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 89장. 밀실 회의 >
‘내년 1월이라······ 시기가 좋아. 그때쯤이면 아랍권 대사관 쪽하고도 연결이 될 거고. 부지런히 움직이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겠어.’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편지를 접었다.
한 달의 여유가 있으니 참가하기 전에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연주나 지은에게 물어본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편물을 가방에 넣으려는 그때 김문혜 조교가 귤을 두어 개 더 들고 다가왔다.
“교수님. 러브레터라도 온 거예요? 싱글벙글이셔서.”
“뭐?”
짓궂은 질문에 민우가 웃었다. 김문혜 조교가 귤을 민우에게 건넸다. 잘 먹는 걸 보니 더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석이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
“교수님이라면 왠지 그런 거 많이 받을 거 같아서요. 특히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비율의 문제다. 과 특성상 여학생들이 많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런 거 한 번도 받은 적 없어.”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하는 학생들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적은 많았다. 물론 민우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해 구설수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조만간 동경대에서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공문 오면 받아놓고. 그럼 수고해.”
“아! 교수님. 오늘 강의평가 결과 떴으니까 교수정보시스템에 들어가셔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오케이.”
김문혜 조교가 해맑게 웃었다. 강의평가 결과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민우는 자리를 정리하고 조교실을 나섰다. 학기가 끝났지만 폴라리스 연구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잘들 있었어?”
“어서 오세요!”
이다혜와 남희석이 반갑게 민우를 맞았다. 잠시 쉬는 시간이었는지 두 사람은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민우는 일본에서 특별히 준비한 선물을 두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선물은 나중에 풀어 보고. 일단 프로젝트 진척사항 좀 체크하자. 다혜. 자료 정리한 거 있어?”
“넵. 여기요.”
민우가 올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이다혜는 이미 자료를 출력해 놓았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민우는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자료를 끝까지 훑어본 민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생각보다 부지런히 했다? 이틀 정도 더 미리 해놨구나. 나 없다고 게으름 피울 줄 알았는데.”
“저는 늘 최선을 다합니다.”
“뭐얏?”
남희석의 진지한 한마디에 옆에 있던 이다혜가 미간을 좁혔다.
“남희석. 누군 열심히 안 하니? 마치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어필하는 거 같네.”
“오해입니다.”
“그럼 ‘저는’이 아니라 ‘저희는’이라고 해야지. 번역한다는 녀석이 그렇게 디테일을 못 살려서 되겠니?”
“주의하겠습니다. 누님.”
“누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깐! 나이 차이가 몇 개나 난다고!”
“표현의 자유입니다만.”
급기야 이다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투닥거리는 두 제자들을 뒤로 한 채 민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일본에 다녀온 사이 더 친해진 모양이네.’
허물없이 대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민우도 누나인 박민아와 저렇게 투닥거릴 때가 있었다.
누나와의 일을 떠올리니, 절로 예쁜 아기의 모습이 생각났다.
‘우리 연서는 잘 놀고 있으려나? 저녁에 한번 가봐야겠다.’
누나는 얼마 전 딸을 순산했다. 드디어 민우에게 조카가 생긴 것이다. 첫 조카라 그런지 자신의 아이처럼 정이 갔다. 생각난 김에 민우는 핸드폰으로 조카 사진을 넘겨보았다.
그 사이 컴퓨터 부팅이 끝났다.
민우는 누나에게 저녁에 잠깐 들르겠다고 톡을 남기고 마우스를 잡았다. 웹브라우저를 실행시키고 청문대 교수정보시스템에 로그인했다.
좌측 메뉴에서 강의평가 조회 버튼을 클릭했다. 곧 결과표가 모니터에 출력됐다.
‘되게 복잡하네.’
상아대 강의평가와 비교했을 때 항목이 굉장히 많았다. 학과 및 단과대학 평균치까지 나와 있어 다 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민우의 두 눈이 신중히 결과를 살폈다.
청문대 강의평가는 5점 만점이었고, 학과는 물론 모든 단과대와 합산해 순위가 공개된다. 때문에 대학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민우는 이번 학기 두 강의를 맡았다. 먼저 국문과 전공 강의인 한국현대소설론 결과부터 살폈다.
‘오 4.7? 생각보다 잘 나왔네. 휴강을 한 번 해서 별로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국문과 교수가 아니라서 평가가 박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상위 10퍼센트 안에 드는 평점이었다. 민우는 학생들이 남긴 서술형 코멘트를 확인했다.
대개가 좋은 말들이었지만, 일부 비판적인 내용들이 섞여 있었다.
‘역시 점수가 높아도 강의에 대한 불만이 안 나올 수는 없구나······.’
지난 학기 상아대에서 강의할 때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의 의견으로 일축할 수도 있지만, 민우는 한 학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실수한 곳이 없는지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코멘트를 읽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메인 강의인 ‘번역의 이해’였다. 모니터에 정보가 뜨는 순간 민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바로 이거지!’
평점 4.91. 평균을 생각한다면 굉장한 점수였다. 민우는 바로 단과대와 학교 전체 순위를 확인했다.
단과대에서는 1위, 학교 전체에서는 10위.
순위 창 밑에 작은 팝업이 떴다. ‘2018년도 2학기 우수강의상 수상 대상자’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청문대 강의평가 전체 10위까지 주는 상이었다.
‘간신히 턱걸이했구나. 그래도 아주 좋은 출발이야. 연주와 양한선 교수님께 면목이 좀 서겠는데?’
민우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남긴 코멘트를 빠짐없이 다 읽었다. 강의에서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메모까지 한 다음 창을 껐다.
‘휴, 이제 진짜 2학기가 끝난 느낌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맏조교격인 이다혜가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안경을 낀 왜소한 체구의 남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은 이다혜와 남희석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고 민우는 달랐다.
“왔어?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교수님은 잘 지내셨어요?”
“보다시피.”
차민재가 꾸벅 인사했다. 민우가 직접 일어나 그를 반갑게 맞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두 조교는 일을 하는 척하며 그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민우가 물었다.
“요즘 상아대는 어떠냐?”
“그냥 똑같아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래. 이쪽으로 앉아라.”
그 사이 이다혜와 남희석이 수군거렸다. 상아대에서 온 교수님의 제자라는 주제로. 남희석의 눈에 긴장감이 돌았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서로 물어볼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이다.
“근데 갑자기 서울엔 왜 왔어?”
“친구들도 보고 교수님도 뵈러 왔어요.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요.”
“어떤?”
“실은 저 이번에 수능 봤어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 수능을 봤다는 이야기는 대학을 옮긴다는 말이었으니까.
“전에 대학원 준비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는데 계획을 바꿨습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역시 나중을 생각한다면 상아대보다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이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점수는 어때?”
우려와는 달리 차민재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잘 나왔어요.”
“다행이네. 정말 고생했다. 학교 다니면서 수능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다 교수님 덕이죠. 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아대라는 울타리에 갇혀 스스로 합리화하며 살았을 것 같아요. 더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데 말이죠.”
차민재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수업을 빼먹고 잔디밭에 누워 있다 민우를 만났던 그때를. 그때 민우는 말했다. 자신의 목표에 반도 오지 않았다고.
그 한마디에 민재는 밖에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청문대에도 원서를 넣어볼까 합니다.”
“선택을 강요하진 않으마.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 다른 대학도 한번 알아보고.”
“예.”
민재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이미 한 곳으로 기울여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굳이 이렇게 청문대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두 사제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명인대 인문관에 위치한 소회의실에 교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석을 비워둔 채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명인대 국문과 감주형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상석은 그의 차지였다.
“으음, 모두 모이셨나?”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그것은 감주형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소회의실에는 국문과 어학파트 교수들 중 일부가 모였는데, 다들 국제어학원에서 보직을 하나씩 맡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명인대 국제어학원 2학기 강의사업 결과에 대한 것이었다.
프린트물을 훑어본 감주형 교수가 운을 뗐다.
“최 선생. 먼저 그 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지.”
“예.”
국어사를 전공한 최철웅 교수가 자료를 넘기며 발의를 시작했다.
“우려했던 대로 한진섭 선생의 강의평가가 이번에도 탑을 찍었습니다. 지난 번 발표한 국어교육 관련 논문도 반응이 상당히 좋습니다.”
“흠, 결국 그렇게 됐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교수들은 한숨을 내쉬며 감주형 교수의 눈치만 살폈다. 하나같이 한진섭의 활약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번에 시수까지 늘렸다지?”
“맞습니다.”
“대안은?”
“그게······ 아시다시피 서지훈 선생이 추천한 사람이라 어떻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강의평가라도 좋지 않으면 구실을 삼을 수 있는데 그것도 어렵고요.”
궁색한 변명에 감주형 교수가 혀를 찼다. 하지만 그도 잘 알았다. 서지훈 교수가 명인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최철웅 교수를 쏘아보며 추궁했다.
“그러니 박사과정 입학을 막았어야지. 원래는 떨어트리기로 되어 있었던 거 아닌가?”
“면접위원단 구성이 우리에게 너무 불리했습니다. 한 명만 더 추가되었더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텐데. 설예라 선생의 개입이 컸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최철웅 교수는 이를 갈았다. 당시 면접 때 설예라 교수에게 당했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최철웅 교수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닙니다.”
“또 무슨?”
“내년이면 박민우 선생도 강의를 맡을 확률이 큽니다. 박사과정이 끝나니까요. 이렇게 되면 우리 쪽 지분이 위축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청문대로 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쪽에서 전임을 보장받았으니 우리와는 상관없지 않나?”
“이명인 장학생이라 수료 후에 우리 과에서도 강의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국제어학원이 아니라 학부 강의이긴 합니다만 과 내에서 평판이 좋아 변수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최철웅 교수가 준비한 프린트물에는 민우의 프로파일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이명인 장학생’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보였다.
“이명인 장학생이라······.”
일이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팔짱을 끼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감주형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틈에 교수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과가 이상하게 변해가는군요. 타대 출신들이 멋대로 휘젓게 놔두실 겁니까?”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이게 다 서지훈 그 친구 때문이지요.”
“지금이야말로 감 선생님께서 전면에 나서야 할 때 아닙니까?”
주변 교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수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그것을 지켜보던 감주형 교수가 테이블을 툭 쳤다.
마법처럼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정리를 합시다. 흐음, 다음 학기 한진섭 선생이 맡은 강의가 몇 개지? 두 개, 아니 세 개인가?”
“예. 시수가 늘었으니 총 9학점, 세 개입니다.”
“모두 드랍해.”
모여 있던 교수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나도 아니고 강의 세 개의 담당 교수를 바꾸는 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감주형 교수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었다. 그의 보직은 국제어학원장이었다. 임용 권한은 그의 손에 꽉 쥐어 있다.
“괜찮을까요?”
“책임은 내가 지지.”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최철웅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보고했다.
“그럼 적당한 인재를 자대 출신 중에서 선별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다음 안건은?”
“다음으로는······.”
감주형 교수가 주도하는 밀실 회의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