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 < 92장. 비공식 회담 (3) >
“캠퍼스가 멋지군요. 조경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는 왜 청문대로 적을 옮긴 겁니까? 상아대가 모교니 오래 계실 줄 알았는데요.”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려운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무튼, 요즘은 청문대를 모교처럼 여기고 일하고 있어요.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듭니다.”
“잘됐군요.”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민우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청문대의 부총장 류시현. 연락을 받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이구, 장관님! 기별도 없이 어쩐 일로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아무튼 청문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부총장 류시현입니다.”
“기별까지는 좀 그렇고, 비공식 일정으로 조용히 박 교수를 좀 만나러 왔습니다.”
김강현 장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어조에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다행히 부총장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마중을 나온 사람을 물리칠 수 없어 김강현 장관은 류시현 부총장과 한동안 환담을 나눴다.
잠시 뒤에 물러선 민우가 청문대 비서실 직원에게 귓속말했다.
“그런데 총장님은 안 나오신 겁니까?”
“지금 외부 일정 때문에 좀 멀리 나가 계십니다. 보고 받으시고 급하게 돌아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저는 장관님 모시고 폴라리스 연구실로 가 있을 예정이니까 그렇게 전해 주세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총장님도 인사를 드리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나저나 이번에 큰 건 하나 하셨는데요?”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나고 민우와 김강현 장관은 폴라리스 연구실로 다시 움직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수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장관님.”
“오,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들은?”
“저희 폴라리스의 조교들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역량이 뛰어난 친구들이죠. 폴라리스 운영을 돕고 있고, 동시에 센트럴북스의 <인문사회총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음. 센트럴북스 프로젝트까지. 대단하군요.”
민우는 이다혜와 남희석을 직접 소개했다. 김강현 장관 입장에서는 상대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었지만, 정치인 출신답게 그들과 악수를 나눴다.
“국가의 문화산업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폴라리스는 물론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주세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때 민우가 손으로 이다혜를 가리켰다. 그녀에 대해서는 한마디 더 해야 할 게 있었다.
“장관님. 여기 이다혜 조교는 문광부에서 주관했던 번역 아카데미 수료생입니다. 크게 보면 장관님께서 키운 인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까? 번역 아카데미 사업은 우리 부처에서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인데 이런 식으로 돌아오다니 참 기분이 좋군요.”
사실 민우는 그 사업이 별로 실속이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었다.
실제로 이다혜의 경우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재능이 있고 실력도 있었는데, 단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방치되다시피 했었다.
물론 그 덕에 같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는 사업이 좀 더 제대로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민우는 그 아쉬움을 담아 김강현 장관에게 부탁했다.
“앞으로도 젊은 친구들을 위해 좋은 사업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료 후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에서도 잘 케어를 해주셨으면 하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박 교수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전에 부탁했던 제안도 다시 검토해 주시고.”
“전에요?”
“벌써 잊으신 겁니까? 이거 서운한데요. 왜 있잖습니까. 와인 바에서 한 이야기.”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젠가 열렸던 ‘번역인의 밤’이 끝난 이후에 김강현 장관을 따로 만났고, 그때 그는 국제번역센터의 주임교수직을 제안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경황이 없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국제번역센터는 어떻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조금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교육이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정책은 지도자의 입맛에 따라 금방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예산이 삭감되어 사라졌던 수많은 인문학 관련 사업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물론 김강현 장관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서운한 마음은 있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민우가 말했다.
“당장의 성과가 없더라도 천천히 지켜볼 수 있는 인내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강의를 하면서 느끼고 있어요. 학생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또 이끌어내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군요.”
“확실히 그 부분이 어려운 점이지요. 저도 한때 강단에 선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박 교수. 다음 학기에는 부디 우리 센터에도 강의를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박 교수의 이름이 이쪽으로는 꽤 묵직하지 않습니까? 선망의 대상이라고 할까요.”
이어지는 칭찬에 민우는 겸연쩍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는걸요.”
“갈 길이 먼 건 맞지만 우리 센터까지는 가깝습니다. 하하하. 여기에서 차로 30분도 안 걸리지요. 어떻습니까?”
김강현 장관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자 민우는 곤란해졌다. 이번 학기부터는 국문과 소속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강의가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고, 또 새로운 조직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바로 결정을 해야 합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죠. 충분히 고민해 보시고, 결심이 서면 나중에 곽 과장 통해서 연락을 주시지요. 어차피 우리가 하루 이틀 볼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길게 봅시다.”
“감사합니다.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장관님.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죠.”
홈그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쉽지 않은 상대였다. 민우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김강현 장관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소파에 앉았다. 이다혜가 미리 준비해 둔 다과를 내왔다.
“교수님. 그럼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래.”
미리 지시한 대로 두 조교는 민우의 학부 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김강현 장관이 독대를 원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연구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분위기는 고요했다.
쌍화차를 홀짝인 김강현 장관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책이 조금 많은 것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연구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렇게 그의 시선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민우 쪽을 향했다.
“박 교수. <인문과학총서>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더군요. 우리 쪽에도 소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고.”
“안 그래도 요즘 페이스를 올리고 있습니다. 빠르면 올해 4월이면 인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네요. 5월 출간이 목표입니다.”
“무척 기대가 됩니다. 듣기론 구굴에서도 사업에 참여했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세기의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기분은.”
“어깨가 무겁죠. 제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학계 선배와 후배들, 그리고 일반 독자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는 건 늘 짜릿한 경험이거든요.”
김강현 장관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민우의 진취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그런 인재였다.
하지만 김강현 장관은 민우가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쌓인 관록이 남다른 그였기에 신중히 접근했다.
“그래서 이번엔 아랍 쪽으로 눈을 돌린 겁니까? 내일 모레 아랍에미리트의 알 카흐파 의장을 만난다고 하던데…….”
“역시 알고 계셨군요. 출판문화사업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출판계 인사들을 몇 명 만났었는데 아랍은 미개척의 영역이라고 하더군요. 문화적 색채가 강한 만큼 쉽게 진출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어려운 점은 분명 있습니다. 선입견이란 게 쉽게 깨지는 게 아니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민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꺼낸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밝았다. 특유의 자신감이 입가에 맺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번역 사업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번역은 문화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구체적으로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신지?”
“아랍이슬람총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폴라리스에서 주관하고 라온북스, 그리고 청문대 출판문화원 쪽과 협력해서 일을 진행해 볼 계획입니다.”
“어떤 총서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민우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책상으로 돌아가 출판기획서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것을 김강현 장관에게 보여주었다. 설명을 덧붙이면서.
“단순히 책만 번역하는 작업은 아닙니다. 현지의 양서를 번역해 기초자료를 만들고, 그 자료를 재구성해 새로운 책으로 만드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편견 없이 이슬람 문학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지요.”
“흐음, 과연. 흥미롭군요.”
품에서 안경을 꺼내 출판기획서를 한참이나 살펴본 김강현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기획서였다.
“보아하니 아랍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목적만 있는 건 아닌 것 같군요. 학문적인 부분에서의 접근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 잘 보셨습니다. 사실 아랍 문화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의해 왜곡된 면이 없잖아 있는데요. 그래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책을 편찬해 해묵은 오해를 없애고, 있는 그대로의 아랍 문화를 경험하게 해보려는 게 주 목적입니다.”
“확실히 알 카흐파 의장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 만한 기획이군요. 그렇다면 동기는?”
“거창한 동기는 아닌데…… 석사 1학기 때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좀 늦었지만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된 거죠.”
“이거 대학원 시절이 절로 떠오르는군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저도 읽은 바 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책이 막 나왔을 때는 화제가 됐었지요.”
김강현 장관이 안경을 벗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 그의 시선이 기획서에서 민우의 두 눈으로 움직였다.
그가 결정을 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 프로젝트, 우리 부처에서 후원을 해도 되겠습니까?”
* * *
김강현 장관은 생각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도착한 박자희 총장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청문대를 떠났다.
대충 뒷정리를 한 민우는 청문대 주차장으로 향했다. 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팅은 잘하셨습니까?”
“진이 쫙 빠지네요. 준비가 안 된 상태다 보니까 힘들었어요. 그래도 결과는 좋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민우는 차에 올라 벨트를 맸다. 그러며 방금 전까지 김강현 장관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김강현 장관은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었다. 그가 말한 후원은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기업과 대학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직접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직 어떤 지원을 받을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분명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시일내로 곽준우 과장과 미팅을 해서 세부사항을 결정하기로 했다.
“댁으로 모시면 될까요?”
“명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가 주세요.”
시동을 걸던 레아가 깜짝 놀라 민우를 바라보았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뇨. 멀쩡해요. 거기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차가 천천히 청문대 캠퍼스를 벗어났다. 퇴근 시간을 피했기 때문에 명인대학교 부속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민우는 본관 앞에서 내렸다.
“전 여기서 볼일 보고 들어갈 거니까 레아 씨는 먼저 퇴근하세요. 참, 그리고 곧 문체부에서 연락이 올 건데 미팅 스케줄 잡아 주시고요.”
“예. 매니저님.”
문을 닫은 민우는 바로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아병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동에 들어서니 특유의 병원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민우는 너스 스테이션에 들렀다.
“저기, 간호사님. 혹시 오늘 ‘우리병원 선생님’ 몇 호에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312호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간호사가 알려준 병실로 걸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안으로 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링거를 달고 있는 여자아이와 수빈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간이 책상에 교과서와 노트를 올려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쌤! 이건 어떻게 풀어요? 숫자가 너무 많아요.”
“잘 봐. 이건 말이지…….”
수빈은 명인대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하나인 ‘우리병원 선생님’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다치거나 병들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하버드 유학이 큰 영향을 주었는지 수빈은 지식 나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잠시 귀국한 것임에도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수빈이가 나보다 더 큰일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인간이 인간다운 삶. 인문학의 본질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민우는 복도에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