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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55화 (255/500)

255화 : < 94장. 작은 천사의 꿈 (1) >

팀 307호 멤버들은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건 많았지만, 날이 추우니 그냥 가까운 곳에서 먹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런데 우리 연주도 있는데 학식은 좀 아니지 않냐? 리무진 불러서 호텔 레스토랑 같은 데 가서 어깨에 힘주고 먹어야 하지 않나.”

“배려하는 척하면서 사리사욕 채우려고 하지 마라.”

“들킴?”

“바보냐.”

민우와 진섭의 대거리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연주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도 종종 학식 먹어요. 학부 때는 간단히 샌드위치나 이런 거 먹고 다녔는데, 대학원 들어와서 먹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아마…….”

그렇게 말하며 민우를 바라본다. 좋은 추억을 담고 있는 눈빛으로.

“기억 안 나요, 오빠? 강철훈 선생님 번역 프로젝트 때 처음 저랑 식사 했을 때요. 실은 그때 학식 먹은 게 처음이었어요.”

“아, 그때구나. 기억난다. 번역본 처음으로 교차 검증할 때였지?”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섭이가 너한테 남자친구 없냐고 물어봐달라고 했던 날이기도 했고.”

민우는 예린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수빈과 연주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한기, 아니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주예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진섭을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론 틱틱거려도 진섭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각별했던 그녀였다.

다행히 분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인상을 한 번 찡그린 그녀가 쿨하게 한마디 했다.

“흥. 나랑 만나기 전의 일이니 한 번 봐주도록 하지. 청문대의 누구처럼 불쌍한 모쏠이었다고 하니까. 대신 앞으로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겠어.”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마님!”

돌쇠가 다 된 진섭이었다. 빗자루를 쥐어 주면 마당을 기가 막히게 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커플이 사극을 찍으며 앞서 나갔고, 남은 셋은 조금 뒤쳐졌다. 민우는 수빈과 연주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연주가 제법 관심을 보였다. 명인대병원장이 자신의 삼촌이어서가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쁘실 텐데 언제부터 그런 일을 하셨어요?”

“얼마 안 됐어. ‘우리병원 선생님’ 프로그램은 수빈이가 먼저 했는데 우연히 그 꼬마랑 알게 돼서 나도 도와주고 있지.”

“언니도 대단하셔요.”

살짝 놀란 수빈이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오히려 두 사람에 비하면 내가 제일 초라하지. 오빠도 너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니 큰일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연주는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싱긋 웃은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왠지 나보다 언니 같네. 너도 이쪽에 관심 있는 거니?”

“최근에 많이 생겼어요. 민우 오빠가 하는 일도, 언니가 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다 같은 맥락이잖아요? 대가 없이 모두를 위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해요.”

“맞아. 대학도 전공서도 알려주지 않는 것들이 많아. 직접 부딪혀야 알 수 있더라.”

민우의 영향으로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수빈만이 아니었다.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민우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개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연주와 수빈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 성격도, 가치관도. 특히 연주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최근에 청문대 일로 바빠져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지만, 근시일내로 공익 재단을 만들어 복지사업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한그룹에서 운영하는 재단을 물려받아도 되고, 본인이 직접 기금활동을 해도 된다. 방법은 다양했다.

“그런데 오빠. 그렇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 할 거면 명인대에 정식으로 강사 등록하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수빈이 물었고, 그 저의를 파악한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 딱히 불편한 건 없으니까. 그나저나 미주 건강이 좀 안 좋아 진 거 같더라. 조금 힘들어 보였어. 미주 어머니 표정도 어두웠고.”

“그래요? 어떡하지…….”

“연락 받은 거 없어? 수업 미룬다거나.”

“아직은요.”

수빈은 손톱을 깨물며 걱정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으니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다.

결국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이럴 때면 내가 되게 무기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의사였다면 조금 덜 아프게 도와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글쎄.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게 아닐까? 의사들은 병을 고쳐주면 되고, 우리는 희망과 웃음을 주면 되는 거고. 어느 한 쪽이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는 아니지.”

“그래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듣기만 하던 연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미주의 쾌유를 빌었다.

그렇게 일행이 학생식당에 들어섰다.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는 메뉴를 선택하고 한 자리에 앉았다. 인원이 홀수라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방학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아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얌전히 숟가락질을 하던 연주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민우 오빠. 아까 두 번째 제안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뭐? 교수직 제안이 끝이 아니었어? 대체 석유 왕자님의 끝은 어디야?”

진섭이 호들갑을 떨었다. 궁금한 건 나머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차분히 남은 밥과 반찬을 싹싹 비운 다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사업 얘기인데…….”

민우는 알 카흐파 의장과 나눴던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는 공공의 지식기관을 만드는 계획에 대해서.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경청하던 멤버들은 오일 머니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역시 어마어마한 자본이 있으니 생각하는 관념 자체가 우리랑은 다르네요.”

수빈이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진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제 2의 빌 게이츠가 되고 싶은 건가? 확실히 아랍이라는 이름에 섞인 부정적인 이미지를 세탁하긴 해야지. 요즘 원격교육 시스템도 잘 되어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인프라 구축이 좀 걸리네. 뭘 보려면 컴퓨터하고 인터넷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건 별 문제 없어. 내가 살다 이런 이야기를 면전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하시더라.”

“캬! 지린다. 역시 중동 클라스는 다르다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주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턱을 괸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 제안이 우리 팀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별로 연관이 없어 보여요.”

“우리 올해부터 청문대 한국문화교육원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잖아.”

“그거랑 관련이 있나요?”

“있지. 알 카흐파 의장이 의도하는 건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을 한곳에서 열람할 수 있게 하는 거야. 필연적으로 도서관이나 학교의 형태가 될 텐데…… 우리가 한국학 파트를 맡아서 빈 곳을 채울 수 있다는 거지.”

민우의 입에서 엄청난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정적이 돌았다. 빈 곳을 채운다는 건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연주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우리가 한국문화교육원에서 하는 걸 그대로 콘텐츠로 갖다 쓸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모든 저술과 강연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통번역해서 서비스할 수 있지. 내가 의장님의 제안을 수락만 하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멋지게 꾸며줄 거야.”

“와!”

팀 307호 멤버들의 표정에 기대와 흥분이 가득했다. 처음 연주에게 청문대 교육원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섭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 선생.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아부다비로 가서 도장 찍지 않고!”

“아직 결정은 안 했어. 의장님이 폴라리스의 참여도 원하고 있어서 좀 까다롭다. 충분히 생각하고 연락 주기로 했어.”

“잘 생각해요. 우리들 챙겨주는 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그렇게 말한 수빈은 신뢰로 가득한 눈빛을 민우에게 보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알 카흐파 의장의 프로젝트는 잠시 미뤄두었다. 당장은 청문대 한국문화교육원에 대한 것이 우선이었다.

모두가 바라는 미래가 차근차근 조립되고 있었다.

* * *

주말이 지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민우는 아침 일찍 폴라리스 연구실로 출근했다. 남희석이 홀로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역시 다혜는 늦잠인가?”

“저혈압이라 요즘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보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그래도 걱정이 되긴 하나보다. 희석의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누나 혈압 높이려고 일부러 시비 걸거나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 늘 건전한 토론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침은?”

“먹었습니다. 교수님은 드셨습니까?”

“먹고 왔다.”

민우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남희석이 미리 내려놓은 커피가 있어 한 잔 가득 채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선 컴퓨터를 켜고 폴라리스 사이트에 접속했다.

올린 게시물에 댓글이 상당히 많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알 카흐파 의장의 사업에 폴라리스가 참여를 할 것인지를 묻는 설문이었다.

게시물을 클릭하고 댓글을 쭉 살펴보았다.

‘대부분 찬성이네. 조건부 찬성을 하는 사람은…… 역시 나랑 같은 고민을 했구나. 투자를 받게 되면 폴라리스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지. 내분이 생길 수도 있고.’

꽤 많은 수의 회원들이 투자가 아닌 후원의 개념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우는 하나도 남김없이 댓글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좋아. 폴라리스 참가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나만 결정을 내리면 되는 건가?’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민우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좋은 기회라고 혹해서 넘어가는 건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민우는 웹사이트를 종료하고 메일에서 논문 자료파일을 받아 더블 클릭했다. 오늘 내로 작업을 완료한 다음 캠벨 박사에게 보내야 했다.

“교수님.”

어느새 남희석이 다가와 있었다. 민우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보았다. 왠지 희석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내준 과제에 대해 생각은 좀 해봤어?”

“예. 주말 내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다리를 꼰 민우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흥미로운 눈으로 희석을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 희석이 입을 열었다.

“결론을 완벽하게 내리진 못했는데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 외에도 다른 길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곳에서도 배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 제대로 짚었네.”

민우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책장을 거닐었다. 마침 눈에 띄는 책을 하나 꺼내더니 흔들어 보였다.

“처음 학문에 입문한 학생들이 흔히들 하는 실수야. 모든 지식을 책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그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머리로 깨달은 게 아니라 스스로 체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희석에게 좀 더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관점을 조금만 바꿔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건 많아. 길을 거닐 때도, 커피를 마실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늘 새로운 길이 열리는 셈이지. 그러니까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책만 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귀를 기울여 봐. 우리가 연구할 테마는 주변에 잔뜩 널려 있으니까. 그게 인문학의 매력이기도 하고.”

“그럼 교수님께서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는 것도 일종의 학문을 하는 행위인 겁니까?”

“아직은 뭔가 얻었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뭔가를 얻게 된다면 너에게도 얘기를 해 줄게.”

솔직한 대답에 희석의 표정이 개운해졌다. 이제야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우우우웅―

그때 책상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희석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민우는 웃으며 통화 버튼을 살짝 터치했다.

“아까 병원에 봉사활동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새 못 참고 또 전화를 했네.”

전화를 건 것은 다름 아닌 수빈이었다. 민우는 편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수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순간 그는 깜짝 놀라 등을 의자에서 뗐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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