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 < 91장. 팀 307호 (2) >
통번역 강좌에 박민우, 문학이론 및 일반강의에는 이수빈, 한국어교육은 한진섭, 문예창작은 주예린.
‘이 네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어떨까?’
굉장한 시너지가 발휘될 것이다. 연주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이들은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왔다. 인문학 공모전은 물론, 다양한 학술연구 분야에 참가해 두각을 나타냈다.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커다란 판을 짤 수 있다는 사실에 연주는 마음이 설렜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박자희 총장이 은근히 끼어들었다.
“제법 구체적이군요.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은데······ 원래 계획이 있었습니까?”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들이었어요. 청문대엔 한국어학당이 없으니까요. 강사진도 어느 정도 구상해 놓은 상태예요. 결정만 된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누구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강사진에 들어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선 통번역 분야는 교양학부의 박민우 교수님을 생각하고 있어요. 이분의 커리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호오.”
교무처장이자 외삼촌인 양한선 교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는 마치 손녀를 바라보는 것 같은 포근한 눈으로 연주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연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머지 팀 307호 멤버들의 이름과 경력을 열거했다.
수빈은 메이저 일간지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된 사람이었다. 진섭은 강의와 연구 모든 면에서 인정을 받은 인재였고, 예린은 이미 문단에 등단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가였다.
“부설기관 치고 라인업이 괜찮군요.”
“동의합니다. 학부나 대학원 강사로 바로 초빙해도 될 정도예요.”
“이수빈 씨나 주예린 작가는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주관이 있는 분들이죠.”
교수들이 제각각 품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박자희 총장도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기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흥미롭군요. 박민우 교수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세 사람과 어떻게 연이 닿는 모양입니다. 특히 이수빈 씨는 저도 TV에서도 본 적이 있지요. 주예린 씨도 이름은 들어봤고.”
“대학원 시절에 친분을 쌓았어요. 그래서 그분들의 목표와 이상향을 알고 있어요.”
네 사람의 공통 키워드는 바로 ‘인문학’이었다.
연구실에 모여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이제는 대학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보다 큰일을 할 때였다.
“다들 교육 사업에 뜻이 있는 분들이에요. 이수빈 선생님은 지금 하버드에서 연구원으로 있어 당장 강의는 어렵겠지만······ 나머지 선생님들은 바로 참여가 가능할 거예요.”
“제 생각엔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박민우 교수와 이수빈 씨를 전면에 내세우면 홍보 효과도 클 거고요.”
“저도 찬성합니다.”
“동의합니다.”
박자희 총장은 물론 처장급 교수들이 모두 한마디씩 보태며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회의실에 모인 그 누구도 네 사람의 커리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멤버들 모두 명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에 큰 메리트를 느꼈다.
박자희 총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김한진 교수가 발의한 한국문화교육원은 부속기관의 개념이지만 잘만 하면 궤도에 금방 올릴 수 있겠군요. 흐음······ 나중에 학부과정과 연계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하면 좋을 거 같고.”
“가능할 거예요.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들이거든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박자희 총장은 연주의 계획이 사업성을 충분히 갖췄다고 판단했다.
“우리 젊은 실장님의 자신감이 정말 대단하군요. 아무튼 한번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실장님께 한국어문학 분야 교수 인선권을 드리지요. 김한진 교수와 잘 만들어 보십시오. 세부기획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연주는 가슴을 펴고 활짝 웃었다.
* * *
명인대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에 오랜만에 민우와 진섭, 예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학 중이라 학생들은 거의 없어 한산했다.
예린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물었다.
“오빠들은 늘 마시던 걸로 마시죠?”
“오케이.”
주문과 계산은 주예린의 몫이었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인답시고 열심히 카드를 긁고 있는 그녀였다. 민우와 진섭은 적당한 곳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어휴,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네. 조용하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진섭이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서지훈 교수와 설예라 교수가 인문대 전체 교수회의에서 발의한 것에 대한 소문이 인문대에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 소문을 전해 듣고 자리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박사들이 모여 있는 310호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민우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서지훈 선생님은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 걸까? 뭔가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얼마 전 서지훈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를 떠올렸다. 농담 삼아 대학에서 잘리면 남해에서 바다낚시나 하자는 말이 실감이 났다.
‘정말 이러다 쫓겨나시는 건 아니겠지? 명인대가 사립대라 재단이 개입하면 압박이 장난이 아닐 텐데.’
박사논문 도장을 못 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서지훈 교수가 없는 명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는 물론 학계에서도 큰일을 할 사람이었다.
민우는 작년에 IAHS에 참여한 뒤로 국내 학계를 보다 젊게 바꾸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서지훈 교수가 도중에 학교를 떠나게 되면 계획이 늦춰지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커진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계속 그런 질문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좋은 방법이 있긴 했다. 자신을 원하는 영문과와 불문과에 강연을 나가며 적절히 상황을 이용한다면 좋은 시나리오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는 서지훈 교수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래서 문제가 계속 원점으로 돌아왔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답답했고, 그것은 맞은편에 앉은 진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 선에서 일이 끝나서 다행이지 민우 너까지 휘말렸어봐. 끔찍했을걸? 뭐 너야 청문대에 자리를 잡았으니 애초에 별 영향이 없겠지만.”
“영향의 문제가 아니잖아. 콘래드 식으로 표현하면 암흑의 핵심을 건드린 꼴인데.”
“이야! 기가 막힌 비유 인정합니다. 암흑의 핵심. 딱 그거네.”
그때 주예린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합석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진섭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젊은 선생님들이 들고 일어섰으니 파벌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나도 잘 모르겠어. 아까 서지훈 선생님 연구실 다녀왔는데 생각보단 잠잠하더라고. 본인도 별로 내색 안 하시는 거 같고. 아무튼 너무 자책하지 마. 네가 아니었어도 언젠간 벌어질 일이었다고 하셨으니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실제로 진섭은 영문과 교수 몇 명에게 연락을 받았다. 국제어학원 채용 과정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고, 진섭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민우가 진섭에게 물었다.
“섭이 너 말야. 만약 국제어학원에 복귀할 수 있으면 돌아올 거냐?”
“아니.”
“역시 그렇지?”
진섭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눈치 보여서 제대로 강의가 되겠어? 그냥 다른 데서 강의하는 게 낫지.”
“하긴.”
“아무튼 수빈이가 오기를 기다려 봐야겠구만. 이 녀석, 이야기가 길어지네. 벌써 한 시간 째인데.”
그렇게 세 사람은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지금 수빈은 설예라 교수를 만나고 있었다. 귀국한 이후로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30여분이 지나자 이수빈이 나타났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진섭이 물었다.
“어땠어?”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얘기만 들었어요. 회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구요.”
“역시 그런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민우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우리들 일에 집중하자. 선생님들 말씀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가 나선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나도 동의함.”
“근데 섭이 너 강의 자리는 알아보고 있냐?”
“몇 군데 이력서 넣어 놨지. 급하게 구하진 않을 거야. 논문 쓰면서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다.”
“잘 생각했네.”
곧 점심시간이 되어 네 사람은 학생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 함께 모여 학식을 먹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이수빈의 미국 생활로 넘어갔다. 수빈은 하버드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인상 깊었던 건 미국 대학이 지역사회와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어요.”
“예를 들면?”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많이 하더라고요. 시민들이 들을 수 있는 교양강좌도 많고, 학교나 지역구에서 무료로 강연을 열기도 하고요.”
“과연 오픈코스웨어의 본고장답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도 비슷한 걸 해보면 어떨까 하고.”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수빈에게 쏠렸다.
“왜 그 이야기 있잖아요? 마이클 패러데이가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을 위해 과학 강연을 열어서 인기가 좋았잖아요. 200년 가까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고요. 그런 식으로 우리도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팀 307호 이름으로.”
“음. 좋은데?”
민우에 이어 진섭이 대꾸했다.
“패러데이 하니까 <양초의 과학> 그거 생각난다.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는데. 흠, 확실히 우리 모두 특기가 하나씩은 있으니 강연은 어렵지 않겠네. 그런데 테마가 좀 편중되지 않으려나? 다들 문과니까.”
진섭의 지적은 정확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민우가 답을 꺼냈다.
“인문학에 치우친 게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과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해야 해. 특히 학생들한테는 신경을 써야겠지. 예전에 내 강의를 보신 IAHS 회장님께 들었던 비평이 생각나네.”
“뭐라고 하셨어요?”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것엔 성공했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지는 못했다고 하셨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대.”
“어렵네요.”
다른 건 몰라도 분야를 넓히는 건 필수였다. 문과 이과를 구분하지 않고 전반적인 지식을 다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민우가 말했다.
“이과 쪽에서도 한 명 있으면 좋겠는데······ 아, 적당한 사람 하나 생각났다. 지음사의 장철호 주임.”
“크리스마스 파티 때 왔던 그 훈남 오빠요?”
수빈의 ‘훈남 오빠’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렸지만 민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주예린이 그와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맞아. 그때 분명 그러셨는데? 지음사에 입사하게 된 동기 중 하나가 자연현상이나 공학적 지식을 글로 쉽게 풀어내는 거라고. 자, 선배. 어서 연락을!”
“서두르지 마. 일단 뭔가 구체적으로 안을 세운 다음 얘기를 해야지. 지금은 그냥 해보자 이런 수준이잖아?”
“시작이 반인데 뭐 어때. 멤버 모아놓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웬일로 진섭이 옳은 소리를 했다. 민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손이 가진 않았다.
“어차피 크리스마스 때 보기로 했으니까 그때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자.”
“그렇지 참. 파티하기로 했었죠?”
“캬, 역시 연주는 대단해. 골든팰리스 회장하고도 친분이 있고. 금수저는 다르다니까. 앞으로 좀 더 친하게 지내야겠어.”
“바람피우겠다는 거지?”
민우의 일침에 화들짝 놀란 진섭이 숟가락을 놓쳤다. 예린의 따가운 시선이 진섭에게 꽂혔다.
아무튼, 연주는 도쿄에서 했던 약속을 지켰다. 그 구하기 힘들다는 골든팰리스의 크리스마스 시즌 파티룸 이용권을 얻어온 것이다. 그래서 예전 그 멤버 그대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로 했다.
맞은편의 두 커플이 투닥거리는 사이 수빈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민우에게 속삭였다.
“벌써 이틀 후네. 기대된다. 그치?”
“그럼.”
그때 민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었다. 민우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오랜만이네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 잘 먹었습니다. 민우 씨는요?
“전 지금 먹고 있어요.”
―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아녜요. 거의 다 먹었습니다. 말씀하세요.”
― 네. 그게 말입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아랍 쪽 출판사하고 이야기가 되고 있었는데. 좀 뜻밖의 일이 벌어져서요.
그로부터 한참이나 현기혁 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 하고 대답을 하며 전화를 받는 민우의 눈이 순간 커졌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내일 바로 진행하죠. 장소는 폴라리스 연구실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서지훈 교수의 일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빈이 아니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얼굴에 다 써 있으니 발뺌할 생각하지 말구.”
“크리스마스 선물?”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 민우는 남은 밥을 싹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