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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36화 (236/500)

236화 : < 87장. 백발의 노신사 (4) >

“시미즈 유이토 교수라고? 문학부에 있는?”

“예. 아마도요.”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서지훈 교수가 은근한 미소를 짓더니 라이터를 당겼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아 민우가 물었다.

“아는 분이세요?”

“잘 알지. 학회에서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했었고. 쉬운 양반은 아닌데 어떻게 연락을 받긴 했구나.”

“그러셨군요. 근데 유이토 교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시대에 뒤쳐진 고루한 학자.”

민우는 깜짝 놀랐다.

동경대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다. 사회적 지위는 물론 학문적인 업적도 대단할 것 같았는데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가였다.

서지훈 교수가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는 게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의 평가고, 한편으로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지.”

“뭔가 평가가 되게 극명하네요.”

“그만큼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 사람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의 눈에도 시대에 뒤쳐진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보일까 싶었던 것이다.

그때 민우는 유이토 교수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실은 교수님과 통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민우는 유이토 교수가 말했던, ‘순수한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조건을 걸었던 것과 그것에 대한 유이토 교수의 반응까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 서지훈 교수는 꽁초가 된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겼다.

“강연에 조건을 거는 게 순진한 의도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분은 네가 어떤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까. 뭐 쉽게 말해 그런 게 아닐까? 순수한 학문의 영역에 이해관계가 끼어드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걸지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에 민우는 묘한 반발심이 일었다. 아까 서지훈 교수가 표현한 그대로 고루한 접근 방식으로 느껴졌다.

“그 부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목표도 있으니까요. 이름을 알리고 대학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알아. 네가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럼요?”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내가 보기에 이상과 현실이 상충하는 부분인 거 같은데······ 그건 네가 가서 직접 확인하고 와.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볼 만한 테마니까.”

서지훈 교수의 조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이토 교수에게 안부 좀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 * *

유진태 비서실장은 잠시 짬을 내 연주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의 손엔 연주가 좋아하는 간식거리, 비싼 메이커의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아이스크림도 함께였지만 날씨가 추워 초콜릿만 준비했다.

연주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녀에게 있어 민우 다음으로 반가운 사람이었다.

“뭘 이런 걸 다 사왔어? 바쁠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연주는 신이 나 보였다. 최근 일이 늘어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달달한 걸 찾는 빈도가 늘었다.

“지금쯤이면 드시고 싶지 않으실까 해서 사왔습니다. 근처에 볼일도 있었고요.”

“마침 딱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건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생각 날 때마다 유진태 실장은 일을 만들어 연주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초콜릿을 입에 넣고 즐거워하는 연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때 유진태 실장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 일본 스케줄 있으시던데.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동경대에 행사가 있어서 가보려고.”

“행사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의 업무 특성상 해외에 나갈 일은 별로 없으니까.

“민우 오빠가 동경대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어. 우리 촬영팀도 파견할 거고,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출장가려는 거야. 동경대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거든.”

“그러셨군요. 벤치마킹입니까.”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라는 말은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벤치마킹이 목적이 아니라 민우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잡은 일정이 분명했다.

“그럼 박민우 선생님과 같이 움직이시는 겁니까? 항공권은 한 장만 준비된 것 같던데요.”

“아니. 나는 따로 움직여야지. 오빠는 동경대에서 다 준비해 주기로 했어.”

“그렇군요. 제가 가볼 만한 장소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교환학생 시절에 1년 정도 체류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괜찮아. 여행 가는 것도 아닌걸.”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시려는 거 다 압니다. 박민우 선생님께.”

역시 숨길 수 없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연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측근인 유진태만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 출판기념회 이후로 그녀가 결심을 확고히 했다는 것을 짐작하던 차였다.

“어떻게 알았어?”

“출판기념회 끝나고 저택에서 혼자 술을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잖습니까. 술도 잘 못 드시는 분이. 그래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죠.”

“수빈 언니 내년에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오빠랑 결혼한다고 하더라.”

출판기념회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 말에 유진태 실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아냐.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니까.”

연주는 애써 웃었다.

연애도 수학 문제처럼 쉽게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럼 굳이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더 상처만 받으시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군요.”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최근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잡념을 잊으며 일에 몰두하려고 했지만, 연주는 생각을 바꿨다.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내버리면 나중에 두고두고 오늘 일을 후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수빈 언니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미래의 나에게 미안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이건 내 인생이니까.”

연주는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말했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왔는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나 너무 이기적인 걸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가씨의 선택이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건 아가씨 인생이니까요. 그런데 아가씨 성격상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오빠 불러내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올지도 몰라.”

“지은 님께 도움을 청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도 없는 카드 쥐어주면 바로 넘어올 거라는 실없는 소리 하는 애한테 무슨 도움을 청해?”

유진태 실장이 피식 웃었다. 연주도 말해 놓고 어이가 없었는지 따라 웃었다. 덕분에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좀 풀렸다.

“아무튼, 더 늦기 전에 매듭을 확실하게 지으시려는 거군요.”

“응. 맞아.”

“예전 같았으면 가슴앓이만 하다 넘어가셨을 거 같은데 이제 아가씨도 어른이 다 되신 모양입니다.”

“좋은 건가?”

“좋은 거지요.”

온실 속에서만 자라던 예쁜 꽃이 세상에 나와 자생의 방식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도, 유진태 실장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서일까. 연주가 농담조로 화제를 돌렸다.

“있지. 잘 찾아보면 어딘가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제 깨끗이 털어내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있습니다.”

확신에 찬 어조였다. 평소와는 다름을 느낀 연주가 그를 응시했다.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유진태 실장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가씨는 매력적인 분이시니까요. 어딜 가든 인기 좋으시잖습니까?”

“뭐야. 싱겁게.”

그때 핸드폰이 울리더니 톡이 하나 왔다. 민우에게서 온 톡이었다. 내용을 읽은 연주는 서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오빠가 잠깐 보자고 하네.”

“잘 다녀오십시오.”

“유 실장은 스케줄 없어?”

“저도 슬슬 가야지요. 어디보자······ 아직 시간이 좀 남았네요. 여기서 잠깐 시간 보내다 가도 됩니까?”

“그래. 그럼.”

연주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태 실장은 읽던 잡지를 덮었다.

“초콜릿, 잘 먹을게.”

미소를 지은 유진태 실장은 가볍게 묵례했다.

* * *

마침 민우의 연구실은 시끌벅적했다. 동경대에서 초청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문과 류재혁 교수와 이창호 교수가 달려온 것이다.

이창호 교수가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대학도 아니고 동경대에서 초청이 왔다니. 이거 놀라운 일이네요! 거기 은근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배타적인 곳이잖아요. 자존심도 세고.”

“그렇지. 뭐 거기뿐인가. 언론도 호의적이진 않지. 노벨상 시즌만 대면 조롱하기 일쑤니까. 그 와중에 박 선생이 하나 큰 건을 해 줬구만.”

“공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다면 저도 의심을 했을 겁니다. 이번에 낸 책 반응이 그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거든요.”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이미 민우는 싱가포르 대학을 사칭한 메일에 한 번 당한 전력이 있었으니까.

이창호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가만 보면 박 선생님은 배경도 화려하고 실력도 대단하네요. 안 그렇습니까? 이러다 청문대에서 스타 교수가 되시겠는데.”

“빨리 국문과로 모셔와야겠어. 가만히 있다가는 교양학부에 좋은 일만 다 시키겠군.”

“하하하.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십쇼. 이러다 멀리 날아가겠습니다.”

“멀리 날아가면 좋은 일이지. 다음엔 일본이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으로 한번 날아가 봐.”

류재혁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겸손을 표했다.

하지만 류재혁 교수의 마지막 말은 귀담아 들었다. 국문과로 모셔오겠다는 건 허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에 공문을 받은 것은 국문과가 아니라 교양학부였다.

만약 반대로 됐다면 류재혁 교수도 국문과 주임교수로서 목에 힘 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학과의 업적으로 기록되니까.

류재혁 교수가 물었다.

“다음 주에 출국이지? 그럼 한 사나흘 머물다 오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타이밍도 좋구만. 마침 2학기도 다 끝났으니 휴강하지 않아도 되고. 딱이야. 딱.”

휴강을 하게 되면 보강을 해야 하고, 또 강의평가에도 영향을 미쳐 부담스럽다. 그래서 민우는 일부러 강연 날짜를 늦게 잡았다.

“아무튼 잘하고 와서 우리 학교 이름 좀 널리 알려주시게.”

“예. 선생님.”

그때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연주가 반색하며 교수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들.”

“이야,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셨죠?”

“저야 늘 잘 지냈죠. 제가 방해한 건가요? 이따 올게요.”

“아닙니다. 말씀 나누시지요. 이 선생. 우린 이만 가지.”

류재혁 교수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이창호 교수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섰다. 덕분에 민우와 연주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좀 기다리지 그랬어? 내가 가려고 했는데.”

“그게 뭐 중요한가요. 출국 준비는 잘하고 계세요?”

“준비할 것도 없어. 그냥 몸만 가면 되니까. 오래 체류할 것도 아니고.”

“간 김에 여행도 하면 좋잖아요.”

“그럴 시간이나 있으면 좋겠다. 어휴, 프로젝트다 미팅이다 잔뜩 밀려서 바로 와야 할 거 같아. 요즘 자는 시간도 줄였어.”

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엄살을 부렸다. 그래도 잘 해낼 것을 알기에 연주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수들은요?”

“희석이는 기말시험 치러 갔고 다혜는 도서관에 갔어. 왜, 저녁 맛있는 거 사주게?”

농을 던진 민우는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를 가지고 돌아왔다. 생전 처음 보는 저자명과 도서 제목들이 정리된 서류였다.

“이건 뭐예요?”

“아랍 쪽 추천 도서 리스트야. 재미있는 일을 한번 벌여볼까 해서.”

“기대되네요. 어떤 일인지.”

“폴라리스도 슬슬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제3세계 문학에 집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침 요즘 아랍 출판 시장이 각광을 받고 있더라고. 그 리스트 가지고 아랍 쪽 주한대사관에 접촉해줄 수 있겠어? 상호문화교류 명목으로.”

“현지 출판사 컨택이나 실무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되는 거죠?”

“역시 정연주. 정확해.”

연주는 문제없다고 답했다. 자신의 정재계 인맥을 동원한다면 일도 아니었다.

“그럼 바쁘실 텐데 먼저 가볼게요.”

“잘 부탁해.”

연주는 자신의 일본행을 비밀로 하고 자리를 떴다.

민우는 다시 책상에 앉아 수북이 쌓인 답안지와 마주했다. 출국하기 전까지 이걸 다 채점하고 성적입력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컴컴해졌다.

‘유이토 교수님 연구물도 좀 읽어야 하는데. 무작정 가서 만나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학자에게 있어 연구물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과도 같다. 민우는 출국 전까지 유이토 교수의 주요 저작을 모조리 읽을 생각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채점부터 하자.’

심호흡을 한 민우는 빨간펜을 들고 답안지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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