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 < 92장. 비공식 회담 (2) >
2019년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됐지만 민우의 일상은 여전히 분주했다. 논문 집필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짬짬이 수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나마 계절학기 강의가 배정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오늘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문과학총서>에 들어갈 자료 대조를 위해 버스를 타고 명인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 이번 정류장은 대학본부, 대학본부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자료를 살펴보던 민우가 흠칫 놀라며 뒤늦게 벨을 눌렀다. 다행히 정류장을 지나치진 않았다. 곧 버스가 멈추고 민우가 길가에 내려섰다.
오늘은 유독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에 몸을 웅크린 민우는 중앙도서관을 향해 총총 뛰어갔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민우는 손을 비비곤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들어가기 위해선 학생증이 필요했다.
삐빅―
민우는 학생증을 태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1층에 위치한 대출실로 향했다. 근로학생 두 명과 사서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로학생에겐 볼일이 없었다. 민우는 바로 사서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이틀 전에 보존서고 열람 신청한 학생인데요. 자료 찾으러 왔습니다.”
“어어? 혹시 국문과 박민우 선생님?”
“네. 맞습니다.”
“어머머. TV 잘 보고 있어요! 예전부터 ‘독서의 밤’ 애청자였는데 선생님 출연하시고 나서부터 더 재미가 있더라고요. 깊이도 있어지고. 그나저나 실물이 더 훤칠하시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자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확실히 공중파가 무섭긴 무서웠다.
민우가 출연하고 있는 교양프로그램 ‘독서의 밤’의 시청률이 상승하는 추세고,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나갈수록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매사에 조심하게 된다. 혹시 무심결에 실수를 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민우는 방문 목적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했다. 평소라면 맞장구라도 쳐줬겠지만 오늘은 여유가 없었다.
“저, 죄송한데 선생님. 열람 신청한 도서를 좀…… 제가 오늘 스케줄이 많아서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사서가 민우의 이름을 입력하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몇 번의 조작이 끝나자 확인용 모니터에 민우가 신청한 책 제목이 출력됐다.
“어디보자…… 여기 이 잡지 맞지요?”
“예. 맞습니다.”
“열람 이력이 한 번도 없는 잡지네요. 신기하네. 박민우 선생님이 첫 번째 열람자인데요?”
민우가 찾으려던 것은 1917년에 발간된 문학 관련 잡지였다. 국내 대학 중 세 곳에서만 소장중이라 가장 가까운 명인대로 왔다.
그리 대단한 잡지는 아니라 아무도 챙겨 보지 않은 모양이다.
사서가 장갑을 끼며 열쇠 꾸러미를 챙겼다.
“장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길면 20분 정도. 잠시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래요? 아니면 이따가 오셔도 되고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민우는 대출실 안에 마련된 책상에 앉았다. 사서가 나가기 전 근로학생에게 무어라 지시를 하고 나갔는데, 곧 학부생으로 보이는 근로학생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 다가왔다.
“선배님. 이거 좀 드세요.”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따뜻한 커피였다.
이런 추운 날에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에 있을까?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버스에서 읽다 만 자료를 검토했다.
민우의 눈이 총명히 빛났다.
‘<인문과학총서> 작업도 이제 슬슬 마무리 단계구나. 어서 출간했으면 좋겠는데. 학계 반응도 어떨지 궁금하고. 어마어마하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민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학을 비롯한 수많은 기관에서 필독도서로 지정하고, 다양한 강의와 연구에서 참고문헌으로 쓰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야 할 때였다. 민우는 다시 자료에 집중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사서가 돌아왔다. 꽤 사투를 벌였는지 옷에 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유리 테이블 위에 잡지를 내려놓았다.
민우는 잠시 자료의 상태를 살폈다. 몇 번 들춰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생각보다 보존 상태가 안 좋네요. 잘못하면 페이지가 떨어지겠는데요? 복사는 어렵겠네…….”
사서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복사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 민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대신 사진 촬영해도 괜찮을까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민우는 필요한 페이지를 조심스레 펼쳐 사진을 찍었다. 고문서는 페이지가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한데, 다행히 민우가 필요한 부분은 깨끗했다.
사진을 모두 찍고 결과물을 확인한 민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사진 잘 나왔어요?”
“예. 이정도면 만족스럽네요. 선생님 덕분에 자료 잘 찾고 갑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정리하면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한 민우는 열람실을 나왔다. 그리고 사진으로 남긴 자료를 폴라리스의 두 조수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간단히 지시를 내렸다.
일 하나를 끝낸 민우는 쉴 틈 없이 바로 인문관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연구실 앞에 선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명패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행히 이름이 바뀌거나 없어지진 않았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민우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지훈 교수는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여유 있는 모습은 꽤 오랜만이었다.
“어,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중앙도서관에 볼일 있다가 선생님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다행히 방은 안 빼셨네요.”
“하하하. 방 빼길 바라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민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지훈 교수가 커피를 한 잔 가득 따라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민우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서지훈 교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냐.”
“정말 괜찮으신가 해서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러네?”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지도교수님 일인데. 소문도 흉흉하고 다들 신경 곤두 서 있어요. 섭섭이도 예린이도 걱정이 많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싱겁게 웃은 서지훈 교수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 집으려던 그가 손을 멈추고는 다시 담배를 집어넣었다.
민우가 물었다.
“끊으시게요?”
“이걸 끊는 건 이론상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줄여 봐야지.”
서지훈 교수는 담배 대신 옆에 놓인 껌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아. 겉으로 보기엔 홧김에 저지른 것 같이 보여도 철저히 계산하고 친 사고야. 그러니 박사학위 없는 꼬꼬마들은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
“일이…… 잘 풀린 건가요?”
“너희들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니냐?”
씨익 웃은 서지훈 교수가 다리를 꼬았다.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민우는 긍정했다. 그가 생각도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었다. 영리함을 넘는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적당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걸 좀 이용했지.”
“어떻게요?”
“원래 명인대 국제어학원은 영문과 주도로 설립된 기관이야. 그런데 최근 아시아권 유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어교육의 수요가 늘었지. 그러다보니 비중이 국문과로 쏠리게 된 거고.”
“아.”
민우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지훈 교수와 젊은 교수들이 왜 국문과 전체 회의가 아니라 인문대 전체 회의에서 나섰는지를.
“혹시 일부러 영문과 교수님들을 자극한 건가요?”
“그래. 국제어학원 임용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겼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감 선생이 자기 세력만 믿고 방심을 한 거지. 조금 머리를 썼다면 한두 과목 드랍하는 것으로 끝냈을 텐데……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지금 국제어학원은 난리야. 정작 불을 지른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고.”
“하지만 결국 그쪽이 정리되면 우리 과 내에서 파벌 싸움이 생기는 거 아녜요?”
서지훈 교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즉답은 피했다. 거기까지는 민우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신 한마디를 진지하게 꺼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지만…… 문제제기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생각한다. 권리를 행사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너도 이런 일이 있다면 침묵하지 마. 행동하는 것과 학문의 길을 분리시켜서는 안 돼.”
민우는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속으로 한 번 곱씹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진지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뭐, 네 성격이라면 두 팔 걷고 싸우겠지만 말이다. 상아대에서 있었던 일처럼. 참, 거기 국제번역학과는 어떻대냐? 요즘 통 소식을 못 들었네.”
“초상집 분위기랍니다. 원서가 거의 안 들어왔나 보던데요?”
민우가 청문대로 옮긴 영향은 컸다. 거기에 꼼수까지 쓰다가 적발되어 정부지원금까지 끊겼으니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상아대에 있었을 때부터 유희윤 교수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크게 독박 쓰겠어. 이런 걸 요즘 애들 말로 사이다라고 하나?”
“그런 건 요즘 애들한테 물어보셔야죠.”
“쯧, 너도 늙었냐.”
두 사제가 말없이 웃었다. 은사의 밝은 표정을 보니 민우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튼 별일 없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저 그럼 한시름 놔도 되는 거죠?”
“열시름 정도는 놔도 돼.”
“알겠습니다. 휴, 오늘 목표를 이제야 달성했네요. 선생님 멀쩡하신 거 확인했으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벌써 가게? 좀 더 놀다 가라. 마누라도 출장 가서 혼자 있기 심심한데.”
“바빠서요. 나중에 놀아드릴게요.”
“건방진 것.”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민우는 흠칫 놀라며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폴라리스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자료 검토에 끙끙 앓고 있던 두 조수가 흠칫 놀랐다. 들어온 것은 바로 민우였다.
남희석은 늘 그렇듯 90도로 인사했고, 이다혜도 일어나 그를 맞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되게 급하게 들어오시네.”
“내가 보낸 자료들은 확인했어?”
“지금 희석이랑 머리 맞대고 있는 중인데 좀 어렵네요. 오빠가 좀 봐주셔야 할 거 같아요.”
민우는 잠시 멈춰서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최근에 청소를 하지 않아서인지 먼지가 쌓여 있는 곳이 많았다. 정리가 필요했다.
“오빠. 듣고 있어요?”
“다혜야. 우리 연구실 청소 마지막으로 언제 했더라?”
“예? 글쎄요. 잘 기억 안 나는데. 청소는 원래 반년에 한 번씩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남희석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 민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두 팔을 걷었다. 그리고 엄숙히 선언했다.
“지금부터 대청소를 실시한다.”
“대, 대청소요? 갑자기 무슨…… 사모님 오실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요.”
“장관님 오신대.”
“예에?”
“문체부 김강현 장관님 말야. 너도 예전에 번역인의 밤에서 한 번 뵙지 않았어? 그분이 여기에 오신다고. 폴라리스 연구실에.”
“어째서요?”
“낸들 아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만나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강현 장관이 직접 전화를 할 줄은 몰랐다. 곽준우 과장을 통해 자리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당황한 민우는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청했지만 김강현 장관은 단호했다. 앞으로 중책을 맡을 폴라리스 연구실을 두 눈으로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공부보다 청소가 중요할 때도 있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은 민우는 진공청소기 전원을 연결했다. 위잉,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멍하니 있던 두 조수가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청소에 매달렸다. 정리가 모두 끝나자 민우는 다혜에게 카드를 건네며 다과를 사오라고 시켰다.
‘가만, 윗선에도 연락을 해 두는 게 좋겠지?’
민우는 즉시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김강현 장관의 방문을 알렸다. 장관급 인사가 방문하는 거라 의전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문대가 바쁘게 돌아갈 무렵 고급 세단이 캠퍼스 안으로 진입했다. 차는 유유히 게이트를 거쳐 인문대 건물 앞에서 멈췄다.
김강현 장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민우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장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박 교수. 이렇게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는데. 고맙군요.”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날씨가 춥습니다.”
도대체 왜 왔을까. 그런 의문을 뒤로 한 채 민우는 김강현 장관을 폴라리스 연구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