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 91장. 팀 307호 (4) >
알 자라 방송에서 준비한 인터뷰가 모두 끝났다.
그럼에도 알 카흐파는 한동안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직무와 전혀 관계없는 광고가 흘러나오는 데도 말이다.
그만큼 그는 신선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민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랍의 문학을 제3세계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아랍 그 자체의 문학으로 세계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명의 아랍인으로서 가슴이 울리는 한마디였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학을 저렇게 객관적으로 봐 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어딘가 있긴 하겠지만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가만히 넋 놓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 정부의 각급 인사들도 너나없이 전 세계로 뛰어다니는 중이다.
아랍의 문학과 출판시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부다비 국제 도서전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매해 열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편견은 여전히 남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석유나 수출하는 나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세미나와 포럼을 열고 산업 수준과 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역으로 국제포럼과 전시회에도 참여해 실상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편견이라는 벽은 여전히 높아. 노력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지. 그런 상황에서 저런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였다.
알 카흐파는 긴 수염을 쓸어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시아 순방 스케줄이었다.
그는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만큼이나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이번 순방으로 뭔가 큰 변화를 일으켜야 해. 우리 연방이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알 카흐파는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새해를 앞두고 연방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지난 1년간 준비한 야심찬 계획. 경제협력은 물론 각국 실무진들과 접촉해 문화교류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가 전면에서 노력한 것도 있지만, 아시아 각국에 나가 있는 대사들이 수완을 발휘해 주고 있어 일정을 짜기가 쉬웠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노크가 들렸다.
「 들어와라. 」
비서관 하메드가 품에 정리한 자료를 품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알 카흐파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 벌써 끝났나? 생각보다 빠른데. 」
「 예. 말씀하신 분이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 조사하기가 수월했습니다. 」
「 유명한 사람이라고? 」
고개를 갸웃한 알 카흐파 의원이 안경을 쓰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자였군. 그런데 나이가 서른밖에 안 됐나? 굉장히 젊은데. 」
「 한국의 공영방송인 KBC에도 출연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적혀있는 대로 강의력과 연구력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특히 6개 이상의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
「 호오. 」
서류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알 카흐파가 안경을 벗었다.
「 그런데 알 자라에서 어떻게 이 친구와 인터뷰를 하게 된 건지 알고 있나? 」
하메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유능한 비서관이었다. 알 카흐파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 한국의 출판사인 라온북스와 청문대학교에서 우리 쪽 대사관에 출판사업 관련 공문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인터뷰 요청을 한 것 같습니다. 」
「 소식이 빠르구만. 」
「 그뿐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와도 연결점이 있었습니다. ‘폴라리스’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
「 폴라리스? 」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하메드가 기계처럼 즉시 대답했다.
「 박민우 교수가 설립한 비영리 국제번역기구입니다. ‘모두에게 평등한 지식’을 모토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번역자와 학자들이 가입되어 있으며 아랍 국적을 지닌 사람들도 몇 명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 으음. 」
알 카흐파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턱을 괸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하메드. 아무래도 한국에는 하루 정도 더 체류해야 할 것 같구나. 그렇게 일정을 조정해야겠다. 」
「 박민우 교수를 만나시려는 겁니까? 」
「 간 김에 보고 오면 좋겠지. 시간은 금이니까 말이다. 」
「 알겠습니다. 그럼 미리 접촉을 해보겠습니다. 」
「 너무 소란스럽게 하진 말고. 」
알 카흐파는 나가보라고 손짓했고, 고개를 숙인 하메드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금 생각에 잠기던 알 카흐파의 머리에 민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울렸다.
― 저는 앞으로 공동의 지식과 교양을 위해 어떤 책이든 소개할 겁니다. 설령 그것이 사하라 사막의 한가운데라고 할지라도요.
공동의 지식과 교양이라는 키워드가 뇌리에 박혔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전 세계였다.
만약 아랍이라는 문명권에 한정했다면 그는 한 번 의심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진심이었어. 사하라 사막이 아니라 남극 한가운데라도 갈 것 같은 자신만만한 눈빛이었지.’
굳게 결심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알 카흐파가 손을 뻗었다. 옥 장식이 들어간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크리스마스 오전, 청문대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찬 파티가 열렸다.
참가를 희망하는 모든 학부의 전임 및 비전임교수들은 물론 교직원과 재단 인사들까지 모이는 큰 잔치였다. 각종 포상과 인사이동 등을 공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고, 연말에 해외 출장을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 파티에 참가한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300여명 정도가 리셉션홀에 모였다.
민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가슴에 꽃을 달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2018년도 2학기 우수강사상을 받게 되어 수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축하드려요. 교수님.”
연주가 다가왔다. 오늘은 편한 복장이 아니라 격식을 한껏 차린 여성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께에도 꽃이 달려 있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우수강의상 타셔서 칭찬 많이 들었어요. 감사해요. 양한선 교수님도 인사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지금 잠깐 미국에 나가 있으셔서요.”
“고맙다. 그런데 진짜 축하를 받아야 할 건 너 아냐? 정말 깜짝 놀랐어. 언젠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재단이사가 될 줄이야.”
연주는 부끄럽게 웃었다.
그녀는 얼마 전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 정식으로 이사로 선출되었다. 새로 임명된 이사가 총 네 명이었는데, 퇴임 후 선출이 아니라 충원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대학을 키우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나이에 비하면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연주의 능력과 사회적인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정 이사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난치지 마셔요.”
“장난이 아니지. 이젠 진짜 직장 상사가 됐네.”
연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볍게 환담을 나눴다.
곧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며 본식이 시작되었다. 청문대학교 총장 박자희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준비된 식순이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거기엔 신임 이사들의 환영식도 있었다.
연주는 연단에 서서 소감을 말했다.
“앞으로 청문대는 더욱 넓은 세계로 도약해야 합니다.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곳,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지성인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잠재력이 충분한 학생들을 발굴하고, 능력 있는 교수진을 확보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할 것을 여러분들께 약속드립니다.”
젊은 이사의 당찬 각오에 박수가 쏟아졌다. 민우도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연단 옆쪽으로 나온 연주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만 숙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나머지 이사들은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이 대학을, 재단을 키우리라 결심한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의 진심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다음으로 우수강의상 시상식이 이어지겠습니다. 해당 교수님들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사회자가 수상자들을 차례대로 호명했다. 민우를 비롯한 열 명의 교수들이 연단에 올랐다.
박자희 총장이 직접 상패를 건네며 악수와 인사말을 나눴다. 학교 전체에서 10위를 달성한 민우는 맨 마지막에 그에게 상패와 꽃다발을 받을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박민우 교수.”
박자희 교수가 악수를 청하며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활약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는 알 자라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따갔다지요?”
“예. 덕분에 조금 바빠질 것 같습니다만, 늘 그랬듯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박 교수만 믿고 있겠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굳게 악수했고 시상식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민우는 상패와 꽃다발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옛날엔 상을 받는 게 되게 두근대고 설렜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네.’
마치 상을 받는 게 버릇이 된 느낌이었다.
영국 현지에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까지 경험한 민우였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시상식은 이제 소소한 이벤트 정도로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식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슬슬 점심 먹고 호텔에 가면 되겠다.’
마침 국문과의 이창호 교수가 다가오더니 축하를 건넸다. 민우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뒤에 마련된 뷔페로 향했다.
그때 국문과 학과장인 류재혁 교수가 설렁설렁 다가왔다.
“이봐, 박 선생. 축하해.”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덕에 이렇게 좋은 상도 받고 기쁘네요.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지도편달은 무슨. 내가 박 선생한테 지도를 받아야 할 상황인데? 평점 4.91이었다며. 사람이 그렇게 완벽하면 못써.”
유쾌한 농담에 민우와 이창호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은 나란히 그릇을 들고 음식을 집었다. 그리고 한 자리에 모여 같이 식사했다.
류재혁 교수가 민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 좀 그런 이야기인데······ 박 선생. 총장실에 서류 올렸네.”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민우가 먹는 것을 멈췄다.
“어떤 서류 말씀입니까?”
“자네 국문과로 오고 싶어 했잖아. 그 소원 들어주려고. 승인되면 다음 학기부터는 국문과로 적을 옮길 수 있을 거야.”
“아.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자네의 실력이 이렇게 만든 거지.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과 교수들이 모두 자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더군.”
그 말을 하며 류재혁 교수가 이창호 교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민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창호 교수가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이리라.
진심과 실력을 보여주며 하나둘 마음을 열겠다는 민우의 계획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도 많은 활약 부탁해. 이 기세를 몰아서 노벨문학상도 한번 타보고. 응?”
그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 민우는 하마터면 먹고 있는 걸 뱉을 뻔했다.
“쿨럭. 잠깐만요. 선생님. 그건 너무 큰 거 아닙니까?”
“젊을수록 꿈은 크게 가져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불가능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자네는 국제사회와 연결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희망이 있지.”
“다른 분도 아니고 류 선생님 말씀이니 특별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유쾌한 웃음소리가 이어지며 즐거운 식사가 계속되었다.
* * *
그날 오후, 민우는 레아의 차를 타고 골든팰리스 호텔로 향했다. 오늘은 공휴일이라 휴무였지만 민우는 레아의 선약이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따로 불러냈다.
레아로서는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평소 민우는 자신을 업무 파트너로 생각해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배려를 해 주었다. 그런데 쉬는 날에 대뜸 불러내더니 운전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사적인 이유로.
“도착했습니다. 매니저님.”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레아는 순순히 차를 주차장에 정차시켰다. 안전띠를 푼 민우가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레아 씨도 내리세요.”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민우가 싱긋 웃으며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크리스마스 파티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