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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53화 (253/500)

253화 : < 93장. 오일 머니 (2) >

출발은 좋았다. 네 사람은 가벼운 농담과 칭찬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잡았는데, 특히 알 카흐파 의장의 유머는 대단했다. 박자희 총장이 박수를 칠 정도로 좋아했다.

「 하하하! 의장님께서 이렇게 유쾌한 분일 줄 몰랐습니다. 」

「 가끔 가짜 아랍인이라고 놀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만, 흐음. 역시 영국에서 수학했던 경험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가 없지요. 」

「 영국 어디에서 공부를 하셨습니까? 」

「 캠브리지에 있었습니다. 」

「 그래서 국제 감각에 뛰어나신 거군요. 」

「 그보단 비즈니스 때문에 외국 체류가 잦았습니다. 제가 출판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

알 카흐파 의원이 헛기침을 하자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이제야 서론이 끝나고 본론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 아무튼 이번 순방에서 여러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우리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석유나 천연가스, 뭐 이런 것들을 떠올리는 분들이 좀 있더군요. 자원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맞지만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바로 교육이죠. 」

「 저도 아랍이슬람총서를 기획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해보니 다르더군요. 많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 그것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 」

민우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려다 멈추고 연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고, 의미를 이해한 연주가 대신 말을 꺼냈다.

「 의장님. 우리 청문대는 대한그룹이라는 글로벌 기업이 모기업으로 있는 대학이니만큼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 양성과 학문의 교류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재단전입금 비율을 늘려 내부적인 역량을 확보하고, 우수한 인재를 해외로 파견하거나 국내로 초빙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기도 해요. 최근엔 동경대와 교육협약을 맺었고요. 말씀을 들어보니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 같습니다. 」

연주의 영어는 듣기 편했다. 발음이 정확하고 표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알 카흐파 의장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 좋군요. 우리와 기조가 비슷해요. 사실 출국 전에 나름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

「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일본에 들르셨다고 들었는데 그쪽에서는 성과가 있으셨나요? 」

「 자랑할 만한 성과는 없군요. 그래서 본국 기자들에게 잔소리 좀 들었습니다. 기삿거리가 없다나? 이렇게 되니 좀 조바심이 들기도 하더군요. 허허. 」

알 카흐파 의장이 턱수염을 한번 쓸어 만졌다. 잠시 틈을 비집고 민우가 끼어들었다.

「 그래도 어제 김강현 장관님과는 회담이 잘 풀린 것 같던데요. 뉴스를 봤습니다. 」

「 맞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우리는 아주 근사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지요. 김강현 장관은 마음에 드는 인사더군요. 이야기가 잘 통했습니다. 」

그러고는 민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뭔가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알 카흐파 의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내일 있을 교육부장관 회담도 기대하고 있지요. 실제로 우리나라의 예산이 30퍼센트 가까이 교육 분야에 쓰이고 있기도 합니다. 」

「 30퍼센트요? 생각보다 상당히 비중이 크네요. 」

「 우리 아랍에미리트는 외국인 비중이 상당히 높아요. 석유산업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면도 있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 진흥정책을 시행하고 있지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부(富)가 아닐까요? 」

청문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조에는 확신과 열정이 있었다. 이권을 떠나 교육 자체에 흥미가 있어 보였다.

민우가 말했다.

「 실제로 아랍에미리트는 문맹률도 낮고 학생당 교원 수도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10년 뒤 그곳의 모습이 기대가 되네요. 」

「 잘 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빨리 그렇게 되기를 원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자본과 청문대가 가진 인적 자원이라면……. 」

그렇게 교섭이 시작됐다.

우선 알 카흐파 의장은 청문대에 투자할 의사가 있음을 보였다. 자국에는 한국어문학과를, 그리고 청문대에는 아랍어문학과를 설치하고 학생과 교수를 교환하는 구체적인 안까지 나왔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연주가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 요즘 우리 대학에서 한국문화교육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쪽으로 학생을 보내주신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반대로 우리 학생도 그쪽 대학에 보내고요. 」

「 흥미롭군요. 그 이야기를 더 해보지요. 아무래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 교육원 커리큘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우선……. 」

연주는 교육원 사업 개요와 커리큘럼 등을 모두 빠짐없이 설명했다. 민우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외우고 있나 싶어 놀랐지만, 그녀의 두뇌는 누구보다도 특별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회담이 계속 진행됐다. 복수학위제도와 국제 강좌 개설 등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민우는 한 가지 의문에 도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안건들이야. 뭔가 싱거운 느낌인데. 설마 이게 끝인가?’

아랍에미리트 의장이 청문대를 지목해서 찾아올 정도면 뭔가 근사한 제안이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가 예상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굳이 그가 한국에 오지 않아도 협상을 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또한 청문대가 아니어도 상관없기도 하고 말이다.

슬슬 알 카흐파 의장이 매듭을 지었다.

「 친애하는 여러분. 오늘 함께 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일정이 빡빡하다보니. 오늘 나온 이야기는 돌아가는 대로 담당자들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 저도 실무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

박자희 총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와 연주도 배웅을 위해 일어났다. 박자희 총장이 일행을 대표하여 악수를 청했다.

「 또 뵙게 될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의장님. 」

「 오늘 여러분들의 환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청문대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

그때 알 카흐파 의원이 통역사에게 귓속말로 통역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민우를 보더니 아랍어로 한마디 했다.

「 박 교수님. 따로 좀 뵐 수 있습니까? 지금. 」

「 따로요? 」

그제야 민우는 깨달았다.

알 카흐파 의원의 본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 청문대 측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민우가 나섰다.

「 좋습니다. 제 연구실로 가시죠. 」

* * *

민우는 학부 연구실로 알 카흐파 의원을 초대했다. 괜히 폴라리스 연구실에 갔다가 두 조교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온 알 카흐파 의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 오오! 여기가 소문의 폴라리스 연구실입니까? 」

「 애석하지만 아닙니다. 여긴 제 학부 연구실입니다. 폴라리스 연구실은 따로 있어요. 」

「 말씀 그대로 애석하군요…… 그나저나 장서가 상당히 많습니다. 외서도 꽤 있는 것 같고. 모두 다 읽으신 겁니까? 」

「 여기에 있는 건 다 읽었습니다. 두어 번 읽을 때도 있어서 다 소장하는 편이에요. 전공이 문학이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 」

민우는 적당히 대꾸하며 직접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아 커피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 카흐파 의장이 물었다.

「 그런데 여긴 직원들이 없는 겁니까? 다른 곳과는 다른 풍경이군요. 」

「 하하하. 그런가요? 」

「 한국에서는 늘 다른 사람이 커피를 준비해 주더군요. 김강현 장관님을 만날 때도 그랬고 말이지요. 우리 아랍에서는 직접 손님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게 의례라 그런지 박 교수님의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낍니다. 우리 쪽에선 환대의 의미라서. 」

「 그쪽 예절은 잘 모르지만, 저는 찾아온 손님들에게 직접 음료를 대접하고 있어요. 여기 오는 분들 모두가 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말씀을 듣고 보니 국가와 문화는 달라도 사람의 마음은 하나라는 느낌이 드네요. 」

「 그거 좋은 말씀이군요. 사람의 마음은 하나라……. 」

처음엔 서지훈 교수를 막연히 따라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의미가 부여됐다. 즐겁게 커피를 준비하는 민우의 모습을 보며 알 카흐파 의장은 미소를 지었다.

곧 따뜻한 커피가 준비되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따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

「 보기보단 성격이 급하시군요. 박 교수님은. 」

「 그런 건 아닌데…… 아, 물론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 편이긴 합니다. 아까 듣기에 다음 일정이 있다고 하셔서요. 괜히 제가 붙잡고 있으면 안 되잖습니까. 」

「 그 일정이라면 괜찮습니다. 그건 박 교수와의 일정이었으니까. 」

「 거기까진 예상을 못했네요. 」

인자하게 웃는 알 카흐파 의장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 궁금했다. 자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로 보자는 건 대학 관계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는 거겠지. 들어도 상관없는 거라면 이렇게 독대를 할 이유는 없어. 역시 교수 초빙 건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얼마 전 김강현 장관도 찾아와 비슷한 제안을 했었다. 지나가듯 하긴 했지만.

「 사실 아까 다른 분들이 계셔서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조만간 우리나라에 외국어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외국어대를 설립할 계획인데…… 그곳에 박 교수를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

「 역시 초빙 이야기였군요. 」

「 보수는 지금의 열 배를 드리지요. 모든 편의를 보장합니다. 가능하면 국빈 자격으로 초청을 하고 싶군요.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지원해 드리고. 어떻습니까? 」

순식간에 연봉의 자릿수가 달라졌다.

민우는 생각했다. 분명 좋은 제안이긴 했다. 만약 돈과 명예에 좀 더 욕심이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민우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팀 307호 멤버들과 의기투합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 순수한 표정을 읽은 알 카흐파 의장이 반색했다.

「 좋은 쪽으로 결정해 주신 건지? 」

「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전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부와 명예도 좋지만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네요. 아직 젊으니까요. 」

「 흐음, 역시. 그 정도는 예상했던 대답입니다. 오기 전에 박 교수님에 대해 상세히 알아봤지요. 쉽지 않은 남자라고. 후후후. 하지만 다음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

「 또 있습니까? 」

왠지 다음에 나올 말이 진짜 그의 방문 목적이 아닐까.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고, 알 카흐파 의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알 자라 방송과 하신 인터뷰는 잘 봤습니다. 그 인터뷰가 절 이곳까지 오게 했지요. 전 아랍의 자랑스러운 문학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왕족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

그 이야기까지 들은 민우의 머릿속에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아랍 출판문화사업 쪽의 제안인가? 아무래도 그쪽밖에는 답이 안 나오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의장의 이야기는 민우의 뻔한 그림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 제가 정말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박 교수의 표현이었지요. 이건 비단 아랍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 해당되는 말인 것 같은데. 맞지요? 그 드넓은 포부에 감탄했습니다. 해서 그 일을 박 교수님이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군요. 저와 함께 사업 한번 해보지 않겠습니까? 청문대에 계시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겁니다.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니까요. 」

「 잠깐, 잠깐만요. 전개가 좀 빠릅니다. 」

민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 카흐파 의장은 자신의 생각보다 좀 더 넓은 것을 보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웃은 알 카흐파 의장이 잔을 내려놓았다.

「 꽤 놀라신 모양입니다? 」

「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눈 하나 깜짝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죠. 그런데 어떤 사업을 하시려는 겁니까? 감이 잘 안 잡히네요. 」

「 한마디로 모두를 위한 지식사업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해외의 재벌들이 공공사업에 뛰어드는 그림이야 흔하지 않습니까? 」

「 그렇긴 합니다만……. 」

「 알 와브라 동물 보호소에 대해 들어봤습니까? 막대한 부를 이용해 희귀동물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종을 번식시키는 곳이지요. 오일 머니는 그 색깔처럼 검기만 한 돈이 아닙니다. 때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도 해보려고 합니다. 출판이든 강연이든 교육이든지. 여기에 당신과 폴라리스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아마 당신에게는 제가 가지지 못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겁니다. 」

알 카흐파 의장이 다시 잔을 들었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흥미로운 눈으로 민우를 살펴보았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하는 표정으로.

한편 민우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알 카흐파는 의장이기 전에 아랍의 큰손이다. 투자 규모가 일반 기업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를 쓰는 것과 같다.

「 사업에 동참할 동지들을 몇 명 섭외해 놨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진짜 부가 무엇인지 보여드리지요. 」

알 카흐파 의장이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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