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49화 (249/500)

249화 : < 92장. 비공식 회담 (1) [10권 끝] >

다행스럽게도 연주는 노래를 하지 않아도 됐다.

진섭이 끈질기게 노래를 시키려고 하던 그때 허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기타를 들고 분위기를 잡았다.

“자, 친애하는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한 곡 할게요. 방송에서도 잘 안 하는 건데 진짜 큰 맘 먹은 겁니다.”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며 허윤이 기타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조명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음률. 거기에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여성 멤버들의 눈빛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307호 멤버들도 허윤의 미니 콘서트를 즐겼다. 노래에 푹 빠져 있는 주예린의 옆모습을 보던 한진섭이 혀를 찼다. 민우도 왠지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이수빈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나저나 잘한다잉? 윤이 쟤도 보컬 트레이닝 받은 건가.”

“그렇다고 들었어. 옛날에 음반도 하나 냈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잊혀졌지만.”

“쳇. 비주얼도 되고 노래도 되니 여자가 줄을 서겠구만.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라고.”

민우는 기꺼이 진섭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에게 하나 물어야 할 게 있었다.

“그런데 너 괜찮냐?”

“괜찮을 리가 있냐? 여친이 다른 남자 보면서 눈에 하트를 뿅뿅 날리고 있는데. 너도 방심하지 마 인마. 빈이 지금 반쯤 넘어갔어.”

싱거운 농담에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거 말고. 아까 방에서 연주가 했던 제안 말이야. 너 그거 듣고 좀 고민하는 것 같아 보여서.”

“아, 그거······.”

진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본인이 좀 이해가 안 된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냥 좀 나답지 않게 걱정이 들더라고. 한국문화교육원. 좋지.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또 튕겨 나오는 거 아닌지, 괜히 정치놀음에 얽혀서 피 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

“역시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건가.”

“그렇게 전문용어까지 붙일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고. 뭐, 그냥 좀······ 찝찝한? 그런 거지.”

진섭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며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때를 생각하니 절로 술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민우는 섣불리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애매한 동정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

민우가 말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나도 있고, 빈이도, 주님도, 연주도 있으니까. 든든하지 않아?”

“알아. 그러니까 한다고 했지. 나 혼자였으면 거절했을 거다. 무슨 일 생기면 너한테 덤터기 씌우면 되니까. 그 정도는 친구니까 해줄 거지?”

“얼마든지, 자유이용권 끊어줄 테니 마음대로 이용하십쇼.”

씨익 웃은 진섭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의 고맙다는 표시였다.

그렇게 간이 무대에 모인 사람들은 허윤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멜로디에 흠뻑 취했다. 민우는 살짝 뒤에 떨어져 노래를 감상했다.

한진섭이 물러가니, 이번엔 연주가 가까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진섭 오빠랑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그냥 사는 얘기. 근데 너 오늘 완전 산타 할머니처럼 보였어. 알아?”

“에이. 할머니는 또 뭐예요. 저 여기에서 제일 어린데······.”

“할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수 없는 논리네요.”

연주가 귀엽게 웃었다. 민우가 손에 쥔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일었다.

“따지고 보면 네가 우리 팀원 모두한테 선물을 준 거잖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에다 잘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큰 선물을 줬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거 알아. 대학 수뇌부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하지만 오빠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쉽게 일이 풀렸어요. 다들 커리어가 좋으셔서요. 특히 오빠는 더더욱.”

“내가 뭐 커리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이제 대학에서 일 년 가르쳤는데.”

“그 소리 언니 오빠들한테 하면 엄청 화내시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런가?”

연주의 시선이 민우에게 닿았다. 민우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 눈빛에 가득 담긴 존경심을 이겨낼 만한 저항력이 없었다.

민우가 살짝 말을 돌렸다.

“그래도 커리어만으로는 안 되는 세상이잖아. 제대로 중심을 잡고 일을 추진할 만한 사람이 대학가엔 별로 없는 거 같아. 총장은 재단 눈치 보기 바쁘고, 재단은 정부 눈치 보기 바쁘고. 그래서 너한테 거는 기대가 커.”

확실히 연주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가 가진 사회적 지위를 잘 이용한다면 대학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주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근데요. 오빠······.”

“응?”

“제가 너무 거창한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뜻밖의 말에 민우가 연주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긁으며 멍한 눈빛으로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 주변에서 그러거든요. 진리 탐구니 뭐니 다 꿈같은 소리 아니냐. 결국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게 아니냐······ 하고요. 돈 안 되는 인문학 붙들고 있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들 하고.”

“상처받았겠네.”

“그 정도는 각오하고 하는 일이에요.”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애써 이겨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

“꿈같은 이야기라.”

그렇게 중얼거린 민우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연주라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을 것이다. 본가가 대한그룹이니까. 자본주의의 최첨단에서 살아온 그녀다. 고고한 학문의 세계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교육원 만든다고 했을 때 했던 말은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닐 거 아냐? 돈벌이가 아니라 지식의 요람으로 만든다고 했던 거.”

“그건 진심이에요. 하지만 문득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더라고요. 제가 가는 길이 맞는 건지. 나중에 실패하지는 않을지······.”

“그게 정상이야. 나도 모르고 우리 지도교수님도 모를걸? 가봐야 아는 거지.”

“역시 그런 걸까요?”

“그래. 그런데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더라.”

분위기가 바뀌자 연주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민우는 몸을 살짝 돌려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꿈을 꾸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는 거.”

많이 듣던 이상론이었지만, 왠지 민우의 목소리로 들으니 특별했다. 그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학문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너희들과 떠들고 있지 못했겠지. 내 이름 세 글자를 세상에 알릴 수도 없었을 테고. 하하하. 너무 뻔한 얘기인가?”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덕분에 민우는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많아. 어렵고 힘든 세상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잖아. 나도 있고, 섭이도 있고, 수빈이도 있고 예린이도 있고. 여기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힘들면 이야기 해. 우리가 언제든 들어줄 테니까.”

“고마워요. 오빠.”

연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촉촉해졌다. 이런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던 건 저주가 아니라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대 쪽에서 갑작스럽게 박수 소리가 들린 것은.

“이야, 역시 형님이십니다! 명언이네요.”

“누가 교수님 아니랄까봐.”

“선배는 학부 때부터 작업에 일가견이······ 읍읍!”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노래가 한 곡 끝나고, 모두가 민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허윤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정말 공감해요. 꿈을 꾸지 않는 자에게 미래란 없지요! 저도 멋진 배우가 되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진짜루요.”

“별로 마음에 와 닿진 않는데? 넌 태어날 때부터 잘생겼으니까 반칙이잖아.”

민우의 농담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반칙인 거 들켰나요? 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한곡 더 할 게요.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제가 이번에 부를 곡은······.”

허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곧 익숙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카니발의 ‘거위의 꿈’이었다. 마침 연주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노래였다.

* * *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 김강현 장관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이 바뀌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랍에미리트 연방평의회 알 카흐파 의장이 오늘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하고, 경제 및 문화 전반의 교류 활성화를 위해 왔다고 밝혔는데요. 이에 정부에서는······.

카메라가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알 카흐파 의장의 모습을 비췄다. 흰색 칸두라를 걸치고 구트라를 눌러 쓴 전통적인 아랍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온 건가.”

집무실에 앉아 뉴스를 보던 김강현 장관이 리모콘을 눌렀다. TV가 꺼지고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안경을 벗고 두 눈을 꾹꾹 눌렀다.

최근 업무가 많다보니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쌓였다. 노안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곧 손을 뗀 그가 수화기를 들어 비서실에 연락했다.

― 예, 장관님.

“지금 곽준우 과장 올라오라고 해 주게.”

―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강현 장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2018년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업무가 많은 시점에 해외 VIP의 방문은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곧 노크가 들리고 곽준우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침 보고할 게 있었는지 파일을 들고 있었다. 책상으로 다가온 그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장관님.”

“그래. 다른 건 아니고, 알 카흐파 의장 스케줄은 확보해 놓았나?”

“세세한 건 보안 문제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우리 부처와 관계된 스케줄은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그 자료입니다.”

곽준우 과장은 파일을 열어 책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깔끔하게 표로 정리가 되어 있어 한눈에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경을 낀 김강현 장관이 스케줄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우리 쪽 회견은 내일이군. 콘텐츠 진흥원 방문도 있고 출판문화원 방문도 잡혔군. 국회의장 면담. 그리고······ 음?”

김강현 장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의 일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청문대에 방문을? 명인대가 아니고?”

“맞습니다. 저도 그 소식을 듣고 좀 의아했는데, 알아보니 그럴 만했습니다.”

“혹시 대한그룹 쪽과 접점이 있는 건가?”

“아닙니다. 듣기로는 청문대 교수님 한 분 때문에 직접 그곳까지 찾아간다고 하더군요. 청문대 교양학부에 장관님도 잘 아는 분 있잖습니까?”

“아아! 그렇지.”

김강현 장관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청문대에 있다는 게 생각난 것이다. 그는 최근에 받은 민우와 관련된 보고를 떠올려 보았다. 그중엔 아랍 쪽 관련 사업 리포트도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 교수가 얼마 전 인터뷰를 했다지?”

“그렇습니다. 대학과 출판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아랍 쪽에 컨택을 한 모양입니다. 그 소식을 접한 현지 방송사에서 박민우 교수의 인터뷰를 따 갔다더군요.”

“그런 식으로 일이 풀릴 줄은 몰랐군. 이러다 박 교수에게 문화훈장 하나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몰라. 흐음······ 현지 반응은 어떤가?”

“무척 긍정적입니다. 가뜩이나 출판문화시장에 중동의 큰손들이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알 카흐파 의장이 직접 움직인다는 건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이라 분석됩니다.”

김강현 장관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그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너무 늦게 대응하는 느낌이 드는데. 안 그런가?”

“그게······ 죄송합니다. 확실히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썼더라면 우리의 성과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면목 없습니다.”

곽준우 과장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평소 민우와 자주 연락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일을 주선했다면 큰 공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일이었다.

김강현 장관은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에너지를 쏟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지나간 일을 붙잡고 있는 것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때였다.

고민을 끝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한 발자국 먼저 움직여야겠어.”

“박민우 교수를 부를까요?”

“부른다고? 허허허. 누구를?”

김강현 장관이 껄껄 웃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옷걸이로 가 외투를 집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굽힐 때와 펼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라네. 박 교수는 알 카흐파 의장도 직접 찾아오게 만든 인물이야. 나라고 예외가 있겠나?”

“송구합니다. 바로 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꾸벅 인사한 곽준우 과장이 집무실을 나섰다. 갑작스러운 스케줄에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김강현 장관은 여유롭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박 교수? 이거 오랜만입니다. 김강현입니다. 하하하. 잘 지내셨지요? 예예. 저야 늘 그렇지요. 에······ 혹시 말입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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