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 < 90장. 선학(先學)의 길 (1) >
“그러니까, 이번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는 서울에서 열린다 이거지?”
민우가 물었고, 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맞아요. 모임 방식이나 분위기는 플래티넘하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모여서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고, 그게 끝이에요.”
“흐음, 역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네.”
“사업하는 분들은 따로 시간을 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연주는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가 영향을 준 몇 가지 큰 사건들을 열거해 주었다. 학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민우는 만족했다.
‘좋아. 정보는 이 정도면 충분해. 해 볼만 하겠어.’
나머지는 직접 나가서 부딪혀 보면 된다. 일회성 모임도 아니고 언젠가 다시 열리는 모임이니 아쉬움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민우가 캔커피를 따고 쭉 들이켰다.
“참, 아랍 쪽 대사관에서는 어때? 반응이 좀 있었어?”
“있었어요.”
연주는 노트를 펼쳐 메모를 읽었다.
“이집트랑 아랍에미리트 대사관에서 회신이 왔어요. 내부 검토 후 연락 준다고 하네요. 폴라리스가 생각보다 대외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모양이에요. 다들 관심이 있어 보였어요.”
“그래? 해외 언론에서 이슈가 된 게 컸나보네.”
가디언지 기자 조슈아 벨라미의 역할이 컸다. 그가 시상식 때 찍은 사진이 여러 언론에 인용되었고, 그게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입소문도 대단했다. 덕분에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업계종사자 중 민우가 구상한 국제번역기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소문이 무성할 무렵 폴라리스가 실체를 드러냈고, 많은 언론들이 지면을 할애해 그것을 소개했다. 폴라리스 홈페이지의 트래픽은 차츰 늘어가고 있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던 민우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화제를 바꿨다.
“근데 너 요 며칠 안 보이던데 어디 다녀왔어?”
“아, 그게······ 일본에서 바로 귀국 안 하고 지은이랑 같이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동경대 쪽 일도 잘 끝냈으니 저한테 오랜만에 선물 좀 했어요. 온천에 몸도 담그고.”
“잘했네.”
연주의 안배 덕에 동경대와 관계가 한층 좋아졌다. 청문대의 다른 교수들 강연도 유치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주 스스로도 여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하지은의 역할이 컸다. 연주는 사적인 감정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에 보다 집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우우웅―
그때 책상에서 진동이 울렸다. 민우는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한진섭이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 ······연구실이냐?
“오냐. 청문대다.”
장난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민우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평소와 좀 달랐다. 활기차야 할 진섭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어제 술 마셨어? 숙취에 쩐 목소린데?”
― 어제 좀 달렸어. 휴우, 나 지금 청문대 근처인데 잠깐 들러도 돼?
“안 될 건 없지. 혼자야?”
― 인간은 올 때도 갈 때도 혼자지.
“되도 않는 드립 치는 거 보니 술은 덜 깬 것 같고······ 나 계속 연구실에 있을 거니까 오든 말든 편한 대로 하시죠.”
― 간다.
민우는 전화를 끊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민우와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고, 누군가 오는 것 같아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좀 더 있다 가지? 진섭이 온다는데.”
“아, 진섭 오빠 전화였어요?”
연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요즘 명인대에 나가지 못해 간만에 인사나 할까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문이 슬쩍 열렸다. 초췌한 몰골의 한진섭이 들어왔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혀를 찬 민우가 냉장고에서 진섭이 좋아하는 캔커피를 꺼냈다.
“난 또 좀비인 줄 알았네.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근처 지나가다가 전화한 거야. 영광으로 알라······ 응? 오. 연주도 있었네.”
연주가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오랜만이에요.”
“어어. 그래. 요즘 많이 바쁘다면서? 얘기는 대충 민우한테 들긴 했어. 활약이 아주 그냥 기가 막히다고.”
“별말씀을요. 그냥 그래요.”
“크~ 우리 박 교수가 이런 겸손을 배워야 할 텐데.”
그렇게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처음부터 유심히 진섭의 표정을 살피던 민우가 나섰다. 아무래도 뭔 일이 있어 보였다.
“어제 몇 병이나 마셨냐?”
“몰라. 그런 거 안 세.”
“요즘 논문 쓰느라 바빠서 술 잘 안 마시는 것 같더만. 주님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게.”
한숨을 내쉰 진섭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힐끔, 연주를 바라보았다.
“자리 비켜드릴까요?”
“아니. 뭐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고······ 나 잘렸다.”
“뭐가 잘려?”
“국제어학원에서 잘렸다고.”
뜬금없는, 하지만 한없이 진지한 한마디에 민우와 연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진섭이 말했다.
“어제 국제어학원에서 계약 못하겠다고 연락 받았다. 다음 학기에 시수 늘었다고 좋아하다가 순식간에 실직자 된 거지. 어쩐지 요즘 운수가 좋더라니······.”
“갑자기 왜? 이유는 들었어?”
“나야 모르지. 높으신 분들 사정을 내가 어찌 알겠어? 계약서는 좀 천천히 쓰자고 해서 이상했는데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네.”
진섭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침묵이 오래 흘렀다. 연주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섭을 응시했고, 민우는 머리를 굴리며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시수를 줄인 것도 아니고 9학점을 통째로 날려? 아무리 국제어학원이 부속기관이라고 해도······.’
민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럴듯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민우도 최근 명인대에 자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가 없었다.
민우가 물었다.
“지금 국제어학원장이 누구야?”
“감주형 선생님.”
그때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상념. 서지훈 교수와 감주형 교수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맞아. 예전에 서지훈 선생님이 국제어학원 일에 끼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지. 혹시 그거랑 연관이 된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본인에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서지훈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고?”
“아직까지는.”
“연락 드려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고 계실 수도 있잖아.”
“안 그래도 오늘 학교에 갔는데 연구실에 안 계시더라고. 뭔가 전화로 말씀 드리기가 좀 그래서. 내일 다시 가봐야지.”
진섭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분위기는 왠지 싫었다. 그는 힘차게 박수를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 괜찮아! 다른 데 알아보면 그만이지. 학회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으니 알음알음 알아보면 어딘가 연이 닿지 않겠어?”
민우는 진섭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힘들 때도, 슬플 때도. 그래서 지금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민우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해. 여기 교수님들 통해서 알아봐 줄 테니까.”
“됐습니다! 그냥 푸념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해결해야지. 근데 연주한텐 좀 미안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하. 너무 우울한 얘기만 꺼냈네.”
“아녜요. 오빠는 실력이 있으니까 어디라도 가실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역시 우리 연주가 한 마디 해주는 게 민우의 백 마디보다 낫다니까? 땡큐!”
민우는 씁쓸히 웃었다. 그의 말대로 푸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아니, 분명 아닐 것이다.
국제어학원 강의가 학부 강의에 비해 비중이 작다고는 해도 진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곳에 걸고 있었다. 얼마나 큰 박탈감이 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민우는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하필······.’
그때 다시 민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서지훈 교수였다. 민우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예, 선생님.”
― 청문대냐?
“지금 진섭이하고 같이 있습니다.”
민우는 일부러 진섭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서지훈 교수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 시간 괜찮으면 지금 같이 내 연구실로 넘어와라. 자세한 이야기는 와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곧 민우와 진섭이 청문대를 나서 명인대로 향했다. 인문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 * *
서지훈 교수는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뺨을 붉게 물들었다. 고독해 보이는 그 모습을 두 제자는 말없이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선생님.”
민우가 부르자 서지훈 교수가 움직였다. 제자들 앞에 마주 앉아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 말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번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진섭이가 많이 서운했을 텐데 미안하구나. 지켜주지 못해서.”
“아닙니다. 선생님 덕분에 실컷 강의했는데요 뭐. 이제 어딜 가도 무섭지 않습니다!”
“센 척은 그만 해.”
서지훈 교수의 일침에 진섭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보다 못해 민우가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시수가 줄어든 거라면 몰라도 모두 드랍이라뇨.”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진섭이의 강의력이 너무 출중한 게 탈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신기한 동넵니다. 능력이 뛰어난 게 탈이 되다니······.”
감정이 격해 그렇게 비꼬아 말했지만, 민우는 실수를 인지하고 사과했다. 명인대를 욕하는 건 서지훈 교수를 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리큘럼이 바뀔 때 강사 추천을 받긴 했는데······ 이젠 구색 맞추기를 안 하겠다는 거야. 국제어학원을 자기들 뜻대로 운영하겠다는 거지. 자대생 위주로.”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다른 곳 알아보겠습니다.”
억울했지만, 진섭은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명인대 국제어학원에서 쌓은 2년이라는 경력은 누구도 쉽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당분간 좀 쉬면서 재충전해라. 괜찮은 자리가 나면 내가 추천을 해 주마.”
“아닙니다. 제가 직접 서류를 넣겠습니다. 이번엔 제 실력으로 해보고 싶어요. 이깟 일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사내자식이라면 이 악물고 해봐야죠!”
진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서지훈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 한진섭이 나가고 민우와 둘만 남았다. 민우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민영환 선생님이 좀 달라지셔서 과 분위기도 좋아지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네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 방 먹은 기분입니다.”
“학문적 순혈주의가 하루아침에 바뀔 만한 건 아니지. 나름 노력을 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구나. 국제어학원은 시작에 불과해.”
“무서워서 명인대에 강의도 못 나오겠어요. 내년에 수료하고 나서 한번 해볼 생각이었는데.”
“안 나오면 그만이잖아? 너야 어차피 청문대에 자리를 잡았잖아. 이명인 장학생이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강의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어휴, 확 그냥 영문과에 가서 강의 해버릴까요? 안 그래도 그쪽에서 요즘 계속 오퍼 오고 있는데요.”
“하하하! 그거 재미있겠는데?”
그제야 미소를 지은 서지훈 교수가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 다음, 허공에 내뱉었다.
“설예라 선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명인대 국문과를 걱정하는 다른 젊은 교수들도 노력하고 있다. 고인 물 썩게 하지 않으려고.”
민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섭에게 기회가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원에 타대생 비율이 높아질 일도 없었을 거고.
“소수의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집단은 건강하지 않아. 그건 정치도 마찬가지지. 재작년 전국을 울린 국민들의 함성을 기억하나? 그것과 비슷한 이치야.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지.”
“그렇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서지훈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이건 우리 교수들의 문제야. 너희들은 묵묵히 그 자리에서 빛나주면 돼. 후학의 길을 여는 건 선학들의 몫이니.”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새겨야 할 한 마디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도 후학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때가 올 수도 있으니까.
“저, 선생님.”
“응?”
“자리까지 걸진 마세요. 선생님 안 계시면 저 박사 논문에 도장 못 받아요.”
“하하하하!”
민우의 농담에 서지훈 교수가 실컷 웃었다. 지나치게 경직됐던 분위기가 봄날처럼 선선해졌다. 서지훈 교수가 담배를 짓이기며 말했다.
“나 잘리면 남해로 와. 같이 바다낚시나 하자.”
“송 실장님은 서울에 두고요?”
“이런, 그런 문제가 있군. 몸 좀 사려야겠는데?”
두 사제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신념을 확인했다. 이제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서지훈 교수가 자신이 아끼던 양주를 서랍에서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바쁜 거 알지만 시간 내서 진섭이 잘 챙겨 주고.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말 알지?”
“섭이가 좋아하겠네요. 평소 탐내던 거였는데. 감사합니다.”
연구실에서 나온 민우는 진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수빈이 아침 일찍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민우는 친구를 위해 그 밤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