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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46화 (246/500)

246화 : < 91장. 팀 307호 (3) >

흐르는 세월의 흔적만큼 새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민우는 수빈과 번화가에서 단둘이 데이트를 즐겼다. 마침 눈발이 흩날리는 탓에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길을 걸었다.

“아, 배부르다. 디저트로 케이크도 먹고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뭐 할까요?”

“어디 들어가서 좀 쉬었다 갈까?”

“이 짐승!”

민우의 농담에 수빈이 인상을 쓰며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오전에는 영화관에서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봤고,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코스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케이크를 시켜 놓고 나란히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휴식을 취했다.

기본적인 데이트 코스를 모두 들른 터라 민우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 떨어지려면 좀 남았는데······ 노래방? 포켓볼? 우리 집? 볼링? 아니면 서점?”

“중간에 뭔가 이상한 게 끼어 있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죠?”

“하하하. 당연히 기분 탓이지.”

“다 재미있긴 하겠는데 별로 안 땡겨요. 뭐 색다른 거 없어요?”

“재미있는데 안 땡기는 건 또 뭐야. 답은 정해져 있으니 생각해 놓은 걸 맞추라는 건가······.”

수빈이 싱긋 웃으며 긍정했다. 민우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더 고민을 해야 했다. 공부를 하는 건 쉬운데 이런 쪽으로는 아직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 연구실에 가볼래?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안 와봤잖아.”

“맞다. 오빠 오늘 연구실에서 누구 만난다고 그랬죠? 겸사겸사 한번 가볼까?”

“아마 지금쯤 조수들 일하고 있을 거야. 간 김에 소개해 줄게. 다들 싹싹하니 일 잘하는 친구들이거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을 해요? 좀 쉬라고 하지. 알고 보니 울 오빠 악덕업주였네.”

“당연히 쉬라고 했지. 그런데 같이 놀 애인도 없으니 공부할 겸 연구실에서 일한다고 하더라고.”

“짠하네요. 그럼 간식이라도 사들고 갈까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처에 커다란 베이커리가 있었다.

민우와 수빈은 안으로 들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각종 빵, 음료를 잔뜩 샀다. 그리고 바로 택시에 올라 청문대로 향했다.

역시나 연구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민우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뭔가를 설치하고 있던 이다혜와 남희석이 화들짝 놀랐다.

“앗, 데이트 안 하고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여친분한테 까였어요?”

“안녕하세요.”

그때 뒤에서 수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다혜는 흠칫 놀라며 입을 막았다. 만난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수빈의 사진 정도는 봤다.

이다혜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같이 오신 줄도 모르고. 첨 뵙겠습니다. 이다혜예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박민우 교수님 밑에서 번역 배우고 있는 남희석입니다.”

“예?”

사모님 소리에 수빈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민우와 결혼을 하게 되면 사모님 소리를 듣는 게 맞긴 하다. 그래도 왠지 나이가 든 느낌이었다. 이제 스물여섯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수빈은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돌릴 겸 손에 쥔 봉투와 케이크 박스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오면서 간식거리 좀 사왔어요.”

“와!”

봉지를 열어본 이다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녀였다. 마침 배가 고팠는지 남희석도 사양하지 않고 몇 개 챙겼다.

그 와중에 민우는 두 제자의 뒤쪽을 기웃거렸다. 못 보던 물건들이 보였다. 녹색 나뭇가지와 각종 장식물, 그리고 줄로 이어진 전구가 보였다.

“크리스마스트리 설치하고 있었어?”

“예에. 희석이가 창고에 있는 거 가져왔어요. 좀 늦긴 했지만 연말 분위기도 내볼까 해서······ 어, 야! 남희석! 케이크 자르지 마!”

하지만 한 박자 늦었다. 남희석은 날렵하게 케이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잠시 멍해있던 이다혜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초도 꽂고 사진도 찍어야지 이 멍충아!”

“그냥 드시죠. 솔로끼리 무슨 촛불입니까. 어차피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아져요.”

“니가 그러니 여친이 없는 거다!”

“동생한테 그렇게 윽박지르니까 누님도 남친이 없는 겁니다.”

“으이이익!”

이다혜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민우와 수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도 한 손 거들어 볼까?”

민우는 외투를 벗고 크리스마스트리 조립을 시작했다. 나무를 하나로 맞추고 가지를 벌린 다음 그 위에 장식물을 얹기만 하면 되었다.

수빈도 조립에 참여했고, 두 조수도 뒤늦게 싸움을 멈추고 민우를 거들었다.

“교수님! 그건 맨 위에 달아야죠. 크기가 안 맞잖아요.”

이다혜가 지적하자 민우는 나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다시 맞춰보았다. 하지만 크기가 잘 맞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다혜가 대신 나섰다.

그녀는 능숙하게 토막 난 나무를 하나로 이었다.

“요렇게요. 강의는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하시면서 이 간단한 것도 못해요?”

“강의랑 이게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있죠. 모름지기 교수님이란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라구요.”

“것 참 이상한 법이네.”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수빈은 미소를 지었다. 권위의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마치 친구처럼, 동료처럼 제자들을 대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청문대에서 마음으로 제자를 키워내는 민우가 대단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강한 자극이 되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민우처럼 신뢰와 존경을 받는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는 게 우선이겠지만.

그러는 사이 얼추 나무의 조립과 장식이 끝났다. 민우가 손을 털었다.

“장식은 너무 많이 달면 이상하니까 이쯤 하자. 희석아. 전구 감아 봐.”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희석이 전구가 달린 줄을 트리에 나선형으로 감았다. 코드를 연결하고 전원을 켜니 전구가 반짝거리며 예쁜 빛을 발했다.

이다혜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진짜 예뻐요. 불 한번 꺼볼까요?”

“그래.”

탁―

이다혜가 연구실의 불을 모두 껐다. 환한 빛에 휩싸인 트리가 고요한 운치를 자아냈다. 테이블 옆에 놓고 와인 한 잔 걸치면 딱일 것 같았다.

이다혜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저희들이 사라지면 되는 거죠?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안 가도 돼. 나 일 있어서 온 거야.”

“응? 무슨 일이요?”

“이따 손님 오기로 했어.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지. 그러니 싸우지 말고 얌전히 앉아서 간식이나 먹어라.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민우와 수빈은 옆 블록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센스 있게 이다혜는 빵과 케이크, 그리고 우유를 따로 준비해 주었다.

“근데 대체 누구에요?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센트럴북스 쪽 사람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손님들이고, 아랍에미리트에서 온 분들이지.”

“거기에도 아는 사람 있었어요?”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무리 해외에 인맥이 많다고 해도 아랍 쪽과 연결될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부터 차차 알아가 볼 생각이야. 기회가 왔으니 잘 잡아 봐야지.”

“대체 누군지 궁금하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약속한 손님이 폴라리스 연구실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편한 옷차림의 사내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내 모두 코가 크고 수염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뒤에 선 사내는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있었는데, 카메라 몸체에 ‘Aljara’라고 씌어 있었다.

선두에 선 장신의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  당신이 박민우 교수입니까?  」

「  잘 찾아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

민우가 팔을 벌려 두 외국인을 맞았다.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했다.

* * *

낡은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온기를 뱉어내며,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섞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로 그 곁에서 연주는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리포트를 읽고 있었다. 일전에 있었던 처장급 회의에서 나온 안건을 정리한 자료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연주는 신경 쓰지 않고 담요를 배까지 끌어올린 다음 계속 리포트에 집중했다. 오늘 내로 세부사항까지 정리를 한 다음, 내일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팀 307호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연주가 리포트에서 눈을 떼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유진태 실장이었다. 그의 품에는 커다란 북극곰 인형이 들려 있었다. 연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일찍 왔네? 그건 또 뭐야?”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아가씨께서 혼자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 친구를 데려 왔지요.”

능청맞게 대꾸하며 유진태 실장은 연주의 옆에 있는 의자에 북극곰 인형을 앉혔다.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연주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저녁쯤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가끔은 바람도 쐬고 해야죠. 좀 봐주십쇼. 그나저나 여긴 춥네요. 서울은 버틸 만했는데.”

유진태 실장은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었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연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에 놓아둔 쇼핑백을 가져왔다.

“받아.”

“이게 뭡니까?”

“크리스마스 선물.”

“열어봐도 되죠?”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그녀에게 선물을 받지만, 유진태 실장은 늘 처음 선물을 받는 사람처럼 기쁜 마음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검은색 가죽 장갑이었다. 유명 메이커의 제품이었다.

“쓰던 거 좀 낡아 보여서 샀어.”

“역시 아가씨밖에 없군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바꾸려고 했었는데.”

유진태 실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장갑을 착용해 보았다. 마치 자로 잰 듯 딱 맞았다. 부드러운 안감이 들어가 있어 따뜻하기도 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저야말로요.”

연주는 다시 리포트를 집어 읽기 시작했다. 유진태 실장은 여전히 벽난로 근처에서 몸을 녹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계획은 잘 되가십니까?”

“생각보다는 잘 풀리고 있어. 언니 오빠들만 동의해 준다면 초빙에 문제는 없을 거 같아.”

“교육원이 설립되는 쪽으로 정해진 모양이군요.”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진태 실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무척 기뻐하십니다. 아가씨께서 대학을 위해 좋은 제안을 하셨다고. 기대가 크신 것 같더군요.”

“말씀드렸어?”

“아닙니다. 벌써 재단 통해서 보고가 올라간 모양입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진태 실장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연주가 펜을 쥐고 본격적으로 집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창가로 걸어간 유진태 실장은 커튼을 살짝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흐려 있었다. 곧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진태 실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가씨. 밖에 눈이 오네요.”

“그래?”

연주도 일어나 유진태 실장에 옆에 섰다. 그의 말대로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문득 연주의 머릿속에 민우의 모습이 그려졌다.

늘 꿈꾸던 일이었다. 눈 그친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사이좋게 걷는 그 모습이.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떨쳤다. 마음을 굳게 먹고 유진태 실장의 옆에 서서 새하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장작 타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 * *

샹들리에와 고급 카펫이 깔린 호화로운 집무실. 그곳에서 목재로 된 의자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턱을 괴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의 몸엔 값비싼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TV에는 어떤 낯선 동양인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  아랍을 흔히 ‘제3세계’로 지칭하곤 합니다. 이는 문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문학 분야에서는 탈식민주의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차별과 편견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랍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

「  그렇다면 교수께서 계획하시는 궁극적인 의도는 대체 무엇입니까?  」

「  다양한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아랍 문학을 접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는 그 이후의 문제죠. 우선 저는 한국 문학을 아랍에 소개하고, 그 역으로 아랍의 문학을 한국에 소개할 계획입니다. 물론 이건 일차적인 계획이고, 제가 설립한 폴라리스를 통해 전 세계로 번역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

그 대목에서 중년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  전 세계로?  」

가만 생각에 잠기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앉아 졸고 있던 페르시안 고양이가 냐옹 하며 뛰어 내렸다.

「  하메드! 하메드 밖에 있나!  」

중년이 외치자 문이 열리고 젊은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곧 그가 예를 취했다.

「  부르셨습니까? 의원님.  」

「  지금 저기 TV에 나오고 있는 청년을 알고 있나? 알 자라 방송과 인터뷰를 하는군. 청문대의 박민우 교수라고 하는데.  」

「  들은 바 없습니다.  」

「  한번 알아 봐. 어떤 친구인지.  」

예를 취한 하메드가 밖으로 나갔다.

의자에 도로 앉은 중년 사내는 다시금 TV로 시선을 돌렸다. 얌전히 주인을 올려다보던 페르시안 고양이가 다시금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아랍에미리트 연방평의회 의원 중 하나인 알 카흐파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한동안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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