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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62화 (262/500)

262화 : < 95장. 국빈의 품격 (5) >

「 박민우 교수. 」

아미르 왕세제의 목소리였다. 민우와 일행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연회가 모두 끝나고 알 카흐파 의장의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할 말이 남았는지 아미르 왕세제가 민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민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사회적인 지위 때문은 아니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아미르 왕세제가 보여준 기품과 위엄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존경받아 마땅했다.

「 멋진 회합이었소. 특히 미주라는 소녀의 그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군. 무언가를 보고 새로운 느낌을 받는 건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소. 」

「 저야말로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오늘의 추억은 잊지 못할 겁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

「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이다. 」

아미르 왕세제가 미소를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곁에 있던 알 카흐파 의장과 그의 아들 자얀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민우는 천성 학자였다. 궁금한 것은 대담히 물었다.

「 실례지만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

「 박 교수는 아직 박사학위가 없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박사들보다 훨씬 깊은 내면과 지성을 갖췄다는 생각이 들었소. 」

「 과찬이십니다. 」

「 아니. 과찬은 아니오. 그저 느낌일 뿐이지. 왠지 당신의 앞길에 환한 빛이 드리워지는 느낌이구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겠소. 」

인자하게 웃은 아미르 왕세제가 신의 가호를 빌어 주며 자리를 떠났다. 곁에 있던 자얀이 민우를 재촉하며 한마디 했다.

「 넌 행운아야. 」

「 왜? 」

「 아미르 왕세제께서는 아무에게나 축복을 해주시지 않으시거든. 」

민우는 싱겁게 웃어 보였다.

축복은 그저 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남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역량에 달린 일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오늘 회합을 통해 큰 수확을 얻은 민우는 별장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알 카흐파 의장은 업무 때문에 다른 차로 먼저 떠났다.

넓은 리무진은 두 젊은이들의 차지였다. 마주 앉은 자얀이 물었다.

「 귀국은 언제지? 」

「 내일 모레. 」

「 좀 빠르네. 먼 길 왔는데 좀 더 쉬었다 가지 그래. 」

「 일이 좀 밀렸어. 4월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 있거든. 무엇보다도 약혼자가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 전에 같이 시간 좀 보내야지. 」

「 오, 약혼자가 있었나? 그럼 내가 여기에 근사한 별장을 하나 지어줄 테니 신혼여행 삼아 한번 놀러 와. 」

「 ······농담이지? 」

「 별장 하나 가지고 농담하는 건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 안 드나? 」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피식 웃은 자얀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탄산수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민우도 한 병 받았다.

「 이쪽 여행 계획은? 」

「 딱히 세우진 않았어. 의장님 일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끝날지 몰랐네. 며칠 계속 회의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다. 」

「 그럼 나랑 좀 다닐래? 」

「 어디로? 」

「 아부다비도 볼 만한 곳이 많지만 역시 두바이가 최고지. 거기서 쉬면서 좀 놀자고. 」

「 그럴까. 」

「 일단 별장에 가서 좀 쉬고 있어. 준비하는 데 시간 좀 걸리니까. 지금은 한낮이니 늦은 오후쯤 움직이는 게 좋겠어. 」

별장에 도착한 민우는 자신의 방에 짐을 놓고 알 카흐파 의장의 서고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길을 좀 헤맸는데, 친절하게도 고용인들이 서고로 가는 길을 테이프로 표시해 주어서 찾기가 쉬웠다.

문을 열고 들어간 민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표정이 밝아졌다. 오래된 책 냄새는 그 어떤 향수보다 향기로웠다.

‘정말 엄청난 곳이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민우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하나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서고에는 각 분야별로 수천 종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고, 모두가 민우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아랍에 대해 조사하면서 나름 지식을 얻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더 넓은 세계가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달 정도 더 있고 싶은데. 너무 아쉽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민우의 옆자리에 다 본 책들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하더니, 책으로 된 탑이 하나 완성되었다.

그때 서고의 문이 벌컥 열렸다. 불만스런 표정의 자얀이 안으로 들어왔다.

「 이봐 민우.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 두바이에 가기로 한 거 잊었나? 비행기 대기시켜 놨다고. 」

「 아아. 미안. 책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

「 대체 뭐가 그렇게 볼 게 많은 거야? 고용인들 얘기 들어보니 어제도 꼬박 여기에서 밤 샌 것 같더만.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책일 뿐인데. 」

민우는 웃으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책장을 쭉 둘러보았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 너야 그렇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여기엔 한국의 큰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책이 가득한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

「 요컨대 너에게는 여기가 보물창고라는 건가. 」

그렇게 중얼거린 자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난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책은 덮었지만 민우의 손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에게 패배감을 느끼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 정말 못 말리는 친구로군. 그럼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책에 푹 빠져 있으라고. 두바이야 언제든 또 가면 되니까. 그때 제대로 둘러보자. 」

「 그래도 돼? 」

「 오늘만 볼 사이인가? 그럼 수고하라고. 젊은 교수 나으리. 」

자얀은 서고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 분야에 집중하는 사람처럼 멋있는 사람은 또 없으니까. 그는 한국에서 온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뭐가 그를 저렇게 열정적으로 만든 거지? 다음엔 한국에 한번 가봐야겠어.’

자얀은 어느새 다음 여행지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민우가 태어난 고향에서 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 * *

3박 4일간의 아부다비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한마디로 성공적이었다. 개인으로서도, 국빈으로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

의장의 서고에서 학문적 시야를 넓혔고, 아랍에미리트의 실무자들과 학술 및 문화교류 사업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나눴다.

‘문화교류 쪽은 문광부 실무자들에게 맡기면 되고, 학술교류는 내가 직접 챙겨야겠어. 우리 대학과 관련된 일이니까.’

민우는 전용기 안에서 쉬지 않고 보고서 작성에 열을 올렸다. 도착하는 대로 박자희 총장에게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민우는 폴라리스 홈페이지에 올릴 공지도 신중하게 작성했다. 공익재단이 출범한 이상 폴라리스가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때 옆에서 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 마실 것 좀 준비해 드릴까요? 전에 드시던 맥주 어떻습니까. 」

「 좋죠. 」

모하메드의 빈틈없는 서비스 덕분에 민우는 제집처럼 마음 편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보고서와 공지 작성을 모두 마치니 세 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휴식은 중요하다. 민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콘솔게임과 영화를 실컷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후 6시경, 민우가 탄 전용기가 인천국제공항에 안착했다.

모하메드는 민우의 짐을 직접 챙겨 주었고, 비행기를 나서기 직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완벽한 프로였다.

「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프로페서. 다음에 또 뵙기를 희망합니다. 」

「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

그와 악수를 나누고 비행기에서 내려와 게이트를 걸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밤하늘이 펼쳐 있었다.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 로비에 나타난 민우는 어마어마한 취재인파에 화들짝 놀랐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탔을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인파였다.

‘저건 뭐야?’

민우가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이번엔 아예 바닥에 안내선까지 구획되어 있었다. 인터뷰를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선을 밟고 섰다.

찰칵! 찰칵찰칵!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지며 셔터음이 들렸다.

“박민우 교수님! 이쪽을 봐주세요!”

“이용우 대사도 회합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습니까?”

“아랍에서 부는 한류 열풍, 기대해도 좋은 겁니까?”

“이번 공익사업에서 폴라리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건가요?”

“얼마 전 장형욱 대통령께서 박 교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셨는데요. 사전에 오간 말이 있습니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귀가 아팠지만, 민우는 최대한 여유를 보이며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수빈은 예쁘게 웃었다.

한때 어설픈 대학원생이었던 그가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꿈같은 일이었지만, 수빈은 언젠가 이렇게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인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빠!”

성실히 질문에 대답하던 민우는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수빈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는 이쯤 하겠습니다. 조만간 청문대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나머지 질문은 그쪽에서 부탁드립니다.”

“박 교수님! 잠시만요!”

기자들의 부름을 뒤로 한 채 민우는 짐을 끌고 수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와 뜨겁게 포옹했다.

민우는 수빈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새를 못 참아서 마중을 나왔어?”

“설마요. 그냥 오빠가 얼마나 유명인사가 됐는지 두 눈으로 구경하려고.”

“솔직하지 못하기는.”

속마음을 들킨 수빈이 부끄럽게 웃었다. 하지만 나름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진짜야. 오빠 나가 있을 때 한국에서는 꽤 시끄러웠거든. 오빠 기사도 자주 올라왔었어.”

“그래?”

민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 이용객들도 연예인이 온 게 아닌지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단 짐을 챙기고 수빈과 함께 공항을 나섰다.

찬바람이 훅하고 몰아쳤다. 아부다비의 뜨거운 날씨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런데 주님은 안 왔어?”

“섭이 오빠랑 두바이로 여행 간다고 하더라.”

“갑자기?”

“오빠한테 자극을 받은 모양이야.”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가려면 국빈 대접 정도는 받고 가야지.”

두 사람은 한바탕 웃으며 택시에 올랐다.

* * *

민우의 공항 인터뷰는 고스란히 녹화되어 각종 뉴스에 소개되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상아대의 유희윤 교수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맞은편에서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성진 교수가 웃으며 물었다.

“분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책상에 웬 파리가 있기에.”

“청소 좀 하셔야겠네요. 파리가 꼬일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닙니까?”

물론 파리 같은 건 없었다. 민우의 은사이자 국문과에서 현대시를 가르치는 조성진 교수는 은근히 유희윤 교수를 자극했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유희윤 교수는 눈을 치뜨며 조성진 교수를 노려보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다그치거나 하지는 못했다.

조성진 교수는 최산호 총장의 전언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번 국제번역전공 원서 접수 미달된 거 아시죠? 아주 처참하다 못해 박살이 났더군요. 거기에 꼼수를 쓰다 정부 지원금도 끊겼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첫 학기부터 학과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네요. 그러니 책임자로서 대책을 내셔야 하겠습니다.”

“크흠.”

“적당한 구색맞추기식 대책은 화만 부를 겁니다. 어쨌든 입학한 학생들 졸업은 시켜줘야 할 테니까요.”

그때 TV에서 민우와 관련된 또 다른 뉴스가 이어졌다. 앵커가 힘 있는 톤으로 큰산번역문학상 대상 수상 소식을 전했다.

― 이번 수상으로 최연소 대상 수상 기록을 세운 박민우 교수는 시상식 소감을 통해 상금 5천만 원을 대한복지재단에 전액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평소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이 많던 박 교수는······

TV가 꺼졌다. 유희윤 교수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지만 조성진 교수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야. 박 선생은 상아대를 나가더니 아주 훨훨 날아오르는군요. 5천만 원이면 큰돈인데 정말 대단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바쁘니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뭐 그러시지요.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대책은 다음 주 목요일 정례회의 때까지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조성진 교수가 나가자 연구실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유희윤 교수는 책상에 놓인 국제번역전공 관련 자료를 꽉 움켜쥐었다.

문득 최산호 총장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 상아대가 그를 버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상아대를 버린 거지요. 오늘 우리는 정말 큰 실수를 한 겁니다. 대학을 바꿀 만한 큰 인재를······ 놓친 거지요.

화락!

유희윤 교수가 신경질적으로 서류뭉치를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인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암담한 현실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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