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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35화 (235/500)

235화 : < 87장. 백발의 노신사 (3) >

교양학부 조교실에 들어온 민우는 바로 김문혜 조교에게 공문을 받았다. 그녀의 말대로 내용이 온통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명문대라 존심 세운다 이건가? 동경대면 한국어 하는 사람들 좀 있을 텐데 알아듣게 좀 보내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작은 해프닝 정도. 씨익 웃은 민우는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이미 예전에 <오멜라스의 마녀>를 번역하여 국내에 히트를 친 바 있다. 루카치의 안경이 없어도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었다.

곧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조금 의외의 내용이었다.

‘강연 초청이네. 이번에 쓴 책이 벌써 그쪽에서 화제가 된 건가?’

공문에는 민우의 저서 <번역의 이론>이 언급되어 있었다. 저자의 명저를 널리 알리고 대학 구성원에게 유익한 강연을 열고 싶다는 게 공문의 요지였다.

별로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은 아니었다. 민우도 그간 인문학 강연 등 여러 가지 일로 강연 요청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미사여구가 쓰였다.

‘생각보다 빠르다. 뭔가 계기가 있었나?’

민우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번역의 이론>은 한중일 3국에 동시 출간되었다. 실제 출간일을 따지면 일주일이 좀 넘었는데 일이 빨리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때문인가?’

확실히 번역 쪽으로는 프리미엄이 있는 타이틀이긴 했다. 게다가 번역가로는 아시아 최초 수상이었다.

‘그때 좀 시끄럽긴 했어.’

민우의 수상이 결정된 이후 중국과 일본 언론은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특히 번역 강국으로 알려진 일본은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

중국은 향후 30년간 따라갈 수 없다고 자조한 반면, 일본은 잠시 주춤했을 뿐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상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도 있었다.

아무튼 잔뜩 민감한 상황에서 민우의 통합 번역이론서가 출간됐다. 그 맥락을 고려한다면 빠른 반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건 그렇고 강연은 하는 게 좋겠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준비도 철저히 했으니 수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강연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굳이 서지훈 교수에게 허락을 구할 것까진 없다.

‘그래도 하게 됐다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지. 주의해야 할 점이나 그런 걸 들을 필요가 있으니까.’

민우는 일본의 학계가 어떤 분위기인지 거의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라면 다르다. 그는 아시아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학자니까.

정리를 끝낸 민우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김문혜 조교가 나섰다.

“교수님. 무슨 공문이에요? 한자 읽어보니 강연 어쩌구 하는 거 같던데.”

“제대로 봤어. 강연 요청 공문이다.”

“우와! 그럼 진짜 동경대에서 교수님 초청한 거예요?”

“그래.”

민우는 가벼이 웃으며 공문을 복사기에 돌렸다. 두 부를 복사한 다음 원본을 김문혜 조교에게 건넸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우의 지시를 기다렸다.

“답신 보내줄래?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하다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내 연락처 남겨 줘. 그럼 담당자가 나한테 연락을 하겠지.”

“그게 교수님. 제가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당연히 한국어로 보내야지. 자부심을 가져. 우리 대학도 훌륭한 대학이야. 그쪽에 일방적으로 맞춰줄 필요 없어.”

“아, 옙!”

민우의 한마디에 청문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중이기도 한 김문혜의 표정이 밝아졌다.

민우는 동기부여를 하는 것에 굉장한 소질이 있었다.

그가 교양학부에 부임한 이후로 학부 및 대학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더 열심히, 긍정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대로라면 학교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잘 부탁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 당분간은 폴라리스 연구실에 있을 거니 헛걸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수고.”

민우는 특유의 밝은 미소를 남기곤 조교실을 나섰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복사본을 들고 바로 연주의 사무실을 찾았다. 때마침 연주는 사무실에 앉아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야. 팔자 좋네. 책 읽을 시간도 있고.”

“오셨어요?”

연주가 웃으며 책을 덮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민우가 이번에 출간한 <번역의 이론>이었다. 민우는 자리에 앉으며 다시 농을 던졌다.

“의외다? 출간되자마자 읽어줄 줄 알았는데 이제야 읽다니.”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 번째 다시 읽는 중이에요. 읽을 때마다 뭔가 새로운 걸 깨닫게 돼서요.”

“야,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진짠 줄 알잖아?”

“진짠데.”

설마 진짜일 줄이야.

연주는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 사실일 것이다. 허탈하게 한숨을 내쉰 민우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즘 왜 안 보였어? 사무실에도 잘 없는 거 같던데.”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집에 문제라도 있어?”

“아아뇨.”

연주는 귀엽게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모든 건 이수빈 때문이었다. 출판기념회 때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의욕이 완전히 꺾인 것이다.

민우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졌다.

“그럼 무슨 문젠데?”

“아무것도 아녜요. 신경 쓰지 마세요.”

뭔가 민감한 문제일까 싶어 민우는 질문을 그만 두었다. 대신 방금 복사해 온 공문을 연주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동경대에서 강연 초청이 왔어. 이번에 출간한 책 때문에. 그래서 상의 좀 하려고.”

연주는 빤히 공문을 읽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했다. 한자로 대강 의미를 짐작할 뿐, 일본어는 그녀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내용은 별거 없어. 중요하지도 않고. 강연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할 생각인데 청문대에서 촬영팀 지원 좀 해줄 수 있나?”

“촬영이라면 동경대에서도 하지 않을까요?”

“못하게 할 거야.”

단호한 한마디에 연주가 살짝 놀랐다.

“그걸 조건으로 강연 딜 해보려고. 영상물에 대한 권한은 청문대가 갖는 걸로.”

“촬영팀 붙여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쪽에서 그 조건을 받아줄까요?”

“목마른 사슴이길 바라야지.”

민우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동경대 측에서도 강연 유치에 신경을 쓰지 영상 촬영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을 것이다.

한편 연주는 궁금했다. 분명 민우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 같았다. 그와 오래 지냈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거예요?”

“일단 강연은 한국어로 할 거야. 영상을 뜨고 자막 달아서 여기저기 뿌려야지. 반응 좋으면 다음 학기에 교양 강좌로 열 생각이다. 그럼 우리 출판문화원은 물론 대학 자체에도 힘이 실릴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굳이 그렇게 해야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청문대가 모교야.”

‘모교’라는 단어 하나가 연주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상아대에서 뺏듯이 그를 데려온 터라 애교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주가 굳게 결심하며 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드릴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세세한 거라도 빼놓지 말고 다 말씀하세요.”

“믿음직하네.”

“근데 오빠. 이 소식 상아대 유희윤 교수님이 들으면 꽤 배 아파하시겠는데요?”

연주도 유희윤 교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민우를 섭외하기 전에 치밀하게 조사를 했었으니까. 그가 상아대에서 국제번역학과를 책임지고 있고, 민우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민우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아. 생각해보니 그러겠네. 조성진 선생님 통해서 소문 살짝 흘려야겠다. 이번에 문광부 지원사업에서도 떨어져서 초상집 분위기라는데 기름 좀 부어볼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불쌍한데.”

“그런가? 하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되겠지.”

민우는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외투만 걸치고 바로 연구실을 나왔다. 이제는 서지훈 교수를 만나러 갈 차례였다.

* * *

명인대입구역에 도착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전화가 왔다. 해외 번호였다.

‘제임스 씨 일행은 아직 비행기 안일 테니 제외하고, 랑느 박사님인가?’

때마침 타야 하는 버스가 코너를 돌았다. 왠지 중요한 전화일 것 같아 민우는 버스를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동경대에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문혜 조교가 공문을 바로 보낸 모양이다.

「  전화로 처음 인사드려 송구합니다. 에······ 전 시미즈 유이토라고 합니다. 동경대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지요.  」

느긋하면서도 인자한 목소리였다. 일본어 특유의 정중한 느낌도 짙게 배어 있었다. 민우도 일본어로 응대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문은 잘 받았습니다.  」

「  좀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회신을 주시더군요. 감사합니다. 강연 건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고.  」

「  예. 말씀하시죠.  」

핸드폰 너머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유이토 교수가 꽤 신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12월 내로 선생님의 강연을 우리 대학에서 열고 싶습니다. <번역의 이론>을 주요 테마로 해서 말입니다. 여비는 모두 저희 대학에서 부담하지요.  」

「  날짜는 제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겁니까?  」

「  물론입니다.  」

하지만 민우는 유이토 교수를 배려해 동경대 측의 일정을 물었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2주 뒤 금요일이 적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그런데 교수님.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요.  」

「  조건······이요?  」

유이토 교수는 제법 놀란 것 같았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민우는 그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  예. 저희 청문대 촬영팀이 강연 영상을 찍을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후에 강연 영상은 독점적으로 저희가 이용을 할 수 있었으면 하네요.  」

「  그거라면 수용하겠습니다.  」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그제야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유이토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런데 강연에 조건을 거는 건 조금 의외로군요. 학자로서의 박민우 선생이라면 좀 다르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말입니다.  」

「  예?  」

「  책을 읽고, 또 선생님의 강연을 찾아보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뭐랄까······ 맞아요. 순수한 느낌. 마치 학문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새하얀 이미지를 느꼈지요.  」

유이토 교수는 차분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일까. 민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아닙니다.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군요. 늙은이 말에 너무 유념하지 마시길.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그럼 아까 논의한 그 날짜로 강연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

「  아,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유이토 교수가 말한 ‘순수한 느낌’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 *

서지훈 교수 연구실에 들어선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늘 그렇듯 커피 한잔을 컵에 채우고 소파에 앉아 공문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서지훈 교수가 깜짝 놀랐다.

“동경대에서 초청을?”

“예. 보시는 대로요.”

“설마 이거 전에 싱가포르 대학에서 온 메일 같은 건 아니지?”

민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팸 메일에 낚였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이름이 제이미 윌슨이었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하하! 그때 상아대 애들이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예린이가 아무 말 안하든?”

“됐습니다. 이 좋은 날에 왜 남의 흑역사 들춰내고 그러십니까?”

“짜식. 그런 걸로 삐치고 그래?”

서지훈 교수는 순식간에 공문을 다 읽었다. 일본어 해석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물으러 온 것 같진 않고. 자랑하러 왔구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일본 쪽 학계는 잘 몰라서 혹시 주의해야 하는 점이나 그런 게 있는지 여쭤보려고 왔죠.”

“사람 사는 데야 다 똑같지 뭐 다를 게 있나. 그런데 담당 교수가 누구야?”

“그게······ 시미즈 유이토 교수라고 하던데요.”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던 서지훈 교수의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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