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 93장. 오일 머니 (3) >
독대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민우는 잠시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을이 한창일 때 창밖에 수놓인 단풍을 감상하던 그곳이었다.
민우는 그때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는 단풍 대신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의 눈빛이 한없이 깊어졌다.
‘어떻게 한다…….’
민우는 팔짱을 낀 채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알 카흐파 의장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의 목적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는 도서관과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것은 민우가 내세운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표어와 잘 어울리는 사업이었다. 전 세계의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
인문학도인 민우에게 있어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알 카흐파 의장이 말한 대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예전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집에서도 대학 수준의 강의를 위성이나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으니까. 책도 마찬가지고. 인적, 물적 자원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시간문제야.’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인간의 문명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 자본만 충분히 투입된다면 기술을 한계까지 끌어다 쓸 수 있다.
즉, 21세기의 교육은 테크놀로지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알 카흐파 의장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기도 했으며 사업가이기도 했다. 실현 가능한 현실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더 고민이 되었다. 그가 꿈꾸던 것은 자신이 꿈꾸던 것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사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이 프로젝트에 참여를 해도 좋은지 의문이 들었다.
막대한 자금이 오가는 프로젝트다. 자신이 혼자 참여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알 카흐파 의장은 비영리 번역단체인 ‘폴라리스’의 참여도 원하고 있었다.
‘사적인 자본이 개입되면 본래의 취지가 흐려질 수도 있어. 내가 알 카흐파 의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도 큰 문제고. 돈은 무서운 거야. 어떻게 쓰이든. 과연 그걸 내가, 그리고 폴라리스가 감당할 수 있을까?’
민우는 돈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폴라리스는 다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체였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결정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일이었다.
물론, 적절히 수용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투자가 아니라 후원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용인할 부분이 있긴 해. 흐음, 어쨌든 나 혼자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구나.’
폴라리스의 의장은 민우였지만 회원들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일단 민우는 폴라리스에 접속해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제안, 그러니까 교수 초빙 건은 몰라도 두 번째 제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했다.
‘그럼 슬슬 명인대로 가볼까? 미주가 기다리고 있겠다.’
얼마 전 명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했던 약속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 팀 307호 멤버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 전에 병원에 들러 미주와 놀아줄 계획이었다.
“어?”
돌아서려던 그때 민우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옆에 연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도 황량한 가지에 예쁘게 피어난 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담는 그녀의 두 눈은 언제나 청초했다.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놀랬잖아?”
“불러도 대답 없는 건 교수님이었다구요. 전 세 번이나 불렀는데. 그러다 포기하고 저도 바깥 구경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랬나? 쏘리.”
민우는 책에 집중할 때나 생각에 몰입할 때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가 무언가에 몰두할 때는 방해하지 않는다.
민우가 뭔가 얘기하려다 연주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의장님하고 따로 무슨 말씀 하신 거예요? 역시 교수 초빙 제의 받으셨죠?”
“응. 일단은.”
“얼마나 더 준대요?”
“여기의 열 배.”
연주가 깜짝 놀랐다. 민우의 연봉이 3천만 원 언저리니, 열 배라면 3억이다. 한국에서는 호봉이 꽤 쌓인 인문대 정교수도 받기 어려운 연봉이다.
하지만 알 카흐파 의원의 입장에서는 작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을 만큼의 보잘 것 없는 금액일 것이다.
“확실히 오일 머니가 무섭긴 하네요.”
연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미 민우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거절하셨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오빠는 돈을 보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랬으면 진즉 한국을 떴겠죠. 지금까지 오라는 데 많았잖아요. 그쵸?”
민우는 다시금 깨달았다. 연주는 똑똑하다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게 끝이 아니야. 제안이 하나 더 있었어.”
“어떤 건데요?”
“그건 이따 이야기해 줄게. 어떻게 보면 우리 팀하고도 연관이 된 일이니까. 너도 오늘 모임에 낄 거지?”
“당연히 가야죠. 신입이 첫 모임부터 빠지면 안 되잖아요.”
민우와 연주는 복도에서 헤어졌다. 민우는 바로 폴라리스 연구실로 들어왔다. 또 논쟁이 붙었는지 이다혜와 남희석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교수님.”
“다녀오셨어요? 회담은 어떠셨어요? 아랍 사람은 TV에서밖에 못 봤는데 신기했겠다.”
“나름 수확이 있었지. 그나저나 진척은 좀 있었어?”
이다혜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희석을 흘겨보더니 구시렁거렸다.
“자료 해석 방식에 좀 문제가 있어서 요 꼬맹이랑 한바탕하고 있었죠.”
“누가 꼬맹이라는 겁니까?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예비역입니다.”
“어휴,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피식 웃은 민우가 잠시 그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문제가 된 자료를 살펴보았다. 얼마 전 명인대 보존서고에서 가져와 사진을 찍은 그 잡지였다.
“그래서. 결론은 아직 안 나온 거야?”
“이대로라면 밤 샐 기세예요.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될 뿐이죠.”
“세상에 소모적인 논쟁이란 없다. 토론과 논쟁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중 하나지. 그러니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상대와 충분히 이야기를 해 두는 게 좋아. 앙금이 생기면 곤란하잖아?”
“그냥 오빠가 보고 판단해 주세요.”
자료와 두 사람의 해석 데이터를 대조해 본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답에 접근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민우는 충분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마치 아기의 걸음마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민우가 해석 데이터를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이대로 좀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오늘 밤까지 결론을 내리도록. 코멘트는 내일 해주마. 내가 오늘은 좀 바빠서.”
민우는 옷걸이에서 외투를 꺼내 걸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희석이 물었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요즘 재미 들린 일이 하나 있거든.”
“하긴, 클럽가기 좋은 날씨네요.”
다혜가 짓궂게 장난을 쳤다. 다른 연구실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서로간의 신뢰와 애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수와 조수의 관계지만, 민우는 최대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창의적인 발상이 가능하니까.
“클럽은 한 번도 안 가봐서 어떤 곳인지 모르겠는데.”
“교수님이 거짓말하면 벌 받아요.”
“진짜야.”
민우는 옷을 입으며 병원에서 미주와 만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혜는 어린 소녀가 병원생활을 한다며 안타까워했지만, 희석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바쁘신데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교수님께서는 연구도 하셔야 하는데요. 곧 캠벨 교수님께 자료 보내셔야 하지 않습니까?”
코트의 옷깃을 다듬던 민우가 물었다.
“그러니까 시간 낭비라는 거지?”
“남희석!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물리적인 시간엔 한계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
민우는 빙긋 웃었다. 언젠가 희석처럼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치열하게 학부와 대학원 시절을 보내며 얻은 결론은 좀 달랐다.
“희석아. 넌 학자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해?”
“공부와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쌓아 세상을 밝히는 것이지요.”
“모범적인 대답이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두 조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우가 가방을 들고 남희석의 앞에 섰다.
“학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니야. 뭔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자신의 것처럼 보듬어주는 일이지. 내가 추구하는 인문학이란 그런 거다.”
“자신의 것처럼 보듬어주는…….”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잘 생각해 봐. 특별 과제다.”
멍하니 민우의 말을 듣던 남희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를 시작했다. 민우는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연구실을 나섰다.
다혜는 민우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받아 적는 남희석에게 잔소리를 했다.
“너 그거 병이다. 알아? 에휴. 이러다 민우 오빠 어록집 하나 나오겠네.”
희석은 늘 이렇게 민우가 한 말을 기록했다. 다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느새 동생을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학문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두 사람 덕분에.
* * *
미주는 종이접기를 무척 좋아했다.
미주와 처음 만난 날 민우는 집으로 돌아가 창고에 처박혀 있던 종이접기 교본을 꺼냈다. 그리고 옛 기억을 되살리며 접는 방법을 하나하나 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장미를 비롯한 스무 가지 정도의 접는 방법을 익힌 상황이었다.
“자, 다 됐다.”
“와아아아!”
미주는 뛸 듯이 기뻤다. 링거 때문에 조금 불편했지만, 두 손으로 민우가 접은 것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당분간 장난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슬쩍 시계를 살펴본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빠 다음에 또 올게. 이거 가지고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았지?”
“언제 또 와아?”
“세 밤 자고 나서 올게.”
미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답게 종이 접기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작은 손을 뻗어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민우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병실에서 나서자 마침 미주의 어머니가 담당 의사를 만나고 돌아오고 있었다. 좀 멍한 듯 수척해 보였다.
“어머니?”
“아, 죄송해요 선생님. 이제 가시려고요?”
“학교에 좀 볼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안색이 좀 안 좋으신데요.”
“괜찮아요.”
미주의 어머니는 애써 웃어 보였다. 민우는 아까 미주와 놀아줄 때 느꼈던 게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미주 요즘 컨디션이 좀 안 좋나요? 아까 보니 배도 좀 부은 거 같고 얼굴도 노래진 것 같더라고요.”
“금방 나을 거예요. 선생님들이 많이 놀아주고 계시니까요. 그래도 요즘은 미주가 웃는 날이 많아졌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미주의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민우는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명인대학교 부속병원은 명인대 캠퍼스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인문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가니 수빈과 진섭, 예린, 연주가 모두 모여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역할은 분명히 나뉘어 있었다. 수빈과 진섭이 투닥거리면 예린이 살짝 끼어들고, 연주는 웃으며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민우는 커피를 하나 사들고 자리에 합류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너 교수직 거절했다는 얘기하고 있었지.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니 빈이가 타박했고.”
“그걸 그새 또 얘기했냐.”
민우가 연주에게 한마디 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만큼 오빠의 몸값이 높다는 거니까 좋은 거잖아요. 어차피 소문 다 날 일이고요.”
“하긴, 그렇긴 하다만.”
“근데 왜 거절했어? 연주도 잘 모른다고 하던데.”
진섭이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왠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팀 307호 멤버들은 귀를 더욱 기울였다.
“그게…… 부와 명예도 좋지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했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약속한 거 있잖아.”
“허, 진심 그거 때문에 굴러 들어온 돈다발을 걷어찼다는 거야?”
“그 이유 말고는 없지.”
민우는 커피를 홀짝였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들의 시선이 한결같음을 깨달았다. 포근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민우가 운을 떼자 모두가 다시 귀를 기울였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 같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