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 < 88장. 도쿄의 밤 (1) >
민우는 일본에 오기 전에 유이토 교수에 대한 정보는 물론 저서에 대해서도 꼼꼼히 조사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했다. 문학 연구자들이 대개 그렇듯 일본근대사는 물론 근대 철학을 망라하는 저서를 발간하여 명성을 쌓은 노학자다.
하지만 민우는 그의 저서를 읽을 때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텍스트가 기본에 지나치게 충실했기 때문에 흥미를 유도하는 부분이 약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단한 분이긴 해. 다방면에서 그만큼의 깊이를 만들어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학자마다 스타일이 다르기도 하고.’
민우는 그의 고루함을 개성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이곳에 오기 전 서지훈 교수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다른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유이토 교수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민우는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고서가 많았다.
책을 좋아하는 민우에게는 숨겨진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었다.
‘한 이틀 정도 여기서 캠핑하면 소원이 없겠는데. 유이토 교수님 제자들은 좋겠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민우는 책을 꺼내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는 와중에 차가 준비되었다. 옆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 박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
다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기가 났다. 민우는 낡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유이토 교수도 자신의 찻잔을 채우고 맞은편에 앉았다.
「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
민우는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이토 교수의 책상이었다.
허전했다. 으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 곧 민우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 교수님 연구실에는 컴퓨터가 없네요. 」
「 그렇습니다. 찾아 온 손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하는 단골 질문이기도 하지요. 」
유이토 교수는 멋쩍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 흔한 컴퓨터 대신 원고지와 메모장, 그리고 오래된 만년필이 보였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장면에 감탄하며 민우가 물었다.
「 불편하지 않으세요? 책이나 논문을 쓰려면 아무래도 컴퓨터가 편할 텐데. 편집하기에도 편하고요. 」
「 아직은 원고지가 좋습니다. 종이의 감촉이 느껴져야 영감이 떠오른다고 해야 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원고를 넘길 때마다 출판사 직원들이나 학회 관계자들이 대단히 난감해하긴 합니다. 」
「 확실히 그렇겠네요. 」
민우는 강예진을 도와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일을 했었다. 만약 발표자가 논문을 파일이 아니라 원고지로 써서 줬다면 낭패였을 것이다.
그래도 민우는 이해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것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훨씬 빠르니까. 그가 한창일 때는 원고지를 쓰던 시절이리라.
「 참, 제 지도교수님께서 교수님께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
「 지도교수님 존함이? 」
「 명인대에 계시는 서지훈 선생님입니다. 」
「 아아, 그분의 제자였군요. 」
유이토 교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쩐지 박 선생님의 저서에서 그분의 흔적이 느껴지더군요.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이지요. 푸른색이 쪽에서 나오듯이. 하지만 때로는 쪽빛보다 더 푸르게 되는 것도 있지요. 」
청출어람(靑出於藍)에 관한 이야기였다.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표현이었다. 은근한 칭찬에 민우는 기분이 좋았다.
「 그런데 서지훈 선생님과 자주 연락하시나요? 」
「 에······ 가끔 서신을 주고받는 정도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소통 방법이 있잖습니까. 굳이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논문을 읽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
「 그렇긴 하네요. 」
그렇게 두 사람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눴다.
유이토 교수는 매번 집으로 찾아오는 길고양이가 있는데 요즘 잘 보이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평생 핸드폰을 쓰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며느리가 선물해 준 것을 억지로 들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일평생 학문의 길을 걸었음에도 단 한 마디도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나 주변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참 신기한 분이네.’
민우는 감탄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여유와 품격이 느껴졌다. 민우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민우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여러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에게 지식을 얻었다면 유이토 교수님께는 인생을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야. 서지훈 선생님이 직접 확인하고 오라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확실히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를 고루하다고 평할 만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선입견을 지우고 유이토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슬쩍 창밖을 바라본 유이토 교수가 화제를 바꿨다.
「 박 선생님은 초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예? 」
뜬금없는 초밥 이야기에 민우가 깜짝 놀랐다. 그 반응을 보고 유이토 교수가 웃었다.
「 하하하. 제가 너무 맥락 없이 짚었군요. 잘 드시냐는 질문입니다. 」
「 잘 먹습니다. 안 그래도 본고장에 왔으니 한번 먹어보려던 차였어요. 」
「 근처에 단골집이 있습니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까요? 손님이 오면 늘 따뜻한 정종도 함께 대접을 하는 습관이 있어서 말입니다. 」
「 좋네요. 기대됩니다. 」
「 그럼 가시지요. 」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문학부 건물을 등지고 걸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어느덧 주변에 어스름이 깔렸다. 간간이 지저귀던 새들도 돌아갔는지 고요했다. 두 사람이 쪽문을 나서자 때맞춰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길을 걸으며 유이토 교수가 물었다.
「 내일 강연 준비는 잘되셨습니까? 」
「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힘을 주면 어색할 것 같아서요. 」
자신이 쓴 책에 대한 강연이라 특별한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도 한국에 놓고 왔다.
「 그런데 교수님. 제 강연은 어떻게 열리게 된 겁니까? <번역의 이론>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관심을 받으니 조금 이상해서요. 」
「 제자인 이시카와 군이 소개를 해줬습니다. 알고 보니 동경대 학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책이더군요. 」
민우의 책은 번역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만큼, 다양한 시선에서 읽을 수 있었다.
유이토 교수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차분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 그런데 내일 강연은 한국어로 하신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회화에 전혀 문제가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예전에 유이토 교수와 처음 통화했던 일이 떠올랐다.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말했다. 학자로서의 민우라면 조금 다르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
「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강연 영상을 한국에서 교재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일본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고, 동경대 대학본부에서 동시통역이 가능하다고 하셔서 편한 쪽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
「 그랬군요. 」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자 민우는 힐끗 그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며 민우가 물었다.
「 역시 강연은 일본어로 하는 게 좋을까요? 」
「 그건 박 선생님의 선택입니다. 교재로 쓰신다고 하셨다면 나름의 계획이 있으신 거니까. 하지만 박 선생님의 <번역의 이론>을 읽은 독자의 입장으로는······. 」
저편으로 단골 초밥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이토 교수는 간판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곤 이어 말했다.
「 그래요. 그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번역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은 이치를 담고 있었지요. 」
그 한마디에 민우가 걸음을 멈췄다.
멍한 시선이 유이토 교수의 뒷모습을 담았다. 어느새 앞서간 노신사는 작고 초라한 초밥집의 문을 열고 있었다.
민우의 부재를 뒤늦게 깨달은 유이토 교수가 돌아보았다.
「 박 선생님? 」
「 아, 죄송합니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우가 재빨리 합류했다.
* * *
다음 날, 민우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다시 동경대로 향했다. 강연은 캠퍼스 내에 위치한 컨퍼런스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입구부터 강연을 소개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동경대 캠퍼스 곳곳에 붙어 있어 학생들이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컨퍼런스홀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가만히 서서 포스터를 내려다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소. 눈길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막 컨퍼런스홀로 들어가려던 민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연주?”
민우가 그 이름을 불렀다. 돌아선 연주가 꾸벅 인사했다. 마치 청문대 캠퍼스에서 마주친 것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이제 오셨어요? 전 벌써 들어가 계신 줄 알았는데.”
“닮았다 싶었는데 진짜였네. 여긴 어쩐 일이야? 온다는 얘기 없었잖아.”
“업무 차 왔어요.”
연주는 강연 벤치마킹을 하려고 왔다고 덧붙였다. 그럴싸한 구실에 민우는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온 연주가 민우를 채근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요. 오빠 목 잠기면 안 되니까.”
“그래.”
일단 두 사람은 컨퍼런스홀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행사장 위치를 찾지 않아도 사람들을 따라가면 될 것 같았다.
연주가 민우의 안색을 살폈다.
“근데 잠 잘 못 주무셨어요? 피곤해 보이셔요.”
“좀 설쳤어.”
“숙소가 불편하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어젯밤에 마신 술 때문도 아니었다. 유이토 교수가 꺼낸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고민을 하느라 잠을 설친 것이다.
‘분명 내가 놓친 게 있긴 해. 책에서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썼으니 일본어로 강연을 하는 게 앞뒤가 맞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그때 민우의 눈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절로 시선이 향한 것이다. 그 학생들은 민우가 쓴 <번역의 이론>을 언급하며 한껏 기대감을 표했다.
「 진짜 좋은 기회라구. 이 책 두 번 읽었는데 정말 배울 게 많아. 질의응답 시간에 꼭 민우 씨한테 질문을 하면 좋겠어. 」
「 그럼 앞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아? 서두르자! 」
강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학생들. 시선을 돌린 민우는 또 다른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손에도 자신의 책이 들려 있었다.
「 문학부의 시미즈 교수가 박민우 씨를 설득했대. 나중에 우리 대학에 교환교수로 올 가능성도 있다는 소문이다. 」
「 소문 참 빠르군. 일본어는 잘한대? 난 한국어 모르는데. 」
「 일본어만 잘하겠어? 영어도 프랑스어도 수준급이라더라. 」
귀를 기울이니 그런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신의 대한 이야기가 하나둘 쌓이자 보일 듯 말 듯 흐릿하던 것이 보다 선명해졌다.
‘그런 거였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은 민우는 걸음을 멈췄다.
‘학생들은 청문대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 오늘 강연에 온 학생들도 어떻게 보면 내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
아마 어제 유이토 교수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그것이었을 터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결정은 끝났다. 돌아선 민우는 연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연주야. 미안한데 오늘 촬영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촬영팀 철수시켜 줘.”
“예? 갑자기 왜요?”
“계획이 바뀌었어. 완전히.”
민우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연주가 불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고 연단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강연회 사회 겸 소개역은 유이토 교수가 맡았다. 강연 시간이 되자 유이토 교수는 민우를 소개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고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에게 꾸벅 인사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민우가 유이토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 멋진 소개 감사합니다. 오늘 강연은 일본어로 하겠습니다. 진행팀에 동시통역은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겠어요? 」
「 그거 기쁜 소식이군요. 저도 아래에서 듣고 있겠습니다. 」
「 교수님. 」
민우는 연단을 내려가려던 유이토 교수를 불렀다. 그가 돌아서자 민우는 잠시 마이크 전원을 껐다. 시작 전에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 어제 초밥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
민우는 초밥을 말했지만, 그 단어 안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걸 모를 유이토 교수가 아니었다.
「 입맛에 맞아 다행입니다. 」
「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식사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유이토 교수는 연단을 내려갔다.
곧 박수가 잦아들고 강당이 고요해졌다. 무대 앞에 선 민우는 다시 마이크를 켰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긴장감에 가슴이 격동했지만, 민우는 이 무대를 즐기기로 했다.
「 정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셨군요. 살짝 떨리는데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박민우입니다. 」
또다시 커다란 박수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오늘 모인 수백 명의 청중을 위해 민우는 능숙한 일본어로 강연을 시작했다. 박민우라는 낯선 이름이 일본의 심장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