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 < 96장. 한국문화교육원 (1) >
마법 같은 일주일이 지났다.
민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늘 그렇듯 루카치의 유고를 정독했다.
글자의 끝에 도달한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큰산번역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뒤 한 페이지 반 정도를 더 이어 쓸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다. 과연 이 유고의 끝은 어떻게 될까?’
민우는 뒷내용을 가늠해보며 페이지를 손으로 쓸었다. 투박한 질감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언제 또 깨달음이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민우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폴라리스 연구실로 이동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어서 오세요!”
연구실 안에 박스가 널려 있었다. 두 조교는 이른 아침부터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민우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벌써 짐 쌀 필요 있나? 어차피 업체에서 알아서 해 줄 건데.”
“개인 짐은 미리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연구실 옮긴다니 다들 신 났구나?”
“당연하죠. 기업으로 따지자면 확장 이전인데! 아, 진짜 너무 설레는 거 있죠. 이제 연구원들 더 들어오면 제가 주임연구원이 되는 건가요?”
“누님. 아직 5년은 이르지 않습니까?”
“그런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20년은 이른 거 같습니다.”
“이 밉상아!”
다혜가 소리를 꽥 질렀다. 아무래도 저혈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폴라리스가 초거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그래서 보다 넓은 연구실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알 카흐파 의장의 프로젝트는 <인문과학총서> 작업이 마무리되는 5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하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래도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사람 뽑으면서 하나씩 준비를 하는 게 좋겠지? 일단 한국에서 폴라리스 회원총회를 한번 열어야겠어. 비용은 재단에 청구할 수 있으니 좀 더 크게 움직여보자.’
민우는 커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여러 계획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래서 특별한 손님이 들어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행히 찾아온 손님은 민우의 그런 버릇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은 수빈이 손바닥을 펼쳐 민우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자기를 봐달라는 듯이. 그제야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어? 언제 왔어?”
“지금요. 약속이 이 근처라 잠깐 시간 내서 들렀어요. 근데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잠 못 잤나?”
“아니. 그냥. 커피 마실래?”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수빈의 전용 컵을 꺼냈다. 그녀의 캐리커처가 들어간 머그잔이었는데, 예전에 민우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선물로 주고 하나는 연구실에 놔뒀다.
“출국 준비는 다 했어?”
“이제 비행기만 타면 끝. 오늘까지만 친구들 만나고 내일은 좀 쉬려고 미리 했어요.”
수빈은 내일 모레 출국한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일찍 나와 연구실에 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곧 노크가 들리고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국문과 문남기 조교였다.
“선생님. 우편 왔습니다.”
“어. 고마워.”
A4 크기만 한 우편물이었다. 해외에서 온 것이었는데, 발신인을 본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랑느 박사님이 보내신 건가?”
“아니. 자얀이 보냈네.”
민우는 봉투를 뜯었다. 수빈도 머리를 들이밀며 관심을 보였다. 아부다비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었기 때문에 자얀이 누구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곧 봉투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장의 컬러 인쇄물이었다. 그것을 펼쳐 본 민우는 잠시 멍해졌다.
“이게 뭐지?”
“조감도······ 같은데요?”
민우는 다시 인쇄물에 집중했다. 근사하게 배치된 아랍식 건물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묵었던 알 카흐파 의장의 별장과 비슷했다.
페이지를 넘기니 하얀 메모지가 툭 떨어졌다. 아랍어로 적힌 쪽지였다. 잠자코 읽은 민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쓴 거예요?”
“내 전용 별장이래. 완공되면 언제든 와서 이용하라고 적혀 있네.”
민우는 쪽지를 수빈에게 건넸다. 하지만 수빈은 아랍어를 읽을 줄 몰랐다. 애꿎은 쪽지만 이리저리 돌려볼 뿐이다.
“근데 갑자기 별장은 웬 거예요? 혹시 가서 질렀어요?”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주님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럴 만한 급이 안 되지.”
“하긴, 그건 그러네.”
“자얀한테 네 얘기 했더니 별장 하나 지어준다고 했었거든. 신혼여행으로 놀러 오라고.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일 줄이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을 갔을 때 이야기를 나눌 친구와 머물 곳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수빈은 펜을 손에 쥐더니 마이크라도 되는 양 민우에게 들이밀었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교수님은 다르시네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잘나가긴. 아직 비전임 나부랭인데.”
“재미없게. 내년에 박사 따면 전임으로 올라가잖아요. 엄살은. 아무튼 인터넷에 오빠 기사 자주 올라오니까 미국에서 심심하진 않겠어요.”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최근 세간의 평가가 급격히 늘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학계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민우의 이름을 언급한 덕에 활동반경이 훨씬 넓어졌다.
이러다 정계에 입문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민우는 단호히 부인했다.
‘난 학자니까. 묵묵히 내 길을 걸어야지.’
조감도를 내려다보던 민우는 완성된 별장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아부다비의 가을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졌다.
* * *
그날 오후, 청문대 대학본부에서 정례회의가 열렸다. 총장과 처장급 교수들이 참여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하지만 예외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민우였다.
그의 걸음은 당당했다. 마주치는 교수들이 그를 향해 반갑게 말을 걸면 민우는 걸음을 멈추고 정중히 인사를 받았다.
그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민우는 그들을 잘 몰랐지만, 그들은 민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대학교수들 중 최근 언론에 가장 노출이 많이 된 사람이었으니까.
“교수님. 실례지만 회의가 있어서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박 교수. 잘하고 오세요. 언제 시간 맞춰서 식사라도 합시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민우가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두 중년 교수들이 조용히 품평을 나눴다.
“이야, 젊은 친구가 참 겸손하네. 저 정도 커리어면 목에 힘이 들어갈 텐데 그러지도 않고 말이야.”
“TV에도 나오고 하니 이미지 관리하는 걸 수도 있죠.”
“역시 그러려나?”
“그래도 커리어 하나는 인정합니다. 비전임교수가 정례회의에 참가하다니. 저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자네 때는 박민우 교수 같은 사람이 없었잖아.”
“그건 교수님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하하. 그 말이 정답이군. 보면 박 교수도 참 무서운 사람이야. 실력도 있고 라인도 빵빵해. 대학에서 금방 자리를 잡겠어.”
“실세가 되려나요?”
“지켜봐야지.”
한편 회의실 앞에 도착한 민우는 잠시 망설였다. 상아대에서 처음 월례회의에 참여했던 때가 떠올랐다. 냉정한 교수들의 눈빛을.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어서 와요. 박민우 교수!”
“안녕하십니까.”
많은 교수들이, 그것도 처장급 교수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악수를 청해왔다. 민우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박 교수. 이번에 일이 잘 풀리면 아부다비에 청문대 국제캠퍼스가 들어갈 수도 있다지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작성한 리포트의 내용이 교수들에게 공유된 모양이다. 비밀은 아니었기에 민우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절차가 까다로워서 변수가 좀 있긴 한데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아마 추진될 겁니다.”
“정말 큰 건을 따냈군요. 놀라운 수완입니다! 역시 박 교수처럼 미리 아랍어를 배워둬야 하는 걸까요? 하하하.”
“아닙니다. 운이 좀 좋았고, 무엇보다도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죠. 우리가 받는 만큼 줘야 하는 것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 부분을 잘 봐야 합니다.”
민우는 교수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민우를 중심으로 교수들이 모이니 작은 원이 만들어졌다.
끼릭―
문이 열리고 박자희 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연주 이사도 함께였다. 민우가 가져온 성과 덕인지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서두는 박자희 총장이 장식했다.
“식사들 맛있게 하셨습니까? 나른한 오후군요. 회의 빨리 끝내고 티타임 좀 합시다. 박 교수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정말 많으니. 흠, 우선 한국문화교육원 이야기부터 할까요? 정연주 이사님. 부탁합니다.”
“예.”
연주가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문화교육원은 원래 대외협력처장인 김한진 교수가 주도하던 사업이었지만, 연주가 이사직에 오른 후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녀의 계획은 한마디로 치밀했다.
석사논문 분량의 계획서에는 교육원 설립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제가 준비한 내용대로라면 여름이 오기 전에 개원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교육원장을 누가 맡냐는 건데······ 이 부분에 대해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교수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박자희 총장도 한 발 물러서 상황을 관망했다.
그만큼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학내의 이권사업과 직결되는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 민우는 아예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연주가 준비해 온 책자를 꼼꼼히 검토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학고 출신에 똑똑하다는 건 알았지만, 교육행정에 이 정도의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엄청나네. 이 정도면 당장 교육부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감탄할 무렵 연주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했다.
“박민우 교수님.”
“······.”
“박민우 교수님?”
“예?”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자 교수들과 박자희 총장이 연주를 주목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다른 건 아니고, 교육원장직으로 박민우 교수님을 추천하고 싶은데 본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국제적인 감각이 출중하시니 교육원을 잘 이끌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민우는 책자를 덮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상황을 파악했다. 그 잠깐의 순간에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고민한 그는 마이크 스위치를 눌렀다.
“이사님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교육원장직은 연륜과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 맡으시는 것이 좋겠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맡는다······ 그건 좀 고루한 생각이 아닐까요? 진취적이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젊은 분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연주답지 않게 박력이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이 자리에서 싸우자는 거야?’
다소 어투가 공격적이었다. 거리를 두려는 것은 아닐 터다. 그만큼 그녀는 더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 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요약하자면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민우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 손가락에 쏠렸다. 민우는 친절하게 하나씩 꼽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저는 초빙교수입니다. 비전임교원이 보직을 받는 건 학내질서상 좋지 않습니다. 둘째,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국문학을 전공하긴 했으나 보다 포괄적인, 그리고 풍부한 식견을 가진 분이 맡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셋째······.”
민우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저는 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청문대로 왔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 연구와 강의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학생들과의 교류는 저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요. 이러한 이유로 이사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상입니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한숨을 내쉰 연주는 주먹으로 가볍게 이마를 툭 쳤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완벽한 패배.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신.”
연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민우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분을 추천해도 괜찮을까요?”
“예. 얼마든지요.”
“초대 원장 자리는 꽤 중요합니다. 상징성도 있고요. 때문에 교육원장은 본 사업을 처음부터 기획하셨던 김한진 교수님께서 맡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대외협력처장으로서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셨고, 이 분야에 대한 이해도 충분하다고 사료됩니다.”
민우는 회의실의 기류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김한진 교수는 나름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이사로 부임한 연주에게 사업을 넘겨줘야 했으니까.
다시 말해 민우는 분쟁이 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제야 교수들의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한편, 박자희 총장은 의외라는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연주의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군. 겸손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야망? 아무튼 흥미진진해. 박민우 교수.’
민우를 향한 박자희 총장의 눈빛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