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 93장. 오일 머니 (1) >
수업은 곧 끝났다.
하지만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여자아이는 수빈을 붙들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 떼를 쓰며 더 놀아달라고 보챘다.
결국 어머니가 나섰다.
“미주야. 선생님이 계속 공부 가르쳐 주셨잖아. 이제 선생님도 집에 가셔야지. 응?”
“싫어! 싫어! 더 할 거야!”
“엄마 말 잘 들어야 아픈 것도 빨리 나아요. 선생님이 다음에 또 오실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인사하고. 자. 안녕히 가세요 해야지.”
어머니는 자상한 목소리로 타일렀지만 소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수빈이 나섰다.
“저, 어머니.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미주랑 더 놀다 갈게요.”
“괜찮으시겠어요?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있으셨는데. 선생님 바쁘실 텐데…….”
“아녜요. 오늘은 특별한 약속 없으니까 괜찮아요.”
계속된 강의에 좀 피곤했지만, 수빈은 애틋한 마음이 들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그녀였다. 다시 가방을 내려놓고 미주와 나란히 앉았다.
듣기로 미주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간 기능이 저하돼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한다.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나이인데, 사정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 병상에서 일어설지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미주 뭐 하고 싶어? 공부는 많이 했으니까 다른 거.”
“종이접기! 장미꽃 만들어주세요. 옛날에 유치원에서 쌤이 엄청 이쁜 거 만들어 줬었는데.”
“장미꽃?”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수빈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종이접기는 취미가 없다보니 색종이를 받고서도 머뭇거렸다.
“장미꽃 말고 다른 거 접으면 안 되니? 학이나 비행기 같은 거.”
“안 돼요. 장미 만들어 주세요.”
“으음, 알았어. 한번 해볼게.”
수빈은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대로 모양이 나오기는커녕 종이가 엉뚱한 모양으로 접히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있을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색종이를 낚아챘다.
“장미는 그렇게 접는 게 아니야.”
고개를 돌린 수빈이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우였던 것이다.
도대체 여기엔 어떻게 나타난 걸까? 민우는 잠시 그 의문을 뒤로한 채 미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오빠가 예쁘게 접어줄게. 잠시만 기다려 봐. 알았지?”
“응!”
민우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는 정확하게, 마치 자로 잰 듯 똑바로 종이를 접어 나갔다. 색종이가 한 송이의 아름다운 장미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미주는 마술사의 마술을 보는 것 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다 됐다.”
“우와아아! 장미다!”
민우는 장미를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미주는 신이 났는지 한동안 장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민우의 등장에 당황한 수빈도 어느새 흐뭇한 눈으로 미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딸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오랜만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민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여기 이수빈 선생님 대학원 동기입니다. 선생님이 좋은 일을 하신다기에 잠깐 도와주러 왔어요.”
“그러셨군요. 감사해요.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명인대 선생님들은 정말 좋으신 분들인 것 같아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미주가 어서 기운을 차렸으면 하네요. 늘 저렇게 해맑게 웃었으면 좋겠어요.”
민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미주와 놀아준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다. 나오기 전 민우는 미주와 다음에 또 오기로 약속을 해야 했다. 손가락까지 걸고서.
그게 마음에 걸렸던 수빈이 물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약속을 해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 어차피 명인대 근처인데 학교 온 김에 잠시 들르면 되지.”
“바쁘잖아요.”
“그 정도 여유는 있습니다.”
미주는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병실에 들러 만날 수 있었다.
어느덧 로비의 끝에 도달한 두 사람은 병원 밖으로 나갔다. 해가 져 공기가 차가웠다. 자연스레 수빈은 민우와 팔짱을 꼈다.
“근데 좀 질투난다.”
“뭐가?”
“미주가요. 오빠가 접어 준 장미 받았잖아요. 나한테는 한 번도 접어준 적 없었으면서. 칫.”
“그랬나?”
민우는 모른 척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수빈은 삐쳤는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원 들어와서 색종이를 만질 일은 없었으니까.
민우가 수빈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도로 집어넣었다.
“별걸 다 질투한다. 대신 진짜 꽃 많이 사다 줬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뭐, 됐어요. 내가 꼬맹이한테 질투를 할 줄이야…… 그런데 종이접기는 언제 그렇게 연습한 거예요? 보니까 실력이 장난이 아니던데.”
“그냥 어렸을 때 취미로 좀 했어. 방과 후 활동으로. 지금은 접는 방법 거의 다 잊어 버렸는데 장미는 마침 기억하고 있었지.”
“하긴, 여자한테 작업 걸 때 그것만큼 유용한 것도 없겠네.”
“야.”
“뜨끔했죠?”
과연 문학평론가다운 일침이었다. 의표를 찔린 민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어깨를 펴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럴 땐 화제를 바꾸는 것 만한 게 없었다.
“봉사활동은 할 만해?”
“재미있어요. 보람도 있고.”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수빈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이렇게 보람찬 일인지 몰랐어요. 마음 같아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하고 싶을 정도예요.”
“너도 답을 찾은 거 아냐?”
“답이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구름에서 벗어난 둥그런 달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저렇게 달이 동그랬던 것 같다.
학문적 깨달음에 대해 수빈과 이야기를 했던 그때 그 하늘에서.
“예전에 우리 사귀기로 했던 날이 말이야. 그때 그랬잖아.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고. 본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 거라고. 오늘 쭉 지켜보니 너도 왠지 답을 찾은 거 같아 보였어.”
“아아, 비 많이 와서 장우산 같이 쓰고 걸었던 그때요? 오빠가 잘못해서 카페에서 싹싹 빌던 날이기도 했죠. 아깝다. 그때 좀 더 확 몰아붙였어야 했는데.”
수빈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고, 민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생각해 보니 벌써 3년 전 일이다. 문득 세월이 참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곁에서 함께 걷는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고맙고,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확실히 깨달은 건 있었어요. 분명한 목표점이 세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가 가진 힘으로 사람 냄새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요.”
“역시 그랬구나.”
“물론 오빠가 하는 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싶은데.”
아까 병동 복도에서 이수빈의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다.
아무리 자신이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해도 사람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오히려 민우는 수빈의 모습을 통해 잠시 잊고 있었던 것, 이를테면 인문학도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나 바쁘게 달려온 탓에 놓치고 있었지.’
그래서 민우는 병실에서 나오기 전 미주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한 소녀와 맺은 약속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우에게는 달랐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수빈아. 나중에 유학 마치고 돌아오면 같이 열심히 해보자. 나도 네 일 많이 도와줄 테니까.”
“정말요?”
“알잖아. 오빠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그렇게 두 사람은 소소한 미래를 꿈꾸며 캠퍼스를 걸었다. 진한 가로등빛이 두 사람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 주는 듯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민우는 박자희 총장의 호출을 받고 총장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총장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 주인공은 청문재단 이사로 활동을 시작한 정연주와 출판문화원의 배만식 팀장이었다.
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총장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곧 도착할 알 카흐파 의장과의 회담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어서 오세요. 박 교수.”
“안녕하십니까.”
민우는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인사하고 남은 자리에 앉았다. 박자희 총장은 호의가 담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생각하면 얼떨떨하군요. 김강현 장관님이 직접 학교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론에 공개할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지요. 실로 놀랍군요. 박 교수의 저력이.”
“운 때가 잘 맞았을 뿐입니다. 아무튼 잘하셨습니다. 굳이 일을 크게 만들 시기는 아닙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으니까요.”
알 카흐파 의장은 어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를 방문해 김강현 장관과 회담을 했다. 그리고 누구나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양국이 문화예술 관련 교류를 확충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틀 전 김강현 장관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습니까?”
“아랍 쪽 출판문화 관련 사업에서 지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인 안을 논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조만간 실무진과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
“음, 그렇습니까. 뭔가 숟가락만 얹으려는 느낌이 듭니다만……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처세에 능한 분으로 아주 유명하니.”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저도 주의하고 있습니다.”
처세에 능하다는 것은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민우는 김강현 장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민우가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동료들뿐이었다.
“아무튼 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 합니다. 박 교수도 나름의 사업을 기획했겠지만, 우리 대학 차원에서는 또 다른 활로를 모색할 기회니까 말입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UAE대학을 시작으로 현지 대학들과 학술교류를 협의할 계획입니다. 오늘 일이 잘 풀린다면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요.”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민우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든든하군요. 정 이사님도 모쪼록 힘을 잘 실어 주시길.”
“예. 그럴게요.”
그때 비서관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알 카흐파 의장 일행이 대학본부 건물에 도착해 지금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자희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슬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합시다. 배 팀장은 이만 돌아가 보시고.”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총장님.”
이제 총장실에는 민우와 연주, 그리고 박자희 총장과 통역만 남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전통복을 걸친 알 카흐파 의장이 총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만나 인사를 하니 통역이 바빠졌다. 박자희 총장과 연주는 아랍어를 조금도 할 줄 몰랐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것에도 불편함이 있었다.
이제 민우 차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 카흐파 의장은 흥미로운 눈빛을 민우에게 보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선 민우가 악수를 청하며 한마디 했다.
「 박민우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국은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어떠셨습니까? 」
알 카흐파 의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는데,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오…… 아랍어를 할 줄 아는군요? 」
「 예.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런데 어색하지 않습니까? 아직 공부하고 있는 수준이라서 말입니다. 」
「 그 정도면 훌륭하지요! 박 교수님은 각종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들었는데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군요. 」
민우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저도 의장님의 유창한 영어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확한 표현과 발음,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더군요. 」
「 아니? 영어라니요.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
「 그건 아닙니다. 한국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의장님의 강연 영상을 찾아봤지요. 예일대였던가요. 실로 감명 깊은 강의였습니다. 의장님의 목소리가 서방세계에 분명히 전달된 느낌이더군요. 」
칭찬이 이어지자 알 카흐파 의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컸다.
때를 놓치지 않고 민우가 본론을 꺼냈다.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늘 담화는 영어로 진행해도 괜찮을지요? 여기 계신 두 분을 위해서요. 통역을 거치지 않는다면 의장님과 좀 더 긴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그거 좋은 제안입니다. 얼마든지요. 그렇게 하지요. 」
알 카흐파 의장이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계획은 성공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어딜 가나 통역이 필요했는데, 민우는 사전에 그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을 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우는 이번 회담을 통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열 계획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