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 95장. 국빈의 품격 (1) >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바람도 솔솔 불어와 눈발을 흐트러트렸다. 전형적인 겨울의 정취가 청문대 캠퍼스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길 위로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그것은 민우였다.
그는 우산을 쓴 채 캠퍼스를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지금은 눈발이 좀 약해졌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박눈이 내려 시야가 가려질 지경이었다.
드문드문 우산을 쓰고 걷는 학생들이 눈에 보였다. 인사를 하는 학생도, 그냥 지나치는 학생도 있었다.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학은 넓으니까.
사실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지금 민우는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었다. 알 카흐파 의장이 제안했던 것에 대해 민우는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사실 민우는 보다 더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다. 요 며칠 있었던 일을 간추리다보면 하나의 근본적인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과연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개척할 수 있는 걸까?’
철학적 명제를 떠올린 민우의 두 눈이 깊어졌다.
미주는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가 떠올린 이 명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소녀. 그리고 그녀의 투병기가 사상의 폭을 더욱 깊게 만들어준 것이다. 삶과 죽음만큼 인문학의 본질과 가까운 테마는 또 없으니까.
‘미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새 생명을 얻었어. 그렇다면 그것은 개척된 운명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정해져 있던 운명일까?’
그 명제를 두고 민우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눈길을 걸었다.
간단히 답을 얻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수많은 천재들이 운명에 대해 고찰했지만, 그 누구도 명쾌하게 증명을 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덧 인문대 건물 뒤편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평소 인적이 드문 곳이다.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눈길이 펼쳐졌다.
뽀드득― 뽀드득―
민우는 차분히 눈길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민우는 멈춰서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의 모습이 보였다. 발자국은 선명했으나 외로워 보였다.
‘이번 의장님의 프로젝트는 아마 이와 비슷한 경험이 되겠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걷는 것.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에 대한 설렘이 서로 뒤엉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다.’
강렬한 확신이 들자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한참동안 자신이 찍은 발자국을 내려다보고 있던 민우. 곧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건물을 한 바퀴 돈 그는 우산을 접고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폴라리스 연구실이었다.
그 사이 민우는 시계 앱을 열어 서울과 아부다비의 시차를 확인했다. 다섯 시간. 지금 아부다비는 오전일 것이다.
민우는 미리 저장해 둔 알 카흐파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루.”
다소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알 카흐파 의장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민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히 아랍어로 말했다.
「 안녕하세요.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통화 괜찮으십니까? 」
「 연락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시간은 우리의 편이니까요. 」
「 마음을 정했습니다. 전에 주신 제안, 하겠습니다. 폴라리스도 적극 의장님의 사업에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
「 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군요. 환영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
민우는 웃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금방 떠올랐다. 흰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결정을 내렸군요? 아직 보름이나 더 남았는데 말입니다. 」
「 요 며칠사이 좀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린 친구를 만났는데, 덕분에 마음을 빨리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하루라도 빨리 돕고 싶어졌어요. 」
「 어서 듣고 싶군요. 그 이야기. 」
알 카흐파 의장은 흥분을 억누르며 차분히 대화를 이어갔다.
「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와 뜻을 함께 할 동지들을 소개해 주고 싶은데 이쪽으로 한번 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 박 교수가 바쁜 분이라는 건 잘 알지요. 그래서 이번 초청에 제 이름을 걸기로 했습니다. 」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름을 걸다뇨. 」
「 대단한 건 아닙니다. 우선 편의를 위해 전용기를 보내드리지요. 그리고 당신이 체류하는 동안 그 어떤 불편도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 아부다비국의 국빈으로 초대될 거니까요. 」
국빈이라는 말에 민우가 살짝 놀랐다.
하지만 알 카흐파 의장의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연방평의회 의장임과 동시에 아부다비 왕가의 일원이었으니까.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은 정재계 인사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교수이자 학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생각을 달리했다.
‘자격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게 아니야. 결국엔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거지.’
그래서 민우가 정중히 답했다.
「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스케줄 확인하고 가능한 일정 말씀 드릴게요. 」
「 혹시 일행이 있습니까? 」
「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아마도 오래 체류하지 못할 테니 그냥 혼자 가겠습니다. 」
핸드폰 너머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 카흐파 의장도 수빈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 나중에 박 교수를 위한 신혼여행 플랜을 직접 짜 줘야겠군요. 둘러볼 곳이 많답니다. 각설하고, 앞으로의 일정은 내 비서관인 하메드가 전달해줄 겁니다. 다른 일은 그와 상의하도록 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내 직통전화로 연락하도록 하시지요. 」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전화를 끊으니 어느새 폴라리스 연구실에 도착해 있었다. 산을 하나 넘은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민우는 그 기분을 만끽하며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어머, 오늘은 좀 늦게 오셨네요?”
“맨날 늦는 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 혈압!”
이다혜가 뒷목을 잡았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여전했다.
피식 웃은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포트 앞에 섰다. 그리고 커피를 천천히 컵에 따르며 늦게나마 대답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오느라 늦었다.”
“이 날씨에요?”
“밖에 눈 많이 쌓였거든.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학교 한 바퀴 돌고 왔지.”
“은근히 낭만주의자시네요.”
“그런가?”
“아니면 전생에 강아지였거나.”
실없는 농담인 걸 아는데 듣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다혜의 영양가 없는 이야기 몇 마디를 더 듣고 책상으로 돌아온 민우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원하는 서류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다 둔 거 같은데······ 이다혜. 혹시 폴라리스 회원 명부 너한테 있어?”
“앗. 지금 드릴게요.”
이다혜가 서류를 가지고 후다닥 달려왔다. 한번 슥 훑어본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적과 기타 정보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명부는 뭐에 쓰시려고요?”
“지금부터 모든 회원들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다.”
“다 합치면 70명이 넘는데요? 그냥 메일로 전파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직접 설명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생각해 보니 두 조수들에게도 이야기를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민우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너희들도 알아둬야겠구나. 폴라리스 조교들이니.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 카흐파 의장님과 프로젝트 하기로 결정했다. 아까 전화 드리고 오는 길이야.”
“우와, 정말요? 대박!”
“그래. 바꿔 말하면 앞으로 너희들의 일이 두 배, 아니 세 배는 늘어날 거라는 말이기도 하지.”
“잠깐만요. 일은 늘어도 월급은 안 늘어나잖아요!”
민우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거기까지는 고려해 보지 못했다.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한 민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후원금에서 일정 금액을 운영비로 쓰면 되겠다. 조교 월급을 늘릴 수는 없으니 추가로 더 얹어 줄게. 그러면 되지?”
“하지만 일이 늘어난다면 인원을 미리 충원하는 것도 고민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과연 남희석다운 합리적인 지적이었다. 앞으로 70여명에 달하는 회원들과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려면 조교 두 명으로는 불가능하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건 내가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릴게. 희석이는 하던 일 마저 하고, 다혜 넌 여기 명부에 적힌 회원국들 시차 좀 파악해서 적어 줘. 새벽에 전화를 할 수는 없으니까.”
“넵.”
다시 명부를 받아든 다혜는 쪼르르 자리로 돌아가 시차를 검색했다. 시차 정보는 네이비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차를 확인한 민우는 통화 가능 시간에 들어간 회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뭔가 이상하지 않니?”
“그러게요.”
열심히 일을 하던 다혜와 희석은 같은 의문을 떠올리고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청각을 민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집중했다.
이다혜가 중얼거렸다.
“대체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거야?”
“지금 나온 것만 해도 열 개는 넘는데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또 뭐더라?”
“괴물이네.”
“아깐 강아지라면서요.”
“퇴치할까?”
“레벨이 부족합니다.”
“역시 그렇지?”
그렇게 주고받은 두 조수는 신기한 눈으로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통화를 시작했다. 이번엔 말레이시아어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박 선생!”
국문과 류재혁 학과장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두 조교가 깜짝 놀랐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잠시만요.”
민우는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그가 난입해 전화를 끊기가 쉬웠다.
민우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벌건 얼굴로. 뛰어 오셨어요?”
“그건 내가 한 질문이잖아!”
“아, 그러네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민우가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정중히 노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모두가 기립했다.
“총장님!”
“그래요. 마침 류 교수님도 와 계셨구만. 아무래도 나와 같은 이유인 것 같은데.”
나타난 사람은 박자희 총장이었다. 비서실 직원을 대동하고 친히 연구실을 찾았다. 민우는 일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꼈다.
박자희 총장이 물었다.
“박 교수. 알 카흐파 의장과 이야기가 잘 된 겁니까?”
“예.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인터넷에 기사가 떴습니다. 아부다비국에 국빈으로 초청을 받았다고. 사실입니까? 루머라는 이야기가 많아서 확인 차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핸드폰이 계속 통화중이라서.”
“모두 사실입니다.”
연구실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두 조수도 민우가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만 알았지 국빈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허허. 이거 정말 이례적인 일이군. 대학 교수가 국빈 방문이라니······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 만하군요.”
박자희 총장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확실히 상식 밖의 일이었다. 보통 국빈이라고 하면 대통령이나 총리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그만큼 알 카흐파 의장이 민우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민우는 여유롭게 웃었다.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전례가 없다면 새로 만들면 되니까요. 제가 그곳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일을 할지만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박 교수의 생각이지요. 지금쯤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연구실로 몰려오지 않을까요? 꽤 소란스러워질 것 같은데 말입니다. 허허허. 아무튼 우리 대학, 아니 우리나라를 대표해 떠나는 것인 만큼 준비 철저히 하십시오. 잘 부탁합니다.”
박자희 총장은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한 뒤 연구실을 나섰다. 류재혁 교수도 국문과의 경사라며 민우와 한 번 진하게 포옹했다.
그렇게 잠시 후, 박자희 총장의 예언대로 폴라리스 연구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경한신문 문화부 취재팀이었다. 선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민우 교수님!”
“이야, 역시 빠르시네요.”
읽던 책을 덮은 민우는 빙긋 웃었다. 예상대로 박윤지 기자가 가장 빨랐다. 민우는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들었다.
“얘들아. 나 잠시 피신해 있을 테니 손님들 오면 퇴근했다고 말씀드려라. 인터뷰 하고 싶으면 레아 씨 번호로 연락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자, 기자님. 예전에 받은 게 있어서 매몰차게 돌아가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잠시 자리 좀 옮기실까요?”
“좋죠.”
아슬아슬했다. 민우는 다른 기자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