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44화 (244/500)

244화 : < 91장. 팀 307호 (1) >

넓은 홀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오늘은 2018년도 2학기를 마무리하며 교육 및 사업평가를 위해 인문대 전체 교수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학과별로 원형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국문과와 영문과는 예외였다. 전임교수의 수가 스무 명이 넘어, 테이블이 각각 두 개씩 마련되었다.

명인대 부총장과 인문대 학장, 그리고 인문대 교수들만 모인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명인대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둘러 본 서지훈 교수는 씨익 웃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서지훈 선생.”

목적이 너무 뻔한 탓에 서지훈 교수는 무시할까 했지만, 잠시 멈춰 돌아섰다. 감주형 교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용히 자리나 지키다 가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부탁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고. 다 옛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

“방금 옛정이라고 하셨습니까?”

한번 간사한 미소를 지을 법도 한데, 감주형 교수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납득했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일 테니까.

“생각할 옛정이 있었다니 놀라운데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어쨌든 너도 국문과 교수가 아니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란 말이다. 고루한 이상론은 해악이야.”

멀어진 감주형 교수는 국문과 교수들, 정확히는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교수들이 모여 있는 우측 테이블에 합류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설예라 교수가 나섰다.

“선배가 뭘 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네요.”

“제대로 봤다. 감 형 정도라면 벌써 손을 다 써놨을 거야.”

한진섭을 내보낸 것은 꽤 큰 무리수였다. 밀실 회의에 참석한 교수들이 괜히 놀란 것이 아니었다.

한진섭은 2학기 연속 우수강사상을 받았고, 전국규모의 학회에서 차차 이름을 알려가는 상황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진섭이 내쳐질만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대학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한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래서 설예라 교수의 표정에 힘이 풀렸다.

“선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겠죠?”

“자리나 잡자. 곧 시작하겠어.”

두 사람이 움직였다. 목적지는 다른 쪽 테이블이었다. 감주형 교수 근처에 있는 몇몇 교수들이 알은척을 했지만, 시선은 곱지가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의자를 빼 앉으며 한탄했다.

“이거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군요. 법정에 서면 이런 기분일까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분위기가 살벌해서 말입니다. 잡아먹을 듯 쳐다보잖아요.”

옆에는 민영환 교수가 있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서지훈 교수와 감주형 교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커 목소리를 낮출 것도 없었다. 민영환 교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다가 감 선생하고 다투기라도 했나? 둘 다 표정이 심상찮던데.”

“예. 한진섭 선생 소식은 들으셨죠?”

“그렇지.”

민영환 교수는 한진섭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보통은 석사 때 지도교수가 박사 때까지 이어지곤 한다. 민우가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서지훈 교수가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 묵혀 뒀던 걸 터트릴 생각입니다.”

“뭐라고? 잠깐, 잠깐만. 이 사람아. 그걸 이 자리에서? 제정신인가? 그런 일은 국문과 회의에서나······.”

“이 자리만큼 좋은 무대도 없잖습니까. 들어주는 사람도 많고, 마침 저기에 윗분들도 계시고. 영문과 선생들도 계시니 국제어학원 일에 관심을 가져 주시겠죠.”

“서지훈!”

그러나 서지훈 교수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민영환 교수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여기엔 인문대 학장은 물론 부총장까지 자리해 있다. 회의 내용이 기록되는 것을 떠나 소란이 일어난다면 총장 귀에도 들어갈 게 뻔했다.

하지만 대학은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다분히 폐쇄적이다. 대외적으로 그런 이슈가 터진다고 해도, 알 듯 모를 듯 덮을 확률이 높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우리 대학의 정책과 이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풀어간다면 모든 게 통용되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민영환 교수는 우려 섞인 시선을 서지훈에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에 발언권을 신청해 놓았습니다. 사업 보고가 끝난 다음 자유 브리핑 시간에 연단에 설 겁니다. 그리고 우리 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불합리한 일들을 공개할 생각입니다.”

“무모한 짓이야.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고 움직여야지. 진섭이 녀석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깟 일로 판을 바꿀 수는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빙긋 웃었다.

“한진섭 선생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닙니다. 다 우리 과, 나아가서는 제 모교를, 더 크게는 우리 학계를 위한 일이지요.”

“그걸 몰라서 이러나? 이 어수선한 시기에 꼭 총대를 메야겠냐는 말이지.”

“오히려 그러니 더 그래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약자의 편이 아니니까.”

서지훈 교수는 아까 이곳으로 오는 도중 설예라 교수가 한 질문, 다시 말해 백마 탄 초인에 대한 답을 그에게 대신했다.

“조금 어이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 정도 각오 없이 제가 명인대로 자리를 옮겼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송현우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어지지요.”

그때 개회를 알리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연단으로 향했다. 다리를 꼰 서지훈 교수는 여유 있게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형식적인 보고와 논의가 끝나고 자유 브리핑 시간이 되었다.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린 인문대 학장 강성현이 서지훈 교수를 호명했다.

“국문과 서지훈 교수. 앞으로 나오시지요.”

넥타이를 고쳐 맨 서지훈이 연단에 올랐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그는 청중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무관심한 표정이었지만, 국문과는 달랐다.

감주형 교수는 팔짱을 낀 채 태연했지만 근처에 있는 교수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을 보며 서지훈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가까이 댔다.

“얼마 전, 국제어학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국제어학원에서 보직을 받은 국문과 교수들의 표정이 일거에 변했다. 유일하게 표정이 변하지 않은 것은 감주형 교수뿐이었다.

“2학기 연속 우수강사상을 받은 젊은 강사가 모종의 이유로 계약불가 통보를 받았습니다. 구두로 시수 연장까지 보장받은 상황에서 날아온 갑작스러운 통보였죠. 대체 왜일까요?”

서지훈 교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때 변호림 부총장이 인상을 쓰며 옆자리에 앉은 강성현 학장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우수강사상을 받은 강사가 계약을 못하다니?”

“글쎄요. 보고 들어온 게 없어서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 강사가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요즘 학내 성추행이다 뭐다 말들이 많잖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벌써 이슈가 됐겠지. SNS에서든 뉴스에서든. 으음, 서지훈 교수가 저렇게 함부로 나설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군.”

변호림 부총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성현 학장은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감주형 교수를 쏘아보았다.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냐며.

꾸짖을 말을 생각하는 사이 서지훈 교수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물론 전임교수님들의 눈엔 그리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강사 처우야 대한민국 어디든 매한가지니까요. 하물며 학부 강사도 아닌 일개 어학원 강사의 일은 신경 쓸 문제도 아닐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영문과 교수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국제어학원을 놓고 국문과와 경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제대로 건수를 잡은 상황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대학을 병들게 합니다. 나아가서는 학계를 좀먹게 하지요. 임용과정은 물론 강사에 대한 평가가 투명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 이건 현재의 평가일 뿐이죠. 제가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은 부속기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실상 학부나 대학원에서도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병폐니까요.”

그렇게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지훈 교수의 시선이 날카롭게 움직였다. 감주형 교수를 향해서.

“베리타스 룩스 메아. 여기에 계신 분들은 이 말의 참의미가 뭔지 아실 겁니다.”

그제야 감주형 교수가 웃었다. 서지훈 교수도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 둘 다 호의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돈, 명예, 권력에 있지는 않나요? 우리의 고향이 혼탁한 빛으로 가득 찬 느낌입니다. 이상입니다.”

서지훈 교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려왔다. 박수는 없었다. 한동안 강당은 살기어린 시선과 의혹의 웅성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민우가 있는 청문대에서도 열띤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 * *

청문대 대회의실에 총장과 대학원장, 그리고 처장급 교수들이 모두 모였다. 대학의 중장기발전을 설계하는 자리인 만큼 교수연구지원분과의 정연주도 특별히 회의에 참여했다.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대외협력처의 김한진 교수가 발의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 대학의 지원자가 감소세를 보일 거라는 것엔 모두 이의가 없을 겁니다. 여기엔 학령인구 감소 등 여러 요인이 있지요. 정부 정책에 의한 정원 조정도 불가피하고······ 전반적으로 대학 규모가 축소될 거라고 판단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재정에 타격을 주겠죠.”

암울한 진단에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눈을 번뜩인 박자희 총장이 되물었다.

“그야 다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대안은?”

“파이를 나눠먹지 않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이를 나눠먹지 않는다라.”

박자희 총장이 흥미를 보였다. 그는 CEO형 총장이었다. 대학의 재정을 안정화시키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목표였다.

덕분에 김한진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국내 학생과 정부 사업을 유치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경쟁이 심하니까요. 따라서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센터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쉽게 말해 ‘한국학’을 유학생들에게 전수한다는 말인가?”

“예. 실제로 많은 대학에서 교육원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 대부분 어문학을 가르치는 것에서 그칩니다만, 문학, 영상, 예술 등 문화 영역 전반으로 확대한다면 프리미엄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기획의 제목은 ‘한국문화교육원 설립’이었다.

그럴듯한 주장에 많은 교수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간 확보에는 문제가 없었다. 신축 건물이 대부분 비어 있어 그곳을 활용하는 안이 나왔다.

다른 교수들도 토의의 참여하자 이야기가 점점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개략적인 커리큘럼을 정하는 것은 물론, 교수 섭외 과정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물론 연주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진 않았다.

모든 상황을 머리에 넣고 가능성을 타진했다. 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지체 없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아, 정연주 실장님. 말씀하시죠.”

김한진 교수가 허가하자 연주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발언을 시작했다.

“어문학 분야는 좀 더 세분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유학생들에게 가장 화두가 되는 게 그쪽 분야일 것 같아서요. 우리 대학엔 국제어학원이 없다는 것도 이슈가 될 거고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국어교육은 기본이고, 여기에 문학이론과 통번역 강좌를 추가하면 좋겠어요. 나아가서 문예창작 강좌도 넣으면 학생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으음. 조금 곤란한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관련 전공 교수님들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상의를 한다고 해도 최종 결정권은 총장이 쥐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이 나지는 않겠지만 연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다.

‘만약 성사된다면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아.’

때마침 그녀의 머릿속에 네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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