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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37화 (237/500)

237화 : < 87장. 백발의 노신사 (5) >

일본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 채점을 모두 마친 민우는 성적을 산출했다. 우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점수, 그리고 출석과 수업태도 등을 합산해서 엑셀로 정리했다.

민우는 이름과 총점을 비교해 보며 한번 쭉 훑어 내려갔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다.

‘이 학생은 수업 열심히 듣던데 성적이 별로 안 좋네. 지필시험에 약한 친구인가? 음, 시험 쪽에서 점수가 안 좋았구나.’

민우도 학부와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 왔다. 그중엔 리포트에 강한 친구도 있었고 시험에 강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걸 몸소 겪으며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시험지 한 장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아. 뭔가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학칙과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마음대로 무언가를 바꾸기는 어렵다. 비전임교수라는 애매한 포지션도 한몫했다.

아쉬운 마음을 품으며 민우는 청문대 교수정보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리고 합산한 점수 순대로 성적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민우의 눈매가 좁아졌다.

‘여기는 상아대보다 더 허들이 높구나. A학점은 몇 명 주지도 못하겠네. B학점도 꽤 비율이 낮고. 성적 때문에 연락하는 학생들이 꽤 있겠어.’

민우는 어렴풋이 그렇게 예상했다. 표정이 조금 곤란해졌다.

거의 모든 대학이 상대평가를 실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점을 낮게 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지금처럼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좋은 학점을 주고 싶었다.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 하지만 학칙대로 학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학점당 제한 인원이 채워지면 입력이 불가능하게 된다.

‘요청이 오면 피드백을 잘 해주는 수밖에 없겠는데. 채점을 꼼꼼하게 해서 그나마 다행인가?’

그렇게 한참 동안 마우스를 클릭해서 성적을 입력한 민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번 검토한 뒤 승인 버튼을 눌렀다.

모든 성적 입력이 끝났다.

핸드폰을 꺼낸 민우는 ‘한국현대소설론’과 ‘번역의 이해’ 강의 단체 톡방에 공지했다.

― 지금 성적 입력을 마쳤습니다.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정정기간 중에 연구실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틀 후에 일본으로 출장을 가니 그 전에 오셔야 해요.

수많은 톡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반응은 다양했다. 느낌표를 연달아 찍는 학생들도,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입력한 학생도 있었다.

왠지 학부시절이 떠오른 민우는 핸드폰을 책상에 놓았다. 숫자를 많이 봐서 그런지 눈이 아팠다.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설마 바로 연락이 오진 않겠지? 녀석들도 좀 신중하게······.’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한숨이 나왔다. 높은 확률로 학생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번역의 이해 강의 들었던 김진이라고 하는데요.

불길한 예감은 역시 틀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민우는 기쁘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젊은 교수였다. 때문에 학생이 담당 교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잠시간의 통화 후, 민우는 학생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러니까 기말고사 성적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지요?”

―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답안지를 써서 그런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중간고사는 에이제로를 받았는데 최종 성적이 비제로라는 건 좀 이해가 안 가네요. 죄송한데 한번 다시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찾아와서 답안지 보면서 이야기 나눴으면 하는데. 시간 있을 때 연구실로 오세요.”

― 지금 가도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번역의 이해’ 기말 시험 답안지를 뒤적여 김진 학생의 것을 미리 찾아놓았다.

‘78점.’

확실히 기말 성적이 좋지 않았다. 곧 노크가 들리고 남학생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까 전화한 김진 학생이죠?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아요.”

민우는 시험지를 테이블에 놓고 학생과 마주 앉았다. 학생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답안지를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가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답안을 다시 살펴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채점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 혹시······ 가장 점수를 높게 받은 답안지를 볼 수 있을까요?”

“잠깐만 기다려요.”

시험 성적순으로 답안지를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가장 잘 쓴 답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민우는 맨 위에 놓인 답안지의 이름과 학번 부분을 종이테이프로 가리고 학생에게 주었다.

정독을 끝낸 학생이 문제를 제기했다.

“제 답안지랑 전체적으로 비슷한 거 같은데요? 오히려 이 답안지의 결론 부분은 교수님께서 가르쳐 준 것과 어긋나 있는 것 같은데요.”

“그 부분이 승부처였어요. 그 답안을 쓴 학생에게는요.”

민우의 말에 학생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교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쓴 제 쪽이 더 잘 쓴 답안 아닙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민우는 가장 잘 쓴 답안과 학생이 쓴 답안을 나란히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르쳐 준 그대로 쓴다는 건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는 증거이긴 합니다. 그것 자체로 좋은 점수를 주는 교수님들도 있겠죠. 하지만 대학은 중고등학교와는 다르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의미가 없죠.”

민우의 손가락이 잘 쓴 답안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학생은 다시금 그 부분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다.

민우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물론 자신만의 생각에 논리가 없다면 허무맹랑한 주장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이 답안을 쓴 학생은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어요. 그 근거로 쓰인 게 부교재입니다. 김진 학생은 수업계획서에 제가 써 둔 부교재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거기까진······.”

“이 친구는 그걸 읽었고, 답안에 자신의 의견을 섞어 쓴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깐 이쪽을 볼까요? 여기에 서술된 내용은 부교재도 아닌 전혀 다른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이에요.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책이죠. 즉,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공부를 했다는 증거인 겁니다. 이 이상의 노력과 지식을 보여준 학생은 없었고, 그래서 이 답안지를 쓴 학생이 기말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게 된 겁니다.”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설명이었다.

학생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과 실망감이 섞인 표정은 덤으로. 민우는 그 심정이 어떤지 잘 알았다.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민우는 최고점을 받은 답안지를 치우고 연구실에 찾아온 학생의 답안지만 테이블에 남겼다. 기왕 시작한 피드백 확실하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다시 보면 김진 학생의 답안도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어요. 이쪽에서 이쪽까지 핵심 개념을 연역식으로 풀어낸 건 좋았습니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어요. 전체적으로 정서법도 잘 지키고 문장도 알기 쉽게 잘 쓰는 거 같아요.”

그제야 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싱긋 웃은 민우는 허리를 펴고 마무리를 했다.

“조금 더 본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보다 좋은 답안을 쓸 수 있겠죠? 리포트도 논문도 마찬가집니다. 상대평가가 아니었다면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었겠죠. 이번엔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음 기회에 좀 더 열심히 해보도록 해요.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름 기억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바쁘신데 죄송했습니다.”

찾아온 학생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민우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댔다. 그때 작업 중이던 이다혜가 다가왔다.

“와, 정말 친절한 교수님이다. 가만 듣고 있다 보니 좀 아쉽네요. 저도 대학 다닐 때 오빠 같은 교수님 만났으면 인생이 좀 바뀌었을 텐데.”

“인생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건줄 알어?”

이다혜는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말을 하면 지는 법이 없다. 눈앞의 선생은.

“그런데 안 힘드세요? 그렇게 세세히 짚어주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학생들이 찾아올 삘인데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 그래도 이건 학생들의 권리야. 매년 천만 원 넘게 부어가면서 대학 다니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다른 교수님들은 그렇게까지 안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안 한다고 해서 나도 안 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리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마라. 좋은 선생들은 많아.”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핸드폰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어디 가셔요?”

“도서관에.”

“엇, 제가 다녀올게요! 안 그래도 이따 책 빌리러 가야 하거든요.”

“내 공부하러 간다. 저녁은 너희들끼리 먹어. 좀 오래 있어야 할 거 같으니.”

민우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급히 돌아왔다.

“응? 뭐 놓고 가셨어요?”

“두 번째 민원인이 오신댄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

민우는 답안지 꾸러미를 뒤적였다. 그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맺혔다. 남희석이 왜 필사적으로 그의 수업을 들으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 * *

이틀 후, 민우는 나리타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미국과 영국에 다녀온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안내인이 없어도 숙소에 무사히 짐을 풀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좀 남긴 했는데 미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헤맬 수도 있으니까.’

민우는 숙소에서 나와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잡았다. 숙소는 동경대 근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혼고 거리를 걸으며 좌측에 늘어선 동경대 공학부 건물을 살펴보았다. 가로수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건물도 현대식이라 멋스러웠다.

‘나무가 거의 건물만큼 높게 자랐구나. 은근 건물하고 잘 어울리네. 잎이 좀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겨울에 와 가지고.’

곧 짧은 건널목이 보였다. 그 너머로 쪽문이 나 있었다. 이미 지도를 파악하고 있었던 민우는 신호등을 건너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으니 산시로 연못(三四 郎池)이 나왔다. 민우는 지도를 떠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곧 목적지인 문학부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유이토 교수님이 계시는 건가.’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던 민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이나 넘게 남았다.

‘너무 일찍 왔네. 근처에서 시간 좀 보내다 들어가야겠다. 좀 춥긴 한데 캠퍼스 구경 좀 할까?’

민우는 문학부 건물을 많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초겨울이라 풍광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그때 누군가 민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저 사람은······.’

목재 벤치에 앉아있는 백발의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민우는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때마침 노신사도 고개를 들어 민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백발의 노신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사진에서 본 유이토 교수와 매우 닮은 사람이었다. 민우는 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노신사의 미소가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  혹시 시미즈 유이토 교수님 아니십니까?  」

「  맞습니다. 잘 알아보셨군요. 한국에서 온 박민우 선생님이시지요?  」

「  예.  」

「  환영합니다. 시미즈 유이토입니다.  」

유이토 교수는 민우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명문대 교수라는 사람이 이 정도로 정중히 나올 줄은 몰라 민우도 엉겁결에 허리를 굽혔다.

「  그나저나 일찍 도착하셨군요. 연구실로 바로 오셨더라면 헛걸음 하실 뻔했습니다.  」

「  초행길이라 숙소에서 일찍 나왔어요. 늦는 건 실례니까요.  」

「  숙소는 마음에 드십니까?  」

「  잠깐 머물다 가기엔 좀 아까운 곳이더라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자, 이쪽으로.  」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문학부 건물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종 목적지는 유이토 교수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오래된 책이 가득한 곳이었다. 고서 특유의 향취가 느껴졌다. 들어오자마자 민우는 명인대 강철훈 교수의 연구실을 떠올렸다.

「  차는 어떤 걸 좋아하시지요?  」

멍하니 책을 구경하던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유이토 교수는 고급스러운 다기(茶器)를 들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커피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  따뜻한 거는 아무거나 좋습니다.  」

「  마침 어제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그걸 대접하지요. 그리고 책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보셔도 됩니다. 손때 묻은 책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지요.  」

「  아, 감사합니다.  」

마치 속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눈에 띄는 책을 꺼냈다. 곧 구수한 차향이 연구실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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