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 95장. 국빈의 품격 (4) >
위화감 없이 회합에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자얀 덕분이었다.
그는 회합에 참여한 중역들을 민우에게 소개해 주었다. 또한 그들이 속한 기관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덕분에 민우는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랍에미리트의 국부펀드 대표들과 관련 부처의 장관들이 모인 자리라는 건가?’
주요 인사들은 아부다비투자청(ADIA), 국제석유투자공사(IPIC), 에미리트투자청(EIA), 무바달라개발공사(Mubadala)의 수장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족이었고, 재무부장관과 고등교육부장관도 명문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가진 자산을 합치면 대체 얼마나 될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수백 조는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민우는 잡념을 털어내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랍에미리트의 중역들은 하나같이 민우를 칭찬했다.
「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젊은 분이군요. 놀랍습니다. 그 나이에 벌써부터 그런 위업을 쌓으시다니요. 」
「 맨부커 수상작인 <태엽시계>는 저도 읽어봤습니다. 아주 혁명적인 작품이었죠. 번역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없습니다만 영국 친구가 호평을 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책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
「 기회가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소. 알 카흐파 의장은 칭찬에 인색한 분인데 아주 극찬을 하시더군. 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라고. 」
외모를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특유의 기품이 묻어 있었다. 정중하면서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어조였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벼운 인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 명씩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마치 오랜만에 친척을 만난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박민우 교수.”
바로 그때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와 민우가 깜짝 놀랐다. 모두 아랍의 전통복을 입고 있어 아랍인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중 한국인이 있었다.
안경을 낀 중년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민우는 얼떨결에 그와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놀라신 모양이네요. 미리 말씀을 못 드려서 미안합니다. 저도 갑작스레 초대를 받은 거라서. 전 이용우입니다. 주UAE 대사지요.”
“그러시군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반가워요. 장형욱 대통령께서도 이번 방문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박 교수님의 두 어깨에 정말 많은 것이 달려있는 셈이지요. 민간인 출신이 이렇게 큰일을 맡은 건 처음이니까요.”
막연히 김강현 장관과 연결이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민우는 대통령이 언급되자 깜짝 놀랐다.
“대통령께서도 이번 일에 관여하고 계신 겁니까?”
“관여까지는 아니고 관심 정도라고 할까요. 대통령께서는 문화산업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국의 교육열은 미국에서도 알아주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곳에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 여러모로 바빠지실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용우 대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청와대에 불려가는 건 아닌가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2017년 탄핵정국 속에서 정권이 안정적으로 교체가 되었고, 장형욱 대통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민심 수습은 물론 외교에도 신경을 써 국격을 한 단계 높이고 있었다. 나름 수완가였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겠구나. 하지만 분명 호재야. 기회가 오면 잘 잡아야겠어.’
민우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알 카흐파 의장이 박수를 한 번 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 친애하는 여러분. 슬슬 회합을 시작하지요. 다들 앉읍시다. 박 교수는 이쪽으로 오시죠. 」
알 카흐파 의장은 커다란 소파가 놓인 상석으로 민우를 안내했다.
상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는 두 개가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의 초대 대통령의 거대한 사진이 걸린 바로 앞 자리였는데, 민우와 아미르 왕세제가 그곳에 앉았다.
그와 나란히 자리에 앉게 된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아미르 왕세제는 인자한 미소로 화답하며 개회를 알렸다.
사업 논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아랍의 출판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과 알 카흐파 의장이 주도하는 공익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출판부분에 대한 논의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우선 민우가 계획을 말했다.
「 먼저 저희 폴라리스에서 아랍의 우수한 도서를 선정하고 제가 직접 샘플 번역을 할 계획입니다. 그 이후 세계 각국의 출판사와 접촉을 해서 실제 출간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
「 잠깐. 박 교수 혼자서 샘플 번역을 하겠다는 말이오? 」
「 그렇습니다. 」
「 허나 그렇게 한다면 번역 가능한 언어가 많이 줄어들지 않겠소? 」
알 카흐파 의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민우는 자신 있게 웃으며 그 걱정을 불식시켰다.
「 저는 전 세계의 주요 언어를 모두 습득했습니다. 현지인 수준으로 번역이 가능하죠. 조금 믿기 어려우시겠지만요. 」
「 그게 정말이오? 」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때 알 카흐파 의장이 나섰다.
「 박 교수의 말은 사실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아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제가 없는 시간 쪼개서 한국까지 가서 박 교수를 만난 겁니다. 」
알 카흐파 의장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인 모든 이들은 알 카흐파 의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내 수행 직원에게 전달했다.
「 죄송한데 이것 좀 하나씩 나눠 주세요. 」
곧 민우가 준비한 인쇄물이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인쇄물을 읽기 시작했다. 민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 보고 계신 건 타예브 살리흐의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라는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아랍어권 소설로는 2014년 처음으로 한국에 번역이 된 책이죠. 그 책의 도입부를 여러 언어로 번역한 겁니다. 」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맨 위는 아랍어로 되어 있는 원문이 있었는데, 그 아래로 영어 및 각종 유럽어, 아시아어로 모두 번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노년의 왕족이 인쇄물을 흔들며 질문을 던졌다.
「 믿을 수가 없소. 혼자서 이 많은 언어로 번역해냈단 말이오? 」
「 그렇습니다. 테스트가 필요하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거나 가져오셔도 됩니다. 」
「 허······. 」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원문과 대조를 해보기도 했는데, 당연히 문제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민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 상황을 즐겼다. 한국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모두가 민우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아미르 왕세제가 직접 나섰다.
「 좋소. 박민우 교수.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이 필요하오? 」
「 매해 아부다비에서 국제도서전을 열긴 합니다만······ 넓게 봤을 때 아랍 도서에 대한 인식과 수요는 저조한 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세계 각국의 출판사들은 방어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수익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따라서 출판관련 기금을 조성하여 출판에 드는 비용 중 일부를 우리가 부담한다면 현지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
「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즉시 그렇게 시행하리다. 」
약간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은 몰랐다. 치트키를 쓴 것 같아 약간 재미가 반감됐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이것은 단기적인 문제이고, 중장기적으로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 세계 대학에 아랍어문학 관련 학과를 설치하거나 어학원을 세우는 것도 대안이 될 거라 봅니다. 」
「 과연. 하지만 그 부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
논의가 끝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오늘의 핵심 안건이자, 알 카흐파 의장이 추진하는 공익사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굵직한 내용은 그가 직접 설명했다. 이미 개략적인 내용이 모두 공유가 된 상태라 포인트만 간략하게 집어 설명을 했다.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민우가 나섰다.
「 센트럴북스의 <인문과학총서>도 판권을 확보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그런 책입니다. 공공서비스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죠. 」
「 아마 한국에서는 박 교수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요? 」
「 예. 한국어판 번역과 오픈 라이브러리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폴라리스가 나선다면 전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오픈 라이브러리는 구굴에서 참여하기로 되어 어렵겠지만, 도서관 서비스 자체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
「 흐음. 센트럴북스가 협력할지 의문이군요. 아무래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보니. 」
그 의문은 민우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말했다.
「 교섭은 제게 맡겨 주시지요. 그쪽 책임자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 이런 멋진 공익사업을 그냥 흘려들을 분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 오, 그렇습니까? 」
「 기대되는군요. 」
믿음직스러운 말에 중역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민우의 나이가 젊어 마음에 남았던 약간의 우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민우가 다시 나섰다.
「 한 가지 더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까 알 카흐파 의장께서 말씀하신 오프라인 학교 설립 건 말입니다. 」
「 음? 그 아이디어에 무슨 문제라도 있소? 」
「 아뇨. 이곳 현지인 교사를 파견하는 것보다 파견지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역으로 초청해 유학의 기회를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유학생은 아랍에미리트 대학 출신으로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고, 고국에 돌아가서도 위화감 없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겁니다. 」
「 그거 좋은 생각이군!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
「 신의 자비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군요. 」
「 동감합니다. 」
의견 수렴이 모두 끝났다. 알 카흐파 의장이 발의한 국제적인 공익사업을 추진할 재단을 근시일내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오늘 모인 중역들이 재단의 한 자리씩을 차지했다. 물론 민우도 실행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마무리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알 카흐파 의장이 민우에게 물었다.
「 그런데 박 교수. 전에 통화를 했을 때 어떤 어린 친구를 만났다고 했었지요. 그 이야기나 좀 들어봅시다. 여기 모인 분들도 궁금해하던 차요. 」
「 아, 그거요. 」
민우는 설명을 하려다 말고 가방에서 인쇄물 뭉치를 하나 꺼냈다. 민우는 다시 수행 직원에게 하나씩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힐끔 인쇄물을 바라본 수행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서류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림을 받아 든 아랍의 유력 인사들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있는 화가의 명화도 아니고 선이 삐뚤삐뚤한 조악한 그림이 대체 어떻게 민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인지 궁금했다.
「 그건 정미주라는 아이가 그린 그림입니다. 엄마와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그림이죠. 」
그렇게 운을 뗀 민우는 미주와의 일화를 곁들이며 그림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아랍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그림에 몰입했다. 미술은 만국의 공통어라는 말이 있던가. 그들은 결국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 전 세계에 이 아이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아이들이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
민우가 힘주어 말하자 연회장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이름 있는 미술품만 봐왔던 그들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그림에서 이렇게 큰 감동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과연 명화란 무엇인가?
그들은 깨달았다. 세상엔 좀 더 다양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그들의 내면에서 명화의 기준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