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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40화 (240/500)

240화 : < 88장. 도쿄의 밤 (3) >

“용케도 좋은 식당 찾았네. 전망도 멋지고. 도쿄엔 와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게······ 오기 전에 지은이한테 물어봤어요. 여기 추천해 주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지은이 여행 자주 다닌다고 했지? 나중에 어디 갈 일 있으면 좀 물어봐야겠네.”

민우가 자연스레 이야기를 풀어갔지만 연주는 잔뜩 긴장했다. 무릎 위 치마를 손으로 움켜쥘 정도로. 민우가 오기 전 단단히 각오를 했는데 막상 일이 닥치니 어려워졌다.

청문대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로 거의 매일 연주를 보던 민우였다.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너 어디 아파?”

“아뇨.”

“근데 왜 그래? 오늘 좀 이상하네. 아까 동경대에서는 뭔가 들떠 보이더니 지금은 축 쳐져 있고. 뭔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느낌인데.”

“아, 아무것도 아녜요. 저기 오빠. 먼저 주문부터 할까요?”

“이젠 말까지 더듬네.”

얼굴이 살짝 빨개진 연주는 메뉴판을 펼쳐 민우에게 들이밀었다.

연주에게 선택장애가 있다는 걸 잘 알던 민우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샐러드를 시켰다. 서비스로 화이트 와인이 준비됐다.

가격이 상당히 비쌌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 연주 덕분에 동경대에 빚질 일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였다.

민우가 물었다.

“넌 언제 한국으로 출국해?”

“내일 오후 비행기예요.”

“생각보다 일찍 가네. 기왕 나온 김에 좀 더 쉬다 들어가지. 중요한 일 하나 끝냈으니 좀 여유 부려도 되잖아?”

“그게······ 앗!”

쨍그랑!

잔을 내려놓다 손이 미끄러져 놓치고 말았다. 와인잔이 산산조각 났다. 민우는 재빨리 일어서 연주의 팔을 붙잡았다.

“이쪽으로 와. 파편 밟지 않게 조심하고. 다친 덴 없어?”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튄 조각에 찔릴 수도 있었다. 민우는 연주의 다리에 상처가 나지 않았나 살폈다. 다행이 피가 나는 곳은 없었다.

“괜찮아요.”

“일단 자리 옮기는 게 좋겠다.”

곧 직원이 달려왔다. 민우는 정중히 사과하며 자리를 옮길 수 있냐고 물었다. 한 직원이 파편을 치우는 사이 다른 직원이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소동이 끝났다.

자리에 앉은 연주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안 다쳤으면 됐어. 옷은 괜찮아?”

“조금 튀긴 했는데 화이트 와인이라 그렇게 티는 안 나요.”

“다행이네.”

연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도 어그러지고 제대로 되는 일도 없었다. 고개를 들고 민우를 보기가 민망해졌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를 꺼내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그때 드는 한 생각.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은 걸까?’

이곳에 오기 전 하지은과 통화를 했다. 도쿄 타워 근방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추천해 주긴 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조언했다. 민우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지은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말하면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나열했다.

그럴듯하게 들렸다. 민우가 혼자라면 모를까 이미 이수빈이라는 짝이 있었다. 게다가 민우와는 청문대라는 공간에 함께 얽혀 있기도 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분명 오빠는 날 멀리하겠지? 그럼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불편할 거고······.’

남녀 사이에서는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연주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다. 연애경험도 없고 늘 사랑만 받아왔으니까.

두 사람은 특별했다. 앞으로 청문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워야 하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어떻게 하지? 이제 와서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식전빵이 준비되는 것을 지켜보며 연주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민우의 것이었다. 연주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핸드폰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액정에 뜬 사진이 보였다.

연주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표정이 한층 밝아진 민우가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민우가 바로 옆쪽 테라스로 뛰어 나갔다.

연주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민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옆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뚜렷이 보였다.

민우는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운데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오빠······.’

연주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민우가 웃는다.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뚱한 표정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수빈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릿했다.

‘난 바보였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파르르 떨리던 연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한숨이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주는 생각을 모두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민우가 다시 돌아왔다. 밖이 꽤 추웠는지 손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 통화가 좀 길어졌네. 수빈이가 악몽을 꿨다지 뭐야. 그쪽은 새벽 시간인데 왜 전화했나 싶었어. 가끔 이래.”

“괜찮아요. 그런데 언니는 언제 와요?”

그렇게 물은 연주가 살짝 웃었다. 민우는 또다시 이질감을 느꼈다. 긴장하고 초조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유가 느껴졌다.

민우가 빤히 바라보자 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니, 그게. 23일에 입국한다더라. 시간 되면 다 같이 한번 보자고 하네. 송년회할 겸.”

“예전처럼 파티룸 빌려서 같이 놀면 좋겠네요. 그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안 그래도 그때 왔던 철호 있잖아. 지음사 인문사회팀 주임. 또 안 노냐고 물어보더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파티에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났다.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골든팰리스 호텔 파티룸 이용권 구해볼까요? 거기 임도빈 회장님이랑 친하거든요.”

“애들이 좋아하겠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민우와 연주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접시를 비워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밝아진 연주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민우는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까지 해치운 두 사람이 레스토랑을 나섰다. 밤이 늦어 바람이 차가웠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그런데 정말 저녁으로 퉁 쳐도 되는 거야?”

“더 해주시면 좋죠.”

“어떤 거?”

입술에 손을 대고 잠시 고민하던 연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

“우리 정 실장님 너무 가셨네. 와인 한 모금 마시고 취했어?”

“농담이에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길가로 움직였다. 마침 택시가 정차해 있었다.

“난 오늘 만난 선생님하고 한잔 하기로 했어. 넌 숙소로 바로 가?”

“아뇨. 좀 걷다 가려고요. 여기가 좋은 데이트 코스래요.”

“대단하네. 혼자 데이트 코스를 걸을 생각도 하고. 하하하. 너무 오래 있다가 가진 마. 감기 걸리니까. 나 먼저 간다.”

“조심히 가세요.”

민우를 태운 택시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연주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농담 아닌데.”

그렇게 중얼거린 연주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개가 숙여졌다.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회가 밀려왔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투명한 무언가가 눈가에 맺혔다. 연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주는 그냥 울었다.

그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주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은 것이다.

“바보 같이 왜 울어?”

눈물을 닦던 연주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흐릿한 시야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단발 보브펌의 귀여운 아가씨가.

“지은아······.”

“그래. 나다. 에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왜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서 그래? 진즉 내 말 좀 듣지.”

“미안.”

실컷 투덜거린 하지은은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연주에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화장이 지워지지 않게 눈물을 닦았다.

연주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 알았어?”

“여기 알려준 사람이 누군지 잊었니?”

“아.”

비어있던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채워졌다. 자신의 일인데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본까지 날아와 준 친구가 고마웠다.

가까이서 연주의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하지은이 물었다.

“민우 오빠한테 얘기 못했구나?”

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못한 거야 안한 거야?”

“······반반?”

“그래. 잘했어. 잘했다 정연주! 적어도 오늘 밤에 이불킥할 일은 없겠네.”

하지은은 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갑이지만 한참 동생 같은 친구였다. 민우와의 일은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이번 일로 친구가 한층 더 성숙해지길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연주를 꼬옥 안아주었다.

* * *

뜻밖의 일정 때문에 민우는 일본에서 하루 더 머물렀다. 마침 동경대에서 인문학 관련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어 거기에 참석한 것이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민우는 적극적으로 세미나에 참여하여 지식을 나눴다. 몇몇 교수들과 명함을 교환하고 일본을 떠날 수 있었다.

‘일본도 오갈만 하구나. 가까워서 좋네. 다음엔 중국에 한번 가볼까?’

곧 중국에서도 <번역의 이론>에 대한 반향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민우는 들뜬 마음으로 인천국제공항 게이트를 나섰다.

바로 그때.

“박민우 교수님.”

경한신문 문화부 박윤지 기자였다. 예상은 했지만 행동이 참 빠르다.

“강연은 잘하고 오셨어요?”

“야유는 안 듣고 왔습니다.”

“반한 시위가 한창이라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일본에도 아직 희망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박윤지 기자는 이해 못할 말이었지만, 유이토 교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소탈하며 청렴한 그는 앞으로도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낼 것이다.

류타로와는 즐거운 술자리를 보냈다. 그 덕분에 최근 일본문학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우는 나중에 학회에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윤지 기자가 정중히 청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인터뷰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번엔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고 하셨는데 이번엔 안 통해요.”

“알았어요. 대신 커피는 기자님이 사시는 겁니다.”

“당연하죠. 자, 가실까요?”

민우는 레아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한 다음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인터뷰는 길지 않았다. 사진기자도 대동하지 않았고, 이번 강연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할당된 지면도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민우는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올 수 있었던 건 박윤지 기자의 도움이 컸으니까.

인터뷰가 끝나고 두 사람이 자리를 정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기사 기대할게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기사 올라가면 연락 드릴게요.”

작별 인사를 나누고 민우는 레아의 차를 타고 청문대로 향했다. 앉자마자 논문을 들여다보는 상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레아가 한마디 했다.

“이제 겨울방학인데 댁에서 쉬시는 게 좋지 않아요?”

“밀린 우편도 정리하고 프로젝트 체크도 해야죠. 제가 없다고 프로젝트가 멈추면 안 되니까.”

“그 말씀을 들으면 제임스 편집장님이 좋아하시겠어요.”

“부지런히 해야죠. 크리스마스에 놀려면.”

청문대에 도착한 민우는 연구실로 가기 전에 교양학부 조교실에 들렀다. 김문혜 조교가 귤을 까먹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 교수님! 잘 다녀오셨어요?”

“보다시피.”

민우는 일본에서 사온 만주 선물세트를 김문혜 조교에게 건넸다.

“다른 조교들은 어디 갔나? 이따 오면 같이 나눠 먹어.”

“감사합니다! 교수님. 귤 좀 드릴까요?”

“좋지. 덤으로 우편이나 공문 온 것 좀 있으면 정리해서 주고.”

“잠시만요.”

민우는 자리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우편을 살폈다.

총 네 개였다. 두 개는 학회에서 온 소식지였고, 하나는 잡지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눈에 띄게 고급스러운 편지였다.

자연 민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민우는 귤을 한입에 다 넣고 두 손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곧 민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드디어 왔구나! 타이밍 참 기가 막히네.’

그것은 김지형 회장이 보낸 초청장이었다. 플래티넘이 아닌, 그 다음 단계인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의 초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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