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57화 (257/500)

257화 : < 94장. 작은 천사의 꿈 (3) >

한 주가 지난 월요일 오후.

폴라리스 연구실에서 업무를 보던 민우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 재킷을 걸치고 미리 준비한 국화꽃다발을 손에 들었다.

민우는 잠시 꽃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꽃잎이 굉장히 신선해 보였다.

‘미리 준비하길 잘했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꽃잎을 정리하며 민우가 걸음을 옮기자 두 조수가 일어났다. 문을 열기 전에 민우는 두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희석이는 퇴근 전에 폴라리스 내부 이슈 파악해서 정리 보고하고, 다혜는 센트럴북스 프로젝트 진척사항 좀 정리해서 지금 메일로 보내 줘. 오늘은 안 들어올 거니까 문단속 잘하고 퇴근들 해.”

“예. 조심히 다녀오세요.”

두 조수는 딱히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누가 봐도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바로 청문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레아가 시동을 걸고 민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점심은 드셨어요?”

“간단히 먹고 왔어요. 매니저님은요?”

“저도요. 그럼 출발하죠.”

레아는 민우의 스케줄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미리 입력해 둔 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한편 민우는 꽃다발을 뒷좌석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테더링으로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 메일함을 열었다.

띠링!

마침 이다혜가 메일을 보내왔다. 첨부파일을 여니 각종 그래프와 수치 자료가 펼쳐졌다. 민우는 페이지를 하나하나 집중하며 읽었다.

“나쁘지 않네요.”

“뭐가요?”

“<인문과학총서> 작업 진척상황이요. 이대로라면 3개월 후에 마무리할 수 있겠네요. 생각보다 빨리 됐어요.”

“두 조수의 실력이 보기보단 훌륭했던 모양이에요.”

“잠깐. 그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인 거 같은데. 조수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 건가요?”

“매니저님이 오해하고 계신데 저 그렇게 깐깐한 사람 아녜요. 속도 안 좁고요. 뒤끝도 없죠. 두 사람이 매니저님을 잘 보좌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을 뿐이지 평가를 하거나 하진 않았죠.”

레아의 장황한 변명에 민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다혜와 희석을 만난 레아는 그들의 능력에 의문을 품었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나이도 어렸고 경력도 일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들을 인정했다.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도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지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최고의 팀워크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에 회식 한번 할까요? 매번 애들하고 먹었는데 이번에는 레아 씨도 같이 껴요. 애들이 소고기 사달라고 아우성이네요.”

“좋아요. 제가 양 적고 비싼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인 다 되셨구나.”

싱겁게 웃은 민우는 다시 태블릿 PC에 집중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레아는 더는 민우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캠벨 박사가 보내온 논문을 읽으며 목적지까지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달리니 저 멀리 잘 꾸며진 야외묘와 납골담의 모습이 보였다. 곳곳에 꽃과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잘 꾸며진 공원묘지였다.

“매니저님. 이제 곧 도착합니다. 기다렸다가 바로 댁으로 모실까요?”

“아뇨. 일행이 있으니 그쪽 차 타고 돌아갈게요. 바로 퇴근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미안하네요. 개인적인 일로 이렇게 운전하게 해서.”

“가끔 잊으시는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는데 저에겐 매니저님의 사생활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믿음직한 한마디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차가 멈췄고, 민우는 꽃다발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눈에 익은 중형차가 입구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민우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근사하게 꾸며진 공원을 가로질러 저 멀리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매형인 최민식이 아버지의 봉안묘 앞에 모여 있었다.

민우는 걸음을 서둘러 그들과 합류했다.

“연서는?”

“콧물 좀 흘리길래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왔다. 찬바람 쐬면 안 될 거 같아서.”

“이런, 보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평소에 자주 얼굴 비춰야지. 오죽 안 오면 조카가 네 얼굴만 보면 우니? 못난 삼촌 같으니라고.”

사실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카 연서는 민우만 보면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역시 내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부끄러워서 우는 걸 거야.”

“……설마 너 수빈이 앞에서도 이러니?”

“아니.”

“다행이네. 박씨 가문 망신 안 시켜서.”

아버지의 묘소 앞이었지만 누나의 핀잔은 여전했다. 일 년 만에 이곳을 찾았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면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어울렸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곤 했다. 아련한 그 기분이 좋았다.

“얘들아. 슬슬 제사 하자꾸나.”

“네, 장모님.”

최민식이 나서서 돗자리를 깔았다. 민우는 챙겨 온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았고, 어머니와 누나는 간소하게 제사상을 차렸다.

다 같이 절을 했다. 그리고 돗자리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기일이 겨울이라 오래 밖에 머무는 건 어려웠다.

잔정이 유달리 많았던 민아가 비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버지. 다음에 또 올게요. 편히 쉬고 계세요. 다음에는 우리 연서도 데려올게요.”

대답은 없었지만 민아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민우 가족은 나란히 공원묘지를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민우가 말했다.

“오늘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네가? 웬일로?”

“아주 좋은 일이 있거든.”

“설마 속도위반?”

“생각하는 거 하고는…… 아무튼 다 같이 드시는 걸로 알고 수빈이도 부를게요.”

“속도위반 맞네.”

누나는 언제야 철이 들까.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빈에게 여섯 시까지 집으로 오라고 톡을 보냈다.

* * *

저녁 무렵 서울로 복귀한 민우는 가족들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당긴다는 민아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집에서는 누나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심하고 시크하게 쌈을 하나 싼 민아가 최민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것을 본 수빈이 호승심이 들었는지 똑같이 쌈을 싸서 민우에게 먹였다. 민우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고기를 하나 집은 민아가 맞은편에 앉은 민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짠돌이인 네가 고기를 다 사니?”

“이번에 큰 상 하나 받게 됐어. 예전에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 탔었잖아. 그거 대상.”

“이야, 축하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남은 정말 상복이 많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에 비하기는 어려워도 큰 상은 큰 상이지.”

확실히 전공자인 최민식은 민우가 받게 되는 상의 진가를 알아주었다. 하지만 박민아는 달랐다.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대상이라…… 그럼 상금이 얼만데?”

“오천.”

“원?”

“만 원.”

쌈을 싸던 민아의 손이 순간 멈췄다. 눈빛이 포근하게 변하더니, 그녀는 고기를 두 점이나 상추에 올려 쌈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우에게 들이밀었다.

“자, 우리 이쁜 동생. 아 해봐.”

“뭔 개수작이야? 성스러운 밥상머리 앞에서.”

“실은 누나가 컴퓨터에 즐겨찾기 해 놓은 쇼핑몰 링크가 하나 있는데…….”

“안 돼. 이 돈 다른 데 쓸 거야.”

민아가 인상을 팍 쓰며 쌈을 본인의 입에 넣었다. 오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대체 어디다 쓴다는 걸까? 민우의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 돈 어디다 쓰려고 그러니?”

“좋은 곳에다요.”

그렇게 대답한 민우는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다음 날, 민우는 아침 일찍 운동을 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늘 그렇듯 서랍에서 루카치의 유고를 꺼내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뭐지?’

눈에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눈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유고의 끝에 환영처럼 떠오르는 게 보였다. 지렁이처럼 꾸물거리는 흐릿한 글자.

‘설마?’

민우는 서둘러 루카치의 만년필과 안경을 챙겼다. 그제야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뜻밖의 일이었다. 유고의 뒤페이지가 채워져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안 보였었는데…….’

상금 5천만 원의 사용처를 정하기 전까지는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의아한 마음에 민우는 분량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위업을 달성했을 때보다는 양이 훨씬 적었다.

‘한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네. 작은 깨달음이라는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미주와의 일을 추억하며 민우는 만년필을 움직였다. 푸른빛의 향연이 펼쳐지더니 미완의 유고가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곧 민우는 필사를 마쳤다.

‘그나저나 언제쯤 나머지 페이지를 다 채울 수 있는 걸까?’

글자가 보이는 순간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나머지 부분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빈 페이지보다 채워진 페이지가 훨씬 많았으니까.

무심결에 시계를 본 민우가 살짝 놀랐다.

‘이러다 늦겠다. 어서 가 봐야겠어.’

민우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대강 아침을 해결한 다음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폴라리스 연구실이 아니라 명인대학교 부속병원이었다.

본관 안으로 들어가니 이수빈이 손을 흔들었다.

“연주는?”

“병원장님 만나고 있어요. 이따 내려온대요. 어서 가요. 미주 기다리겠다.”

두 사람은 소아병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콧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니 수빈은 기분이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민우도 기꺼이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주었다.

곧 312호가 보였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의료진이 부산하게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다들 밝다.

“오빠아! 언니이!”

지난번의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미주의 육성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고 있다.

해맑은 미소 때문일까. 햇빛이 더욱 눈부셔 보였다.

곁에 있던 미주의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히 타일렀다.

“미주야. 오빠 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응?”

“싫어. 오빠랑 언니라구!”

“알았으니 어서 누우렴. 착하지?”

큰 수술 전이라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미주는 침상에 편히 누웠고 대신 민우와 수빈이 가까이 다가왔다.

수빈이 물었다.

“우리 미주 수술 잘 받을 수 있지?”

“응!”

“다 나으면 어디 갈까?”

“음~ 동물원!”

“그래. 그러자. 그러니까 꼭 나아야 해. 알았지?”

수빈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히죽 웃은 미주도 손을 뻗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빠야도 같이 가.”

“그럴까?”

민우도 선뜻 나서 미주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때 흰 가운을 걸친 의료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와 수빈은 밖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마침 연주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와 수빈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본 연주가 한마디 했다.

“어째 두 분이 보호자분들보다 더 긴장하신 것 같아요.”

“큰 수술이잖아. 잘 됐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명인대병원 최고의 선생님들로 팀을 꾸렸으니까요.”

“고맙다. 정말.”

민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미주는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기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연주가 미주의 치료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유는 좀 이상했다. 이름이 비슷하니 동생 같다며 돕겠다고 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들이다. 이런 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연주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한그룹 산하에 있는 복지재단을 움직여 간 이식 수술과 재활에 드는 모든 비용을 해결했다. 그뿐이 아니다. 병원장을 설득해 최고의 수술팀을 꾸렸다.

“그러니까 두 분은 연구실에서 편히 공부하고 계세요. 이쪽은 프로들에게 맡기시고요.”

“그래도 수술실 들어가는 건 보고 가야지.”

“알았어요. 참, 오빠. 기부금 건은 정말 진행하실 거예요?”

민우는 상금으로 받게 될 5천만 원을 대한복지재단에 전액 기부하기로 했다. 미주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물론, 그 결심은 오늘도 변하지 않았다.

“좋은 일에 써줘. 미주 말고도 도움이 필요한 애들이 많을 거야.”

“조만간 재단 직원이 연락을 드릴 거예요. 그때 기부 절차 밟도록 할게요.”

“너무 돈이 적은 게 아닌가 모르겠다. 수술 한 번 하면 없어질 돈이니.”

맞는 말이었다. 미주의 경우처럼 난이도가 높은 수술은 상당히 비싸니까. 하지만 연주의 생각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아뇨. 오빠의 돈은 액수가 크고 작음을 떠나서 최고의 종잣돈이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연주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을 보였다.

미주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두 사람은 각자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우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주의 어머니였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길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레아 씨.”

“네?”

“겨울에 갈 만한 동물원이 어디 없을까요? 펭귄 있는 곳이면 좋을 거 같은데.”

수술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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