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39화 (239/500)

239화 : < 88장. 도쿄의 밤 (2) >

민우의 강연은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가 일본어를 능숙하게 해서만은 아니었다. 강연 자체가 매우 알차게 구성됐다.

<번역의 이론> 집필 배경과 과정, 그리고 내용이 중심이 되었지만, 민우는 한 발 나아가 맨부커 상 수상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영국의 출판 및 번역문화를 청중에게 소개했고 자신이 한국어로 번역한 일본 서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하기도 했다.

덕분에 번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론, 번역가를 꿈꾸는 일반인들 모두에게 유익한 강연이 되었다.

하지만 진국은 따로 있었다.

만약 청중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코너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단연 ‘질의응답’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민우가 신경 쓴 것은 청중들과의 호흡이었다.

민우는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손을 든 모든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다. 시시한 질문도, 웃긴 질문도, 진지한 질문도 있었지만 단 하나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심껏 답했다.

‘이제 끝이구나.’

스물일곱 명이나 되는 청중의 질문을 모두 소화시키고 나서야 민우는 강연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이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강연은 이것으로 끝이지만, 앞으로 여러분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내려놓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민우는 손을 흔들며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에게 화답했다. 몇몇 학생들이 다가와 책에 사인을 청했고, 민우는 웃으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  정말 멋진 강연이었습니다. 박민우 선생님.  」

유이토 교수였다. 마지막 학생의 사인을 끝낸 민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교수님 덕분입니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는데 동경대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았나 걱정이네요.  」

「  설마요. 오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

「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

누구도 시간낭비라 생각하지 않을 알찬 강의였다. 청중들의 표정이 증명했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강당을 나서고 있었다.

민우의 시선이 잠시 강당 뒤편을 향했다.

출구 쪽 가운데에 청문대 촬영팀과 연주가 서 있었다. 연주는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화 많이 났나?’

그럴 만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촬영팀을 철수하라고 이야기했으니까. 시간이 없어 서두른 게 연주에게 실례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민우가 유이토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  교수님. 청문대에서 온 일행이 있어서 잠시 그쪽으로 가봐야겠는데요. 이따 오후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

「  그러시지요. 그런데 한국으로는 언제 돌아갑니까?  」

「  내일 밤 비행기입니다.  」

「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시는군요. 오신 김에 오래 있다 가면 좋은데. 아쉽습니다.  」

「  종종 오겠습니다. 한 번 와 봤으니 다음엔 오기 더 쉬울 겁니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잖아요.  」

유이토 교수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엔 제가 한국으로 가지요. 서지훈 선생님 말고도 또 봐야 할 사람이 늘었으니 기쁜 일입니다.  」

「  이거 영광이네요.  」

민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악수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굳건해 보였다.

뒤이어 동경대 대학본부에서 나온 직원들과 타 학과 교수들이 민우와 악수를 하며 덕담을 나눴다. 특히 교수들은 민우도 이름을 들어본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한참 뒤에야 풀려난 민우는 강당 뒤쪽으로 달려갔다. 청문대 촬영팀은 장비를 철거하고 있었고, 연주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민우가 기도하는 모양으로 손바닥을 모았다.

“미안. 정 실장. 화 많이 났어?”

“화가 난 건 아니지만······ 이유라도 알려주고 가셨어야죠. 갑자기 촬영하지 말라고 하셔서 놀랬잖아요.”

볼까지 부풀리는 거 보니 화가 난 게 아니라 삐친 모양이었다. 민우는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웃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미안해. 사정이 좀 있었어. 그런데 촬영은 했나 보네? 강연 도중에 봤는데 카메라 돌아가는 거 같더라.”

“당연히 했죠. 우리 때문에 동경대에서 촬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영상이라도 넘겨줘야 하지 않겠어요? 대학과 대학 사이의 일은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이야, 우리 정 실장님 대학 사람 다 됐네.”

“박 교수님······.”

실내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민우는 연주의 매서운 눈을 피해 촬영팀장에게 가서 사과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반색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교수님 덕에 일본에도 와 보고 좋네요. 어차피 한국에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월급은 똑같습니다. 하하하! 다음에도 불러 주세요.”

“아무튼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국 돌아가서 술 한잔 하시죠.”

민우는 취재팀장에게 명함을 건네곤 다시 연주에게 돌아왔다. 촬영팀은 장비를 챙겨 강당을 나섰다. 그 넓은 강당이 텅 비었다.

“그런데 오빠. 왜 촬영을 그만두라고 하신 거예요?”

“삐친 건 풀렸어?”

“안 삐쳤다니까요.”

뚱한 표정이 귀여웠다. 하지만 더 이상 자극하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에 민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에 동경대 쪽하고 딜한 건 알지? 촬영권 가지고.”

“알아요.”

“내가 그거 가지고 장난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강연에 조건을 건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욕심이 지나쳤던 거지.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잠시 초심을 잃었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는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욕심이에요. 딱히 오빠의 잘못이라고는······.”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유이토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내가 너무 학자답지 않게 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덕분에 반성하게 됐지. 그래서 어제 제대로 못 잔 거야. 고민 좀 하느라.”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연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강당의 청소가 시작됐다. 민우는 연주와 함께 컨퍼런스 홀을 나섰다.

“아무튼 다행이다. 네가 재치 있게 움직여 준 탓에 동경대 쪽에도 면목이 서게 됐네. 정말 고마워.”

“고마우면 오늘 저녁 사세요.”

“저녁을?”

안 될 건 없지만, 유이토 교수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했었다. 문득 민우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따 저녁에 같이 유이토 교수님 뵈러 갈래? 배울 게 정말 많은 분이야. 깜짝 놀랐어. 원고를 컴퓨터가 아니라 원고지에 쓰시더라고. 올곧은 철학이 있으신 분이야.”

연주는 고민했다. 평소라면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랑느 박사와의 만남도 즐거워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각오를 다지고 온 상황.

연주가 물었다.

“혹시 교수님하고 선약 있으셨던 거예요?”

“선약까지는 아니고 이따 오후에 연락드리기로 했어. 그때 봐서 정해야지.”

“그럼 오후에 유이토 교수님이랑 티타임 나누시고, 저녁은 저랑 둘이 먹어요.”

평소 그녀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우는 약간 이질감을 느꼈다.

“지나친 부탁은 아니죠? 제가 한 일이 있으니까요.”

“음, 뭐. 그건 그렇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잠시 고민한 민우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연주는 생긋 웃었다.

“영상 파일은 잘 편집해서 동경대 쪽에 넘길게요. 우호적인 관계 유지하면서 강연이나 협력 프로젝트도 추진해 볼게요.”

“앞으로 바빠지겠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럼 박민우 교수님. 이따 연락할게요.”

돌아선 연주는 홀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민우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꿍꿍이지?’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떨어진 낙엽이 바닥을 굴렀다.

* * *

숙소 근방에서 점심을 해결한 민우는 가볍게 근방을 둘러보고 다시 동경대로 향했다. 유이토 교수 연구실엔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  오, 박민우 선생님!  」

젊은 남자였다. 환하게 웃은 그는 이시카와 류타로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일전에 유이토 교수가 잠깐 이야기했던 그 제자였다.

「  강연은 잘 들었습니다. 역시 기대하던 대로 유익했어요.  」

「  저에게도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

「  그거 아세요? 박 선생님 책을 시미즈 선생님께 추천한 게 바로 저라는 거.  」

「  알아요. 어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

신기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류타로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연배가 비슷해 금방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유이토 교수는 민우가 마실 차를 준비했다.

류타로가 말했다.

「  오후에 오신다고 들어서 저도 놀러왔어요. 아까 질의응답 시간에 선생님께 묻지 못한 게 있어서.  」

「  어떤 건데요?  」

「  한국 학자들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성을 어떻게 연관 짓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대부분 제국주의에 대해 논하는 글이 많아서 좀 편향된 느낌을 받았거든요.  」

「  확실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죠.  」

<번역의 이론>을 쓰는 과정에서 민우도 많은 참고문헌을 활용했다. 류타로의 지적은 정확했다. 잠시 고민하던 민우가 답을 내놨다.

「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번역주의가 대세였죠.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서양 세력과의 충돌이라는 외적인 면에서 번역의 기원을 찾는 건 조금 부족해요. 그 이전에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

「  언어적 감수성이라면······ 역시 한자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하긴, 한국도 왕조 시절에는 한자를 많이 썼겠네요.  」

「  그렇죠. 자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인지해야 번역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거든요.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가 대표적인 인물이죠.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한 최초의 인물로 꼽히니까요. 언어적 정체성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

「  그런 논의가 한국에서도 되고 있나요?  」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그렇게 편협하진 않아요. 재미있는 연구들도 많고요. 기회가 되면 한번 학회에 놀러 오세요.  」

민우는 류타로와 명함을 교환했다. 류타로는 벌써 비행기 티켓을 끊은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때 찻잔을 든 유이토 교수가 끼어들었다.

「  어렵게 오신 손님 그만 괴롭히거라. 그 정도 공부는 도서관에서 해야지.  」

「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

민우는 두 손을 내저었다.

「  아뇨. 아닙니다. 사실 교수님께서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셔서 조금 심심한 점은 있었어요.  」

「  하하하. 그러셨습니까?  」

소탈하게 웃은 유이토 교수가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그가 말했다.

「  많은 말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있을 테니까요. 다만······ 요즘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

「  어떤 부분이 아쉬우셨나요?  」

「  세상이 변하고 대학이 변해도 사람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서요. 인간성에 대해 생각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

민우도, 류타로도 유이토 교수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말의 무게가 달랐다.

유이토 교수가 찻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  늘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져라. 그래야 눈도, 마음도 맑아져 세상을 더 깨끗하게 볼 수 있다고. 뭐, 여기에 있는 이시카와 군에게 기대하는 바도 있습니다만. 박 선생님께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

그러지 않았다면 민우가 동경대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유이토 교수는 민우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  험난한 세상이지만······ 선생님께서도 순백의 학자로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식의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혀 주시지요.  」

문득 명인대의 표어가 떠올랐다. Veritas Lux Mea. 풀어쓰면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이었다.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럼에도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다만, 막연한 미래를 준비하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 * *

까똑!

초저녁, 연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주는 레스토랑 이름과 지도를 함께 보냈다.

‘도쿄 타워 근방인가? 음,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네. 빨리 저녁 먹고 와서 류타로 선생님하고 한잔 해야겠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두 남자는 동경대 근처의 술집에서 한잔 하기로 약속했다. 아쉽게도 유이토 교수는 다음을 기약했다.

숙소를 나선 민우는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해가 저물어 밖이 컴컴했다. 하지만 서울이 그렇듯 도쿄도 불빛이 환했다.

민우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연주의 이름을 말하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도쿄 타워를 배경으로 환상적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주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불이라도 났냐?”

“아, 오셨어요?”

연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나 좀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한 민우는 외투를 벗어 옆쪽 의자에 걸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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