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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56화 (256/500)

256화 : < 94장. 작은 천사의 꿈 (2) >

― 미주 지금 중환자실로 옮겼대. 명인대에서 연락 와서 어머니께 전화해 봤거든. 상태가…… 좀 안 좋은가봐. 얘기를 잘 못 하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민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중환자실로 들어갈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문득 장미꽃을 들고 환하게 웃던 미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 별일 없겠죠?

“씩씩하게 다시 일어날 거야. 중환자실은 예전에도 몇 번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어. 이번에도 건강해져서 나올 거야.”

― 오빠…….

잠시 말이 멈췄다. 민우는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려 주었다.

― 너무 마음이 아픈 거 있죠. 그 착한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나쁜 사람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민우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평생을 고찰해도 답을 얻기 어려운 문제였다. 인간의 운명이 있다면 이런 무게가 아닐까. 양 어깨가 무거웠다.

―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거 같아요.

“수빈아. 일단 진정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쉬어. 내가 이따 다시 연락할게. 응?”

― 알았어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평소라면 애정표현을 하며 전화를 끊었겠지만, 오늘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말처럼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한 것처럼 보였다.

민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이다혜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 시간 지각이었다. 민우가 일찍 와 있는 것을 보곤 죄인처럼 굴었다.

“죄송해요. 오늘 너무 일어나기 힘들어서…….”

“병원 가봐야 하는 건 아니지?”

“예. 그 정도는.”

“괜찮으니까 가서 일 봐.”

조금은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다혜가 살짝 놀랐다.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오빠. 화…… 많이 나셨어요?”

“아니. 잠깐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 나 표정 안 좋냐?”

“엄청요. 저 지금 여기서 무릎 꿇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요.”

민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보라고 손짓했다.

꾸벅 인사한 다혜가 가방을 내려놓고 희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둘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우의 신경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던 민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캠벨 교수님께 보내드릴 자료부터 다시 체크를 해야 해. 시간이 별로 없다.’

민우가 허리를 펴고 다시 책상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인쇄해 놓은 논문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의미 있는 부분은 작업 파일로 옮겼다.

‘두 시간 정도면 얼추 마무리되려나?’

볼륨이 좀 부족하지만 1차 자료로는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캠벨 박사는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된 신화에 관한 자료를 민우에게 요청했다. 민우는 자료를 취합한 뒤 나름의 방법론을 세워 자료를 정리하여 그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여기에 얼마 전 인연을 맺은 동경대의 이사카와 류타로가 뜻밖에 힘이 되어 주었다.

일본은 ‘신화의 나라’라는 별명이 있다. 전통적으로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 발달해 신의 숫자도 많고, 전래되는 신화도 그만큼 다양하다. 그쪽에서 보내주는 자료만 해도 정리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특히 이시카와가 보낸 ‘21세기 문화 콘텐츠에 나타난 일본 신화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흥미를 끌었다. 각종 만화와 게임, 소설 등에서 신화적 모티프가 빈번히 쓰이고 있음을 밝힌 논문이었다.

캠벨 박사와의 공동 연구가 아니더라도 민우는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이 자료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집중하자.’

민우는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료를 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민우의 손이 어느 순간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모니터를 쳐다본 채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이 멈춤과 동시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민우의 정신이 글자의 홍수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지금 이래도 되는 건가?’

시선이 모니터 받침대로 내려갔다.

그곳엔 종이접기로 만든 못생긴 개구리가 한 마리 놓여 있었다. 저번에 미주가 직접 접어 자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민우는 말없이 울퉁불퉁한 개구리를 집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주에게 접는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주던 그때 그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다음엔 학 접는 거 가르쳐 주기로 했었는데…….’

하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민우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자료 파일을 저장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 가서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드니 다혜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가세요? 오늘 하루 종일 자료정리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볼일이 생겨서 명인대 좀 다녀올게. 점심은 너희들끼리 먹어라.”

“옙. 조심히 다녀오세요.”

민우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난히도 추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 * *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본관 병동으로 향했다. 미주는 이제 소아병동에 없지만, 어머니라도 만나 위로의 말을 전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소아병동 312호 병실로 향하는 도중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이수빈이었다. 그녀는 복도의 한쪽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수빈아.”

“오빠?”

수빈은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많이 울진 않았지만 눈시울이 붉다. 민우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했잖아. 아까부터 안 가고 계속 여기에 있었어?”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서…… 어머니라도 뵈려고 왔는데 안 계시네. 짐은 아직 남아있는 거 같은데.”

평소라면 한 소리 했겠지만, 본인도 자료 정리를 끝내지 못하고 와서 할 말이 없었다.

민우는 병실로 시선을 돌렸다. 미주는 장난감을 좋아했다. 그만큼 침상 주변이 복잡했는데, 그래서인지 짐을 아직 다 치우지 못한 것 같았다.

민우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접어 준 종이 모형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몇몇은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민우는 손을 뻗어 떨어진 것들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때 옆에 있던 하얀 종이에 시선이 닿았다. 민우는 종이를 들었다. 그 종이엔 삐뚤삐뚤한 선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일기인가.’

주인공은 미주였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그림. 아이와 어머니는 활짝 웃고 있었다. 맨 밑에는 ‘학교에 가고 싶어요’라고 적혀 있다.

어설픈 선이 그려낸 미소였지만, 민우는 왠지 눈앞에 미주의 웃는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 곁으로 수빈이 다가왔다.

“미주가 그린 거예요?”

“그런 거 같아. 몰랐는데 글씨도 잘 쓰네.”

“학교를 별로 못 다녔는데도 공부를 잘했어요. 산수 문제도 잘 풀었고요. 이거 보니 정말 학교에 가고 싶었나 보다.”

학교가 종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만큼 미주의 무의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민우가 말했다.

“알 카흐파 의원님을 이 년, 아니 일 년만이라도 더 일찍 만났더라면…… 미주가 이런 그림을 그릴 일은 없었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가정일 뿐이잖아요.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친구들하고 뛰어 놀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이 그림을 보면 공부 쪽이 맞나 봐요. 책가방이 이렇게 가득 차 있는 걸 보면.”

수빈은 미주가 그린 책가방을 어루만졌다.

민우는 그림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함께 그림을 그리던 때가 떠올라 품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민우는 구도를 잡고 미주가 그린 그림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만년필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잠시 후 민우가 그림에서 만년필을 거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장미꽃이네요.”

“꽃을 참 좋아하더라.”

민우는 그림을 넣어 학교로 가는 길에 꽃길을 만들어 주었다. 준수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림과 일체감을 보였다.

만년필이 만들어 낸 푸른빛이 휘감겨 영롱하게 빛났다. 마치 그림 속의 인물들이 빛으로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이만 가자.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 잠깐만.”

민우는 색종이를 하나 꺼내 무언가를 접기 시작했다. 곧 완성품을 그림 옆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조만간 미주에게 가르쳐 주기로 했던 학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다. 이곳에 다시 찾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 오빠아아!

깜짝 놀란 민우가 멈칫했다.

어디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뒤쪽 방향에서. 민우가 즉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민우 씨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요. 근처 지나가는 길에 연구실 구경도 좀 할 겸 들렀습니다. 좋은 소식도 들고 왔지요.”

연락도 없이 폴라리스 연구실로 찾아온 사람은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었다. 민우는 커피를 한 잔 가득 따라 간식과 함께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이야, 향이 참 좋네요. 그런데 민우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아닙니다. 들고 오신 좋은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좀 풀릴 것도 같네요. 하하.”

반쯤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미주의 병실에 다녀온 뒤로 이틀이 지났지만, 민우는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것은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속사정까지 현기혁 팀장이 알 수는 없었기에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어 넘겼다.

“하하하! 그럼 빨리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해도 바뀌었고 하니 이제 큰산번역문학상 시즌이 찾아왔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큰산번역문학상은 큰산문화재단에서 매해 주최하는 문학상으로 번역 분야에서는 메이저급 상이었다. 재작년에 민우는 신인상을 받아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었다.

“내부에서 벌써 대상작을 정한 모양이더군요. 주예린 작가님의 <세계수>로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쪽 관계자가 귀띔을 해주더군요. 서둘러 심사 신청을 하라고요.”

“그렇군요.”

“큰산번역문학상 대상이면 정말 큰 상입니다! 상금도 엄청나고요. 이번에 문광부에서 지원을 받아서 5천만 원으로 상금이 늘었더군요. 목돈을 손에 쥐게 되신 겁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네.”

민우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현기혁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알고 있던 민우가 아니었다. 유쾌하던 모습이 조금도 없었다.

“저…… 민우 씨. 기쁘지 않으십니까?”

“아뇨. 기쁩니다. 좋은 소식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이상하네요. 평소의 민우 씨라면 활짝 웃으셨을 것 같은데. 역시 무슨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때를 잘못 맞춘 거 같네요.”

“그런 거 아닙니다.”

민우는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두고 너무 실례를 하는 것 같아 민우는 애써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라온북스의 근황을 물었고, 다음에는 이유리 주임도 같이 왔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나저나 주예린 작가님 신작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작가님께서 영 반응이 없으셔서요. 이 주임도 고생을 하는 것 같고.”

“글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에요. 계산하면서 쓰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 받아서 쓰는 타입이라서 좀 힘든 모양입니다.”

“워낙 캐릭터가 강한 분이라 차기작 계약 말씀 꺼내기도 좀 무섭습니다.”

“그건 제가 얘기 잘 해볼게요. 어차피 센트럴북스 라인을 이용해야 하니 그 녀석도 다른 쪽에선 작업 못할 겁니다. 그냥 튕겨보는 거예요.”

라온북스는 얼마 전 센트럴북스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출판계의 큰 사건이었다. 이로써 라온북스는 보다 쉽게 미국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민우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주 작가한테는 연락 자주 해 주세요. 관심 받는 거 좋아하니까요. 팀장님이나 이 주임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현기혁 팀장이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건물 밖까지 배웅을 나갔다. 다음에는 일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잠시 바람을 쐬고 연구실로 돌아오니 다혜가 자신의 책상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계속 진동이 울려서요. 급한 전화인가 본데요? 나가신 다음부터 계속 전화 오고 있어요.”

서둘러 뛰어간 민우가 핸드폰을 집었다. 액정에 수빈의 이름이 떴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근 그녀가 이런 패턴으로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설마…….’

통화 버튼 쪽으로 움직이던 엄지손가락이 멈칫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녹색 버튼을 터치했다.

곧 수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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