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 90장. 선학(先學)의 길 (2) >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짐을 끌고 공항 게이트를 나오기 시작했다. 발꿈치를 들며 그쪽을 기웃거리던 주예린이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이수비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수빈이 주예린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짐이 좀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두 사람은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잘 지냈어?”
“응응! 우와. 하버드 물이 좋긴 한가봐. 피부가 더 뽀얘진 거 같은데?”
“얘는 참. 학기 끝나서 요 며칠 푹 잤거든. 그래서 그런가봐. 학기 중엔 장난 아녔어.”
수빈은 부끄럽게 웃었다. 친구에게 캐리어 하나를 넘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민우 오빠랑 섭섭이 오빠는?”
“안 왔어.”
“왜? 어제 분명히 공항까지 마중 나온다고 했었는데······.”
수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귀국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던 민우였으니까. 어제도 톡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예린은 손을 내저었다.
“소용없어. 오기 전에 전화 스무 번이나 넘게 했다구. 어휴, 이 웬수도 민우 선배도 안 받더라.”
주예린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물끄러미 핸드폰의 부팅화면을 바라보던 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어제 뭐 들은 건 없고?”
“둘이 술 마신다고 들었어. 그 후로 연락 두절.”
이수빈이 민우에게 느끼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주예린도 진섭에게 느끼는 감정이 있었다. 곧 사악한 표정을 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뻔할 뻔자지 뭐. 술 진탕 마시고 2차로 클럽 갔다가 다른 여자하고 눈이라도 맞은 걸 거야.”
“······.”
“일단 가자. 친구야.”
주예린은 소설가답게 소설을 썼다.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수빈이었지만, 공항을 나서는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예린의 벤츠에 몸을 실었다.
주예린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며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아니. 울 오빠네로 가 볼래. 무슨 일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만약 주예린의 농담을 듣지 않았더라면 본가로 돌아가 푹 쉬면서 연락을 기다렸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북미 대륙을 감동시킨 주예린의 필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괜히 갔다가 못 볼 꼴 보면 어째? 가령 낯선 여자의 속옷이 거실에 뒹군다든지, 이불 밑에 나온 발이 네 개라든지······ 아, 이건 넘 나갔나?”
“주예린!”
“넵. 출발합니당.”
주예린이 신나게 엑셀을 밟았다.
* * *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민우의 빌라에 도착했다. 골목이 좁아 어렵게 주차를 한 뒤 수빈과 예린은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민우 선배 어머니랑 같이 살지 않아?”
“요 며칠 고향에 내려가 계신다고 들었어. 지금은 혼자 있을 거야.”
현관 앞에 선 이수빈은 심호흡을 하며 도어락 번호를 꾹꾹 눌렀다. 곧 쇳소리가 들리며 잠금이 풀렸다.
이수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먼저 신발장을 살폈다. 다행히 낯선 하이힐은 없었다. 대신 거실에서 코 고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곧 수빈과 예린은 거창하게 벌어진 술판을 목격했다.
“와······ 대체 둘이 몇 병이나 퍼마신 거야?”
주예린이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른안주는 물론 소주와 맥주, 양주 등 온갖 술병이 널려 있었다. 비어있지 않은 병이 없었다. 민우와 진섭은 그 가운데 사이좋게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어이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수빈은 이내 웃었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고작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오지 못한 거라니.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마음을 품었던 건 아니었다. 분노에 찬 주예린은 소주병을 말아 쥐고 한진섭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예린아. 깨우지 마. 그냥 자게 내버려 둬.”
“왜?”
“깨운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내가 다시 공항으로 가서 오빠들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사네 천사. 어휴, 나 같음 3년 정도 삐쳐있을 건수인데.”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가끔 칠칠맞지 못한 오빠들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흐음. 확실히······.”
턱을 괸 주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가끔 술을 마시긴 해도 이렇게 많이 마시거나 하진 않는다. 서로 바빴으니까.
“일단 좀 정리해야겠어. 엉망이네.”
수빈은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팔을 걷으니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렇게 수빈과 예린은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수빈은 앞치마를 두른 다음 주방에 섰다. 먼저 냉장실을 열고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재활용 쓰레기를 밖에 내놓고 돌아온 예린이 물었다.
“뭐 하려구?”
“오빠들 해장할 거라도 만들어 줘야지. 저렇게 마셨으면 속 뒤집어졌을 거야. 어디보자······ 역시 어머니가 계시니까 장 볼 필요는 없겠네. 재료는 다 있어.”
“요리도 할 줄 알아? 역시 하버드 유학생은 클라스가 다르군!”
실없는 농담에 수빈이 풋 하고 웃었다.
얼큰한 찌개가 완성될 무렵, 민우가 눈을 떴다. 코를 자극하는 매콤한 향기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어?”
몸을 일으킨 그가 잠이 덜 깬 눈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이수빈.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늦잠 자서 마중도 못 나온 사람이 할 소리예요?”
마주 앉은 수빈이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수빈의 보드라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
“잘 잤어요?”
그제야 민우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실감이 났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한참 지나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어제 섭섭이하고 왕창 마셔서 못 일어났나봐. 미안해. 알람 두 개나 맞춰놨는데.”
“빈 병 보니 진짜 많이 마셨더라. 무슨 일 있었어?”
“좀 그럴 일이 있긴 했지. 나중에 섭이 일어나면 얘기해 줄게.”
그 말에 TV를 보던 예린이 내려와 진섭의 등짝을 때렸다. 곧 진섭도 눈을 떠야 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식탁에 앉아 오랜만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자연스레 진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수빈과 예린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섭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다른 데 알아보면 돼. 그래도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상태라서 자리 구하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기분이 나쁘더라. 잘린 거야 잘린 거지만······ 진짜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인정을 받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진섭은 굳이 타대생이라는 표현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였다.
진섭이 계속 토로했다.
“이게 생각해보면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잖어. 어딜 가도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면서 실력은 도외시한 채 외적인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이런 풍토가 만연한 사회에서, 후우. 내가 이러려고 대학원 왔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진짜 요즘은 소설 쓰기도 힘들어. 소설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는 시대잖아.”
주예린도 푸념했다. 그래서 신작이 잘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민우도 수빈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인간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문제에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수빈이 민우에게 물었다.
“근데 오빠. 청문대엔 국제어학원 같은 거 없어요? 요즘 국제교육원이다 뭐다 해서 많이들 만들잖아요. 오빠랑 섭 오빠랑 같이 일하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나도 알아봤는데 없더라. 예체능 쪽하고 이공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학이다 보니 우리 쪽 관련 연구소나 기관이 다른 대학에 비해 빈약한 편이야. 그나마 이번에 내가 교재 낸 것 때문에 출판문화원이 훅 컸지.”
“아쉽네.”
사실 청문대만의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학은 물론 정부에서도 이공계에 투자를 많이 한다.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기 쉽기 때문이다.
수빈이 진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섭 오빠. 훌훌 털어버리고 힘내요. 오빠라면 분명 더 좋은 자리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셔. 아쉬움은 어제 술잔에 다 털어 넣었으니까! 그렇지 형제?”
“치워. 징그럽다.”
진섭은 유쾌하게 웃으며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맙다는 표현이었다.
친구가 마음의 짐을 덜은 것 같아 민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진섭이 아니라 서지훈 교수가.
― 너희들은 묵묵히 그 자리에서 빛나주면 돼. 후학의 길을 여는 건 선학의 몫이니.
그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서지훈 교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만 민우는 그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 * *
설예라 교수는 오늘도 한가롭게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초겨울 치고 햇살이 밝았다.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시원하고 좋네. 수빈이는 지금쯤 귀국했으려나?”
싱긋 웃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노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서지훈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설예라 교수가 반갑게 일어났다. 두 사람은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인연을 이어 온 사이였다.
서지훈 교수가 설예라 교수를 바라보고는 흠칫 놀랐다.
“뭐야, 머리 잘랐어?”
“예. 조금?”
그렇게 대답하며 머리를 매만졌다. 하지만 말처럼 조금이 아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였는데, 지금은 귀 밑을 간신히 넘을 정도였다.
“조금이라니? 실연당한 사람도 그렇게 짧게 안 자를 것 같은데.”
“선배도 나이 먹고 장가가더니 감이 많이 무뎌지신 모양이네. 제가 고작 실연당한 정도로 머리 자를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렇게 보셨다면 서운하죠.”
“그럴 리가 있냐.”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었다. 저 미소 너머에 감춰진 예리한 칼날이 있다는 것 정도는 학부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만큼 설예라 교수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것이다.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준비는?”
“준비야 예전에 다 끝냈죠. 화분에 물 주면서 선배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럼 슬슬 가자.”
설예라 교수는 책상에 올려둔 서류철을 품에 안고 서지훈 교수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인문관을 나와 교수회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햇볕이 따뜻해서 걷기 좋았다. 간간이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길을 걸었다.
“한진섭 선생은 어때요? 충격이 컸을 텐데. 이야기 해 보셨어요?”
“다행히 데미지가 크진 않은 거 같아. 자기 힘으로 다른 곳 알아본다고 의욕에 불타고 있어. 역시 젊음이란 좋은 거지.”
설예라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면접 때 진섭의 자질을 높게 샀던 그녀였는데, 제대로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선배.”
“왜?”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이런다고 뭔가 바뀔까? 학과 분위기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퇴보하는 건 아닐까.”
“겁먹었어?”
“설마요.”
서지훈 교수가 싱겁게 웃었다.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새 조금 느려졌다. 시간은 충분했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왔으니까.
잠시 뜸을 들인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민우 녀석이 좀 더 성장한다면 쉽게 바꿔놓을 수 있겠지. 정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친구니까.”
“어디까지 보고 계신 거예요?”
“말 그대로 무궁무진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녀석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감이 오지 않아. 가능성만이 아니지. 그만한 능력도 있고.”
“그럼 좀 기다리지 그래요? 백마 탄 초인처럼 여기에 짠 나타나기를 기다리면 되잖아요.”
서지훈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으며 길을 걷기만 했다. 설예라 교수도 따로 묻지 않았다. 대답이 너무 뻔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때 왼쪽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감주형 교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일찍들 왔군.”
감주형 교수는 두 사람이 못마땅한 듯 쳐다보다 어렵게 한마디를 꺼냈다.
“날씨도 좋은데 오늘은 다들 조용히 자리만 지키다 가지. 학교 안팎으로 시끄러울 때니까.”
“충고하시는 겁니까?”
서지훈 교수의 반문에 감주형 교수의 눈매가 꿈틀했다.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지.”
감주형 교수가 몸을 돌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의 한마디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감 형, 저도 하나 충고할까요?”
그가 돌아섰다. 눈앞에 당당히 선 서지훈 교수는 차갑게 웃고 있었다.
“정치를 하려면 여의도로 가십시오. 이곳은 대학입니다. 학문의 요람이죠. 정치꾼이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뇨.”
서지훈 교수가 앞서 걸었다. 곧 그가 회의실 문을 열더니 웃으며 안을 가리켰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