌아선 민우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연주는 잠시 당황했지만 평정을 되찾았다.
보는 눈이 많았다. 연주는 재단 이사였고, 어떻게 보면 박자희 총장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개 비전임교수가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사님.”
“말씀 잘하시더라고요. 나름 준비 많이 한 기습 작전이었는데. 두 손 들었어요.”
“아아, 교육원장 건 말입니까?”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믿을 만한 사람은 민우밖에 없었다. 굳이 한 명을 더 꼽자면 외삼촌인 양한선 교수 정도.
물론 단순히 사람을 믿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객관적인 능력 면에서도 민우가 낫다고 생각했다. 해외 유학생을 상대해야 하니 그만큼 국제적인 감각도 중요하니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민우가 정중히 청했다.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제 연구실로 가실까요?”
“좋아요.”
민우는 폴라리스 연구실로 갈까 하다가 학부 연구실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례적인 존칭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연주는 그게 불편하고 싫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대학만큼 의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도 없으니 말이다.
“수빈 언니는 내일 모레 출국하던가요?”
“예. 이수빈 선생은 그때 출국합니다.”
“아쉬우시겠어요.”
“더욱 애틋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미국에 다녀오시는 건 어때요? 센트럴북스 방문 겸.”
“안 그래도 다음 달에 몰래 다녀오려고 합니다. 물론 이수빈 선생께는 비밀입니다. 아셨죠?”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패널을 조작해 형광등과 히터를 켰다.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실내가 무척 추웠다.
“이사님. 커피 괜찮으십니까?”
“아무도 없는데 이제 그만해요. 오빠.”
“하하하하. 왜? 재미있는데.”
민우는 커피포트에 생수를 따르고 전원을 켰다. 이어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아 정성껏 커피를 내렸다. 곧 고소한 커피향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민우가 커피가 가득 든 컵 두 잔을 들고 소파로 왔다.
컵을 받아든 연주는 먼저 향을 음미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좋은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쉽지 않네요. 대학 일이라는 게.”
“뭐 문제라도 있어? 오늘 회의 잘 풀렸잖아.”
“아뇨. 그냥 뭐랄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대로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데 계속 눈치를 보게 되니까 힘드네요.”
“그런 문제라면 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민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래. 곧 자연스럽게 바뀔 거야. 어쩌면 오히려 즐기게 될지도 모르지.”
“즐기다뇨?”
“권력이 생기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 알아?”
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연주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병수의 <마음의 사생활>이라는 책이었다.
“권력은 체내의 호르몬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더라. 그 영향으로 전두엽이 변화하고, 결국 뇌의 공감네트워크가 방해를 받는다는 게 이 책을 쓴 김병수 박사의 견해지.”
설명을 들으며 연주는 책을 펴 목차를 확인했다. ‘권력이 사이코패스를 만든다’는 부분을 보고는 책을 탁 덮어버렸다.
“제가 사이코패스라는 말씀이에요?”
“응? 아니. 하하하. 그냥 그렇다고.”
“아부다비에 다녀오시더니 너스레가 느셨네요. 뭔가 여유도 느껴지고.”
“석유의 맛이란 그런 거지.”
연주는 뚱한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너무 심하게 놀린 걸까. 민우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결국 연주는 표정을 풀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왜 교육원장직 거절하신 거예요? 전 받아주실 줄 알았는데.”
“기습 작전 치고 너무 엉성해서.”
“그랬어요?”
잔을 내려놓은 민우는 팔짱을 끼며 여유를 부렸다. 연주의 빤한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얄밉게 굴었다. 연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나서야 민우가 대답했다.
“저번에 진섭이 일 때문에 그래.”
“명인대 국제어학원 일이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한껏 진지했다.
“그 일을 가만 지켜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원장이니 처장이니 보직 맡아서 하는 게 겉으로는 좋게 보여도 자기 자신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감주형 선생님이 국제어학원장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렸을까? 난 아니라고 봐.”
“하지만······.”
오빠는 다르다.
오빠는 권력을 쥐어도 다른 사람처럼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했고, 끊임없이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 초빙교수직에 충분히 만족해. 박사학위도 없는데 이 정도면 호강하는 거지. 앞으로도 직위에 연연하지 않을 거야. 전두엽이 마비되기 싫으니까.”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아니. 오히려 기분은 좋았어. 왠지 인정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안 돼.”
미소를 짓는 민우를 바라보며 연주는 깨달았다. 이제야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아직 멀었다.
발꿈치를 들어도 안 된다. 조금 더 키가 자라야 했다.
“커피 잘 마셨어요. 박 교수님.”
“응? 언젠 오빠라고 못 불러서 불편하다더니.”
“익숙해지려면 연습 많이 해야죠.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참, 다음 주에 다이아몬드 모임에 나올 거지?”
“봐서요.”
연구실을 나선 연주는 힘 있게 복도를 걸었다. 스스로를 좀 더 성장시켜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 *
다음 날, 연구실에 있던 민우는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상아대의 제자 차민재가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합격했다고?”
“예. 수석으로요.”
수능을 생각보다 잘 봤다는 말에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국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할 줄은 몰랐다.
수석이라면 장학금이 나오니 어려운 생활에 보탬이 될 것이다. 민우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축하한다! 진짜 고생 많았구나. 그런데 이쪽에 수석으로 들어올 정도면 다른 쪽도 합격하지 않았나?”
“예. 한일대도 합격을 했는데 청문대에 등록할 생각이에요.”
“신중히 생각해보지 그러냐.”
“충분히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긴 하지만······ 역시 교수님의 존재가 컸어요.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여전히 상아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겠죠.”
마음이 뿌듯했다.
어제 정례 회의에서 받은 칭찬보다도 더더욱 큰 보람을 느꼈다. 제자를 키우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어 민우는 미소를 거둘 수 없었다.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민우는 막연한 설렘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집은 구해야 하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나 때문에 서울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아닙니다. 일단 기숙사 신청을 해보려고요. 그리고 수능 준비할 때 틈틈이 알바해서 모은 돈 있어요. 그걸로 당분간은 충분합니다.”
틈틈이 알바까지 하면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는 게 정말 대견스러웠다. 그래서 민우는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때마침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
“서울에 와서도 알바는 계속 할 거지?”
“예. 한번 구해보려고요.”
“입학하고 나서는 좀 계획을 바꿔보는 게 어때? 알바 하지 말고 다른 거 해 보자.”
“어떤 거요?”
“연구보조원. 폴라리스 프로젝트에 참가해라.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회야. 문서 수발 정도는 할 수 있지?”
“예.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걱정이 하나 사라지자 차민재의 얼굴이 한결 더 밝아졌다. 민우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한편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남희석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옆에 있던 이다혜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구나. 너 긴장 좀 해야겠다?”
“긴장이라는 단어는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학번의 위엄을 보여주겠습니다.”
“쯧, 솔직하지 못하긴. 괜히 존심 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 학번은 으스대라고 있는 게 아니야. 선후배 잘 챙기라고 있는 거지. 잠깐. 뭐니? 그 느끼한 표정은.”
“처음으로 누님이 누님처럼 보였습니다. 좋은 말씀이네요. 학번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죠.”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턱을 괸 남희석이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다혜는 내심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메모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헛된 망상이었다. 희석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짠돌이 같으니라고.”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됐다. 일이나 하슈.”
희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 * *
진섭은 두바이에 다녀오자마자 수빈을 위해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예린은 여행 막판에 감기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민우와 진섭은 공항까지 수빈을 배웅했다. 처음 출국했을 때만큼 애틋하지는 않았지만, 이별은 언제나 힘이 드는 법이다.
그렇게 두 남자가 공항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빈이는 이제 여름이나 돼야 오겠네. 난 요즘 시간이 장난 아니게 빠른 느낌인데 넌 아니겠다?”
“그런가?”
두 사람이 차에 올랐다. 오늘따라 민우가 이상하게 조용한 것을 깨달은 진섭은 조수석에 앉은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는 흠칫 놀랐다.
민우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실실 쪼개고 있어? 수빈이 간 게 그리도 좋냐?”
“좋은 건 아닌데 다른 의미로 좀 좋은 느낌?”
“뭔 헛소리야. 국문과 교수면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라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게, 예전에 결혼한 형들이 결혼 절대 하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그 기분이 조금 이해된다고 할까? 뭔가 자유를 얻은 기분이야.”
마지막 문장에서 민우의 진심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남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진한 유대감이 형성됐다. 진섭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우리 박 선생이 이제야 남자가 됐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느끼려면 좋은 곳에 가야지. 조금 이르긴 한데 클럽 콜?”
“이런 좋은 날에 그런 시시한 델 가야겠냐? 오감을 만족시켜줄 만한 곳으로 가야지.”
“오, 오감까지? 거기가 어딘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민우가 검지를 척 들었다.
“도서관. 명인대로 가자. 이런 화창한 날씨엔 고문서가 최고지.”
“하······ 기대한 내가 븅신이지. 예, 갑니다. 가요. 간다고요!”
진섭이 신경질적으로 엑셀을 밟았다. 차가 크게 흔들렸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손에 쥔 책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