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 < 95장. 국빈의 품격 (2) >
“다녀왔습니다.”
이수빈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어 던지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떠올리고는 얌전히 바르게 놓았다.
그때 거실에서 수빈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하경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늦었구나. 추운데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니?”
“그냥 강남역에서 차 마시고 수다 떨고 놀았어. 이제 출국 얼마 안 남았으니까 보자는 친구들이 많네.”
“그러다 감기 걸릴라.”
“헤헤. 근데 아버지는?”
“안에서 저녁 드셔.”
저녁이라는 한마디에 수빈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달짝지근한 갈비찜 냄새가 났다. 동시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식욕이 늘었다. 혹시라도 살이 찔까 조금씩 먹고 있는데, 이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갈비찜 했어? 나도 좀 먹을래.”
“저녁 안 먹었니?”
“카페에서 케이크 몇 조각 먹었는데 금방 배고파지네.”
“잘 좀 먹고 다니지. 차려 놓을 테니 옷 갈아입고 오렴.”
“네~”
수빈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딸을 엄한 눈으로 힐끔 바라본 이문구가 묵묵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밥과 뜨거운 국이 차례대로 놓이기 시작했다. 이수빈의 얼굴이 활짝 폈다.
“수빈이 너 아직도 저녁 안 먹은 게냐?”
“그냥 가볍게 먹었는데 배고파서요.”
“쯧쯧, 남 도우러 다니는 녀석이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면 쓰나? 밥은 잘 먹고 다녀야지.”
으레 듣는 잔소리에 수빈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당분간은 듣고 싶어도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짭조름한 갈비를 한 입 깨물고 뜨거운 밥을 입에 넣으니 마음이 행복해졌다. 무가 들어간 소고기국도 기가 막혔다. 수빈은 열심히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밥공기와 국그릇은 다 비어 있는데, 그는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왜?”
이문구가 신문을 살짝 내리며 눈을 마주쳤다.
“다 드신 거예요? 계속 앉아 계셔서요. TV도 안 보시고.”
“신경 쓰지 말고 먹기나 해라.”
“아하, 알겠다! 저 이제 곧 미국 가니까 서운해서 앞에 앉아 계신 거죠?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그쵸? 우리 아부지 딸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인석이 밥 먹다 말고 무슨 소리야?”
헛기침을 한 이문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 모습을 보던 수빈과 하경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빈은 외동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는 평생을 수빈만 바라보고 울고 웃었다. 아쉬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경아가 물었다.
“전에 고민한다는 건 어떻게 됐니?”
“아, 그거. 일 년 더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오빠랑 떨어져 있는 것도 좀 그렇고. 아버지도 저러다 우울증 걸리시면 어떡해.”
수빈은 하버드에서 기본과정을 수료하고 심화과정에 들어갈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포기했다. 이미 배울 것은 충분히 배웠다고 판단했다.
민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미주와의 일로 깨닫는 게 많았다.
오히려 학교와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살갗을 부딪치며 배우는 게 훨씬 많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 그렇게 마음 약한 분 아니다. 네가 하버드에서 연구하게 됐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
“정말?”
“그렇다니까. 친척들한테 전화 오면 매번 그 이야기뿐이다. 그나저나 여름에 돌아오면 상견례는 바로 할 거니? 그쪽 부모님도 한번 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오빠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앞으로 더 바빠진다고 했으니 결혼할 시간이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냥 간단히 가족끼리 밥만 먹고 같이 살면 안 되나?”
“안 돼. 나랑 너희 아버지가 낸 부조가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수빈은 할 말을 다 하면서도 야무지게 한 공기를 다 비웠다. 그런데 아직 만족하지 못한 그런 표정이었다. 결국 그녀가 빈 공기를 내밀었다.
“엄마. 나 반 그릇만 더 줘요.”
“더? 곧 잘 시간인데? 그러다 탈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갈비찜이 너무 맛있어. 이런 거 미국에선 못 먹잖아.”
어쩔 수 없이 하경아는 반 공기를 더 떠 줬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너 요즘 좀 많이 먹는 거 같지 않니?”
“그런가? 먹을 게 막 땡기긴 하는데······ 겨울이라 그런가 봐. 열량이 많이 필요한 계절이잖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지만 공대 교수인 어머니를 납득시키진 못했다. 수상한 표정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경아는 차분히 배를 깎기 시작했다.
“그런데 민우는 요즘 많이 바쁜가 봐?”
“프로젝트 잠깐 쉬고 다음 주에 아부다비 간대.”
“바쁠 텐데 고생이 많겠구나.”
“고생은 무슨. 초호화 여객기 타고 발 뻗고 편히 다녀오겠지. 국빈이니까.”
“그래도 먼길이잖니. 다녀와서 한번 우리 집에 들르라고 하렴. 온다온다 해놓고 깜깜 무소식이니 조금 서운하네.”
“알았어요. 나 미국 나기가 전에 오라고 할게. 아, 배부르다. 잘 먹었습니다!”
곧 온가족이 거실에 모였다.
열심히 배를 먹으며 시계를 흘끔 바라보던 수빈이 활짝 웃더니 리모컨을 쥐었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이문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채널이 KBC로 돌아갔다. 마침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막 전하던 소식이 끝나고 새로운 코너가 진행됐다.
“다음으로 뉴스 초대석 시간입니다. 어제부터 화제가 됐었죠. 청문대의 박민우 교수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꾸벅 인사했다.
수빈의 가족은 TV에 집중했다. 수빈은 배를 깔고 누워 히죽 웃다가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고는 똑바로 앉아야 했다.
앵커가 질문을 시작했다.
“뉴스 초대석은 두 번째 출연이시죠? 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고 나서 다시 출연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때는 김영화 작가님하고 같이 나와서 별로 떨리지 않았는데, 뭐랄까. 역시 오늘은 좀 다르네요.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민우는 가볍게 소감을 말했다.
메이크업이 들어가 평소와는 좀 달랐다. 머리에도 제대로 힘이 들어갔고, 복장도 캐주얼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앵커가 말을 받았다.
“요즘 ‘독서의 밤’에서도 맹활약 중이신데 카메라에 적응이 되지 않으셨나요?”
“조금 다르죠. 그건 녹화방송이지만 이건 생방송이라 그런지 긴장이 되네요.”
”그렇군요. 자,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어제 오늘 인터넷이 뜨거웠습니다. 이번에 박 교수께서 또 한 건 하셨는데요. 아부다비국에서 국빈으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기분이 이렇다라고 말씀을 못 드리는 게,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어떤 건지 감 자체가 안 와요. 그래서 이번에 가서 경험하고 오려고 합니다.”
“하하하. 돌아오신 다음에 꼭 소감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듣기로 오늘 문화체육관광부의 김강현 장관을 만나고 오셨다던데. 어떤 이야기가 오갔습니까?”
“맡은 임무를 잘 완수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민우가 짧게 답했다. 민우는 방송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역시나 앵커가 제스처를 취하며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막연한데요. 좀 더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이번 방문을 기점으로 양국의 문화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랍이슬람총서를 기획하고, 각종 영화와 드라마, 음악, 미술 등 양국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나눌 계획이니까요. 물론 개인적으로 하려는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저는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방금 말씀하신 것 중 전자는 이미 잘 알려진 부분인데, 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려는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그건······.”
민우는 간단하게 알 카흐파 의장이 하려는 공익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앵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고, 민우는 신중히 대답을 했다.
이미 질문을 사전에 확인했기 때문에 말을 더듬거나 난처한 표정을 지을 일은 없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민우가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눈길을 걸으며 다짐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앵커가 눈을 크게 뜨며 질문했다.
“정말 놀라운 사업입니다. 규모가 엄청날 것 같은데요. 그 사업에 폴라리스도 참가를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죠?”
“회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만, 모두들 공익사업의 목적을 잘 이해해 주셨습니다. 모든 회원들과 통화를 했고 동의를 얻었습니다.”
앵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준비된 대본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차례였다.
“자, 이제 정리를 좀 해볼까요. 박민우 교수께서는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동경대에도 다녀오셨고, 청화대에서도 강연이 잡혀 있지요. 이밖에도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대학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문화훈장 수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로요. 겸손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민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애가 타는 것은 그와 마주한 앵커만이 아니었다. TV를 통해 민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빈과 그녀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곧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겠죠. 그때는 어떤 학생들을 만날까.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아아.”
앵커가 감탄음을 흘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뱉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생방송인데. 아무튼 오랜만에 진짜 교수님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오늘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뉴스 초대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우와 앵커가 꾸벅 인사했다. 화면이 돌아가고 메인 앵커 두 명이 새로운 뉴스를 전하기 시작했다.
“정말 훌륭한 청년이구나. 어쩜 저렇게 야무질까.”
TV를 보던 하경아가 말했다. 싱긋 웃은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해 이렇게 운을 뗐다.
“훌륭한 청년인데도 사귀는 걸 반대한 분이 여기 계시네요. 이문구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크흠. 뭐 다 지나간 이야기를······.”
신문으로 멋쩍은 표정을 가리는 이문구의 모습을 본 두 모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동안 집에서 민우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 * *
1월 중순, 민우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로 향하는 여객기에 올랐다.
약속대로 알 카흐파 의장이 왕가의 전용기를 보내주었다. 탑승 수속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게이트부터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수염도 깔끔하게 정리해 아랍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절도가 있어 보통 실력이 아닌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민우는 안내원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로 들어선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일반적인 항공기와는 인테리어가 완전히 달랐다. 줄지어 서 있는 좌석 대신 고급 호텔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펼쳐졌다.
그때 승무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붉은 모자와 하얀 스카프를 머리에 쓴 미모의 아랍 여인이었다.
“환영합니다. 박민우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녀는 한국어로 말했다.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알아듣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알 카흐파 의장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목적지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잠시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출항 전에 객실과 시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승무원이 짐을 받아주었고, 민우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고급스러운 융단이 복도에 깔려 있어 걷는 느낌이 좋았다.
민우는 집중하며 안내를 들었는데, 보고 들을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개인 공간엔 유명 디자이너가 설계한 침실과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고, 한쪽으로는 샤워 시설까지 있었다. 화장실은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다음 칸으로 가니 와인 바와 대형 TV가 보였다.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어 보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승무원은 일류 호텔 출신의 셰프와 전문의까지 대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게 비행기야 호텔이야?’
민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날개와 엔진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 비행기가 맞긴 한 모양인데, 안과 밖은 너무 달랐다.
안내를 모두 듣고 객실로 돌아온 민우는 무엇부터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