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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34화 (234/500)

234화 : < 87장. 백발의 노신사 (2) >

이수빈이 출국한 다음 날, 민우는 프로젝트 미팅을 위해 지음사를 찾았다.

당연히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인문사회팀에 들러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들 민우를 환영해 주었다. 특히 이틀 전에 열렸던 출판기념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정은아 대리가 다음 책은 지음사와 계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박 쌤. 보란 듯이 성공하더니 치사하게 밀당을 하네?”

정은아 대리의 입담은 여전했다. 장철호 주임도 옆에서 그녀를 거들었다. 덕분에 무안해진 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밀당이 아니라 신중하게 판단하려고요. 조건보다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는 곳과 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지음사지.”

“하하하. 아직 책 내려면 멀었으니까 다음 기회에 얘기 나눠요. 원고 준비할 때 연락드릴게요.”

“철호 씨랑 친하다고 그쪽에 연락하지 말고 나한테 먼저. 알았죠?”

“알겠습니다.”

민우는 옛 동료들과 헤어지고 바로 15층으로 올라갔다. 출판기획실의 모든 직원들이 일어서 민우에게 인사했다. 마치 고위 임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위상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민우의 활약 덕분에 매출은 물론 국제적 인지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으니까. 윗선에서는 민우를 포섭하라는 지시가 하루가 머다 하고 내려오는 중이다.

민우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송승현 실장이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서 와요. 일찍 왔네요. 이쪽으로 앉아요.”

“넵.”

민우는 음료와 자료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도 세팅이 되어 있었는데 제임스 편집장의 자리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수빈 씨는 어제 잘 돌아갔나요?”

“예. 공항까지 배웅해 주고 왔어요.”

“아쉬웠겠네.”

“공항에 도착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차라리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다음 달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좋네요. 젊음이란.”

“실장님도 요즘 좋지 않으세요? 깨가 쏟아진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서지훈 선생님이 실장님 전화 받을 때만 매번 싱글벙글하세요.”

민우가 은근히 놀리자 송승현 실장이 얼굴을 붉혔다. 곧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자료를 보는 척했다. 마침 제임스 편집장이 들어와 다행이었다.

가볍게 인사가 오가고 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주재는 송승현 실장의 몫이었다.

「  우선은 민우 씨부터 번역 진척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

「  예.  」

민우는 ‘인문과학총서’의 번역 진행상황을 설명했다. 남희석, 이다혜가 조수로 들어온 이후로 가속이 붙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  당초 계획은 내년 6월에 1부 작업을 마무리하고 출간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조수 두 명이 합류한 이후로 작업 능률이 크게 향상됐어요. 현재 6권 작업 중이고 내년 1월에는 7권 작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  그럼 마감일을 더 당길 수 있나요?  」

송승현 실장이 영어로 물었다. 제임스 편집장 때문에 그녀도 영어를 사용했다. 해외파답게 발음이 좋고 의미가 정확했다.

「  적어도 5월에는 끝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정도 페이스로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4월에도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  변수가 없기를 빌어야겠군요.  」

「  오, 그거 반가운 소식입니다! 역시 민우 씨는 믿음직스럽군요. 우리의 야심작을 하루라도 빨리 공개하고 싶습니다.  」

제임스 편집장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지만 민우는 신중하게 나섰다.

「  개인적인 의견이긴 한데 속도보다는 퀄리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서인 만큼 오류도 없어야 하고요.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저는 퀄리티 쪽에 무게를 두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 조수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고요.  」

「  하긴, 민우 씨는 퀄리티에 욕심이 있는 분이셨지요. 어떤 작업물이 나올지 심히 궁금합니다. 내년을 위해 한국어를 좀 공부해둬야겠는데요? 하하하.  」

제임스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민우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진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민우는 다른 번역가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본업이 학자인 만큼 질적인 부분에 신경을 더 쓴다는 것.

때에 따라서는 그 부분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인문과학총서’ 작업에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송승현 실장이 나섰다.

「  그래도 가능하다면 속도에 신경을 써 줬으면 해요. 빠르면 빠를수록 마케팅에 도움이 되니까. 물론 국내 출판시장의 구조상 많이 팔기는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학계에서는 주목을 받겠죠. 어느 쪽이든 민우 씨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끝까지 힘내 주세요.  」

「  노력해 보겠습니다.  」

민우는 지금까지 소설 등 일반서 번역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문과학총서’를 계기로 학술번역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새로 붙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의 목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결국 모든 형태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 그게 궁극적인 목표여야 해.’

민우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겸손할 땐 겸손하지만 욕심을 부릴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히 지르는 게 민우의 특기였으니까.

이제 제임스 편집장의 브리핑 차례가 되었다. 그는 자료 없이 구두로 설명했다.

「  여러분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

그렇게 운을 뗀 제임스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들은 눈빛으로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제임스 편집장은 손뼉을 한 번 치며 입을 열었다.

「  ‘인문과학총서’의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에 구굴이 참여하기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어제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떻습니까. 대단한 소식 아닙니까?  」

「  정말요?  」

「  하하하. 민우 씨. 제가 농담은 잘해도 공사 구분은 잘합니다. 농담 아닙니다.  」

민우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송승현 실장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대단한 소식이었다.

민우가 옛 일을 회고하며 말했다.

「  예전에 미국에서 프로젝트 계약할 때 막연히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고 들은 이후로 소식이 없어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

「  이로써 우리 센트럴북스도, 지음사도, 민우 씨도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게 된 거지요.  」

민우는 짜릿함을 느꼈다. 세계적인 기업 구굴에서 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가고, 예정된 시간이 지났다. 송승현 실장이 회의를 마무리했다.

「  좋은 소식을 끝으로 회의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나머지 세부적인 일들은 메일로 공유하도록 할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임스 씨, 민우 씨.  」

자리에서 일어선 세 사람이 서로 악수를 했다. 그것으로 회의가 모두 끝났다. 민우와 제임스는 나란히 지음사 건물을 나섰다.

두 사람이 건물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제 행선지를 정해야 할 때다.

「  바로 공항으로 가십니까?  」

「  그래야지요. 일본에 잠시 들러서 미식가 행세 좀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구굴 계약 건 때문에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  안타깝네요. 레아 씨에게 얘기 듣긴 했는데. 아무튼 캠벨 박사님께는 대신 안부 부탁드립니다.  」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야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그런데 민우 씨. 아까는 승현 씨가 있어서 얘기를 못 했는데 하나 알아 두실 게 있습니다.  」

「  뭔데요?  」

민우가 묻자 제임스가 뜸을 들였다. 평소 기분파였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민우는 더욱 긴장감이 들었다.

「  좀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구굴 말입니다. 그쪽에서 민우 씨와 미팅을 원하고 있어요.  」

「  구굴에서요?  」

민우는 깜짝 놀랐다.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는 엄밀히 말해 센트럴북스에서 주관하는 일이다. 기본 소스가 ‘인문과학총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구굴에서 미팅을 청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민우의 얼굴에서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  하하하. 민우 씨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이군요.  」

「  아, 실례했습니다.  」

「  아닙니다. 다른 건 아니고 번역 서비스 관련 엔지니어가 요청을 해왔습니다. 민우 씨와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요.  」

「  인문과학총서 때문에요?  」

「  좀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르죠. 오히려 이번에 민우 씨가 낸 책과 관련이 있다고 할까요.  」

오히려 더 미궁에 빠졌다. 오픈 라이브러리나 인문과학총서라면 모를까. 이번에 낸 책이 구굴의 관심을 끌었다는 게 의외였다.

민우가 눈빛으로 채근하자 싱긋 웃은 제임스 편집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  동아시아에 한정되긴 했지만 이번에 통합이론서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엔지니어들이 그 책에 주목한 것 같더군요. 번역 서비스 품질을 향상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으니 그것과 관련된 일 아닐까요?  」

「  그거라면 이미 크라우드소싱 형태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

「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요. 어쨌든 저희 센트럴북스에서 나설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따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  그렇군요.  」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번역이론서가 그들에게 뭔가 영감을 준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는 제임스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답은 딱 하나뿐이다.

‘직접 부딪혀서 결론을 얻어야지. 내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면 기쁜 일이잖아?’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알겠다고 답했다. 제임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그럼 구굴 측에 민우 씨 개인 연락처 전달하겠습니다.  」

「  알겠습니다. 그럼 제임스 씨. 조심히 가세요. 곧 미국으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

「  말씀만 하지 마시고 꼭 오세요. 어메이징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

유쾌하게 웃은 제임스가 손을 한 번 흔들고 택시에 올랐다.

* * *

청문대로 돌아온 민우는 폴라리스 연구실로 들어갔다. 남희석이 일어나 인사했는데, 이다혜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남희석이 깨우려고 하자 민우가 손을 들어 말렸다.

“깨우지 마. 요즘 야근하던데. 피곤할 땐 자야지.”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

반짝반짝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민우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폴라리스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얼마 전 회원게시판에 남긴 글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20개가 넘게 달렸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데?’

민우는 댓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다.

아랍 및 이슬람 문화와 사회규범, 금기, 역사 등 광범위한 책들이 추천되었다. 단순히 문학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잘만 엮으면 좋은 거 하나 건질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아랍이슬람총서라든지. 이런 거 기획해서 출판하면 상호교류에 좋을 거야.’

타인과의 교류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억압과 폭력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건강한 교류의 시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민우는 재빨리 머리를 돌렸다.

‘이런 기획이라면 아랍 쪽 국가 대사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 같고······ 문학 쪽으로는 좋은 책이 없나?’

민우는 댓글을 더 확인했다. 그러다보니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작가가 한 명 있었다.

‘타예브 살리흐. 이쪽으로 유명한 사람인가보네.’

궁금증이 든 민우는 바로 구굴에 그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수많은 자료들이 나왔다.

‘수단 출신 작가구나. 아랍-아프리카인으로서 정체성 문제를 깊이 탐구한 사람이라······ 좋아. 촉이 온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어.’

민우는 그 작가의 이름을 메모하고 오늘 있었던 회의 자료를 다시 검토해 보았다.

띠리리리―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민우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교수님. 저 문혜인데요.

“어. 김 조교. 무슨 일이야?”

― 동경대 문학부에서 공문이 왔는데 한번 확인해 보셔야 할 거 같아서요.

“동경대에서?”

말을 끊은 민우는 잠시 생각했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최근 전개한 학술 활동에서 동경대와 관련이 된 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일개 학회가 아니라 대학 차원에서 공문이 왔다는 건 스케일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무슨 일로?”

― 잘 모르겠어요. 한자로 쓴 건 대충 읽겠는데 내용은 일본어라서요. 한번 확인해 보셔야 할 거 같은데 제가 지금 연구실로 갈게요.

“아니. 내가 그쪽으로 가마.”

민우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한차례 웃은 민우는 연구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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