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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60화 (260/500)

260화 : < 95장. 국빈의 품격 (3) >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프로페서. 」

민우가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친절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던 그는 ‘모하메드’라는 이름의 남자 승무원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인상이 좋은 남자였다. 그는 영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민우도 영어로 대답했다.

「 이륙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거 같아서 뭐 하고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

「 그러셨군요. 」

손목시계를 확인한 모하메드가 싱긋 웃었다. 확실히 이륙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만, 간단히 와인 한 잔 하시면서 영화를 시청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 세계의 명작은 물론 최신 영화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까요. 콘솔 게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콘솔별로 전 세계에서 발매된 모든 타이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 모든 타이틀이 다 있다고요? 」

「 물론입니다. 알 카흐파 의장님의 취미 중 하나가 바로 게임이거든요. 」

평소 게임을 즐겨했던 민우였기에 혹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로 시간을 보내기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논리였다.

게임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이번 국빈 방문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였다.

‘뭔가 계획을 좀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아부다비에 가면 고위 인사들을 만날 텐데. 지금 가지고 있는 계획은 좀 막연한 면이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다. 때문에 민우는 신중해졌다. 쉽게 생각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 모하메드 씨. 혹시 조용히 책을 읽을 만한 곳은 없을까요? 」

「 있습니다. 기내에 간이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명저와 신간들도 있지요. 」

「 다른 책은 괜찮고 제가 가져온 책을 읽으려고요. 필기도 좀 하고. 」

「 그러시다면 이쪽 스위트룸보다는 객실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

민우는 모하메드의 뒤를 따라 비행기 통로를 걸었다. 가는 도중 만나는 모든 승무원들이 싱긋 웃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는 와중에 ‘국빈’이라는 개념이 민우의 머릿속에 정립되었다. 조금의 불편도 없을 거라는 알 카흐파 의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곧 민우는 객실에 앉았다. 집무용 책상과 스탠드는 물론, 서류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이 준비돼 있는 멀티미디어 박스였다.

「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쪽을 보시면 버튼이 있는데요. 이렇게 조작하면······. 」

모하메드는 콘솔 버튼을 하나씩 누르며 작동법을 설명해 주었다. 의자의 각도는 물론 조명까지 조절할 수 있어 집중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민우는 우선 조도를 낮추고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가방에서 만년필과 노트를 꺼냈다.

「 프로페서. 마실 것을 좀 준비해 드릴까요? 」

「 맥주 있으면 한 잔만 갖다 주세요. 」

「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민우는 노트를 펴고 만년필로 끼적이기 시작했다. 알 카흐파 의원의 계획을 정리하고 추가할 내용을 구상해 보려는 것이었다.

‘온라인 교육 시스템이 핵심이 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어.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민우는 오프라인 교육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상아대와 청문대를 거치며 사이버강의도 해보았지만, 실제 강의만큼 만족도가 높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학생들도 마찬가지겠지. 단순히 배우는 것을 떠나 친교활동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유대감이나 사회성도 체득할 수 있고. 그렇다면 교사 파견이 문제가 될 수 있겠네. 현지인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해외에서 파견할 것인가.’

민우는 낙후 지역에 학교를 세우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렇게 떠오르는 상념들을 러프하게 메모했다.

잠시 후 모하메드가 간단히 안주와 맥주를 준비해 주었다. 캔을 본 민우가 반색했다. 크로넨버그 1664 블랑이었다.

「 우연이네요.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인데. 」

「 우연은 아닙니다. 이 여객기는 프로페서의 취향에 맞춰져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

모하메드는 꾸벅 인사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민우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조용히 앉아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 * *

아부다비국제공항까지는 11시간가량 소요되었다. 그 사이에 민우는 미팅 자료를 모두 정리했고, 모하메드의 도움을 받아 출력까지 할 수 있었다.

자료는 관계자들이 쉽게 볼 수 있게끔 모두 아랍어로 정리했다. 루카치의 안경이 있는 한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완전히 멈춰 서자 모하메드가 다가왔다.

「 여정은 어떠셨습니까. 프로페서. 」

「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불편함 없이 잘 왔네요. 감사드립니다. 」

「 별말씀을요. 아직 제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도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

「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객실을 나섰다.

곧 여객기의 문이 열렸고, 민우는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밖으로 나갔다. 한낮이라 살짝 더운 감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무덥지는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민우는 깜짝 놀라 난간을 붙잡았다.

계단부터 게이트 입구까지 붉은 융단이 깔린 것은 그렇다 쳐도, 통로를 호위하듯 도열한 의장대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이거 손이라도 흔들어 줘야 하나?’

뒤편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민우는 웃으며 그쪽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민우가 계단을 내려가자 전통복을 입은 알 카흐파 의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

「 제 집처럼 아주 편안했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그거 다행이군요. 아부다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했다.

그런데 마중을 나온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검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젊은 사내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연 민우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

「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아들인 자얀입니다. 」

자얀은 키가 크고 날씬하며 코가 오뚝해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날렵한 눈에 야심이 보이는 듯했으나,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이었다.

「 아버지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박민우 교수님. 세계학에 일가견이 있으시다고요. 」

「 감사합니다. 그런데 세계학이라는 용어를 붙일 만큼 거창하진 않습니다. 그저 연구실에서 책이나 읽고 논문을 쓰는 정도인데요. 」

「 각 나라와 문명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자세야말로 세계학의 기본이 아닙니까? 교수께서 말씀하신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군요.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대면할 기회를 얻어 영광입니다. 」

많이 배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중하면서도 조리 있는 말이었다.

자얀이 흰 이를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환하게 웃는 그 버릇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았다. 민우도 같이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알 카흐파 의원의 바라던 것이었다.

「 허허허. 나이가 비슷하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겠군요. 친구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자얀은 아부다비석유투자회사의 회장으로서 우리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줄 겁니다. 」

「 그러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쿨하게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민우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기껏해야 서른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데 기업의 수장이라니.

그래도 민우는 가슴을 폈다. 오늘의 주인공은 눈앞의 두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자얀이 물었다.

「 혹시 아랍인 친구가 있으십니까? 」

「 아뇨.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랍인을 만나기가 무척 힘들거든요. 」

「 그렇군요. 실은 저도 한국인 친구가 없는데 이번 기회를 잘 살려보고 싶군요. 」

「 친구하자는 말씀인가요? 」

민우가 묻자 자얀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악수를 청했다. 민우가 그 손을 잡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앞으로는 서로의 이름을 편히 부르기로 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알 카흐파 의장이 나섰다.

「 슬슬 이동하시지요. 제 별장에서 하루 쉬시고 본격적으로 일정을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

「 예. 부탁드립니다. 」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의장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민우는 마치 대통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고급 리무진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고, 민우는 가벼운 고양감을 느끼며 차에 몸을 실었다.

* * *

해가 저물 무렵 리무진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는 가벼운 한기를 느꼈다. 비행기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날이 따뜻했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일교차가 크다는 말이 뒤늦게 생각났다.

「 자, 이곳이 제 별장입니다. 」

알 카흐파 의장이 손으로 건물을 가리켰다. 민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별장이 아니라 별궁 아니야? 엄청나네······.’

마치 페르시아의 궁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외부가 모두 석조로 되어 있었는데, 아랍 특유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담아 낸 건물이었다.

그 장관을 한눈에 담은 민우의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 멋진 것을 혼자만 보다니. 민우는 내심 수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정말 대단하네요. 멋집니다. 마치 유적지 같은 느낌이에요. 」

「 하하.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왕족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지요. 오늘은 이곳에서 쉬시고, 내일 오전에 환영회가 있으니 같이 움직이시지요. 아미르 왕세제도 참여하실 겁니다. 」

그렇게 일행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더욱 화려했다. 고급 융단은 물론, 벽화와 고풍스러운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넓은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도착하자 별장의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민우는 아랍의 모든 미(美)를 집중시킨 듯한 근사한 방에 짐을 풀었다. 잠시 후 노크가 들리더니 자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 민우. 잠깐 괜찮으면 따라 와. 좋은 걸 보여주지. 」

「 뭐 맛있는 거라도 있어? 마침 출출했는데. 」

두 사람은 너스레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성격이 잘 맞은 데다 자얀은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따라와 봐. 」

자얀은 다시금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궁금증이 든 민우는 짐을 정리하던 것을 내버려 두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가다 보니 거대한 방이 하나 나타났다.

「 창고 같은 느낌인데. 」

「 어떻게 보면 창고라고도 할 수 있겠지. 」

그렇게 대꾸하며 자얀은 두 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고목의 마찰음과 함께 방 내부가 공개되었다. 안으로 들어온 민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한 책 냄새. 그곳은 바로 알 카흐파 의장의 개인 서고였다.

안경을 쓴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천 종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아랍의 정수가 한 자리에 모인 느낌이었다. 고서는 물론 최신의 도서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자얀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 어때? 감상은. 」

「 환상적이야. 」

「 책을 좋아한다고 들었어. 오면 꼭 보여주고 싶었지. 이 서고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기도 하거든. 」

「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

「 하하하. 학자들은 다 똑같지 않나? 」

자얀이 지나가듯 물었지만 민우는 침묵했다. 어느새 그는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아랍의 고전문학에 대해 논한 책이었다.

「 저녁 준비되면 알려줄 테니 마음 놓고 읽고 있으라고. 」

자얀은 서고를 나섰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가던 고용인을 불러 민우를 잘 보필하라고 엄중히 명했다.

그렇게 민우는 서고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민우는 그곳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는 이런 규모의 장서가 비치된 곳이 없다. 아랍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민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새 아침이 밝았다.

* * *

민우는 가볍게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오전 10시쯤 일행과 함께 별장을 떠났다.

차 안에서 민우는 자신이 정리한 아이디어에 대해 의논했다. 알 카흐파 의원은 박수를 치며 긍정을 표했다. 특히 오지에 학교를 세우고 온라인 교육을 연동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

「 아마 박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동지들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겁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

「 그랬으면 좋겠네요. 」

곧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회합이 열리는 곳은 아미르 왕세제의 별궁이었다.

별궁 연회실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날씨가 더웠지만 민우는 최대한 노출을 자제하기 위해 정장을 입었다. 흰 전통복 사이에서 민우만 도드라져 보였다.

「 안녕하십니까. 박민우입니다. 」

「 오, 반갑소! 」

통역이 필요 없다는 건 정말 큰 차이를 만들었다. 민우는 모인 사람들과 차례대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될 때마다 깜짝 놀랐다. 아미르 왕세제는 그렇다 쳐도, 다들 하나같이 이곳에서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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