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 87장. 백발의 노신사 (1) >
이불 위에서 뒤척이던 민우는 힘겹게 눈을 떴다. 속이 굉장히 쓰렸다. 쓴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으윽. 어제 너무 달렸나?’
민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출판기념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갑작스레 명인대 동문회가 열렸다.
서지훈 교수를 주축으로 송승현 실장, 이재환 교수, 최민식, 강예진, 이수빈, 한진섭, 주예린과 초대를 받은 석박사 과정생들이 뭉쳤다.
주당들이 모인 만큼 그날 들이킨 술이 어마어마했다. 다들 다음날 업무가 있었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시냐는 듯 신나게 들이부었다.
‘술값만 백만 원 넘게 나왔을 거 같은데. 서지훈 선생님 완전 독박 쓰셨겠어.’
쓴웃음을 지은 민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에 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수빈에게 전화를 하려다 톡을 보냈다. 푹 자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방을 나서니 얼큰한 북엇국 냄새가 났다. 민우는 얼른 씻고 식탁에 앉아 해장을 시작했다. 민우의 어머니도 맞은편에 앉아 늦은 아침을 들었다.
“그런데 수빈이는 언제 간다니?”
“오늘 밤에 간대. 이따 공항으로 배웅 가려고.”
“하루만 자고 가려면 왜 왔다니. 힘들게. 축하는 멀리서도 해줄 수 있는 걸. 안 그래도 타지에서 고생하는데 어쩐다니?”
확실히 민우도 동감하는 바였다. 어제 얘기를 들어보니 꽤 무리를 한 것 같았다. 미국에서 오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나봐.”
“뭐야?”
아들의 너스레에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민우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자취 생활을 오래했지만 어머니의 얼큰한 북엇국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라. 또 술 마시지 말고.”
“알았어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찬바람이 훅 몰아쳤다. 12월 초입. 떠나간 가을의 빈자리에 겨울이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민우는 늘 그렇듯 레아의 차에 올랐다.
“별로 못 주무셨나 봐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 어제 모임 늦게 끝나셨어요?”
“예. 학교 사람들하고 좀 달렸더니. 혹시 술 냄새 나요?”
“엄청요.”
“이런. 큰일이네. 오늘 강의 있는데.”
싱긋 웃은 레아가 미리 준비한 숙취해소음료를 꺼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민우는 고맙다고 말하고 한 번에 들이켰다.
“어제 와 줘서 고마웠어요. 정신이 없다보니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저녁은 괜찮았어요?”
“맛있더라고요. 배부르게 잘 먹고 갔어요.”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아는 운전에 집중하면서 간간히 민우와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엔 사적인 이야기의 비중이 늘었다. 이렇게 차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느새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다음 달쯤 차를 하나 사려고요.”
“차는 갑자기 왜요?”
“세금 문제도 있고 매번 레아 씨 차 타는 것도 미안하고 해서요. 출퇴근 정도는 제 차로 하는 게 서로 편하고 좋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왠지 내키지 않았다. 민우와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일이었다.
어제 이수빈이 출판기념회장에 나타났을 때 확실히 깨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확고했다. 자신이 파고 들어갈 틈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민우가 레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레아가 뒤늦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녜요. 햇빛 때문에 눈이 좀 부셔서.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하지만 매니저님 술 드신 다음 날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음주단속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근데 구입하실 차종은 정하셨어요?”
“고민 중입니다. 후배 하나가 겁도 없이 벤츠를 사는 바람에 좀 애매하게 됐네요. 잘못 샀다가 놀림 받을 거 같아서.”
레아는 만능형 비서답게 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민우에게 어울릴 만한 차를 몇 가지 꼽아주며 조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차가 청문대에 도착했다. 민우는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즉시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쯤 구수한 커피향이 진동해야 하는데.
‘내 정신 좀 봐. 오늘부터 연구실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했지?’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폴라리스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남희석과 이다혜가 자료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어서 오세요.”
“그래. 아침들은 먹었어?”
“그럼요. 지각하는 일이 있어도 아침은 먹고 다니죠.”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헤헤헤. 근데 좀 쉬시긴 한 거예요? 피곤해 보이셔요. 2차 달리셨어요?”
무뚝뚝하고 매사에 진지한 남희석과는 달리 이다혜는 눈썰미가 좋았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조수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어제 그대로 가기는 좀 뭐해서 명인대 쪽 사람들하고 한잔 했지. 지도교수님 포함해서.”
“그러셨구나. 그나저나 어제 손님들 어마어마하게 왔더라고요. 특히 허윤이랑 그렇게 친하실 줄 몰랐어요. 같은 프로그램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붙임성 좋은 친구야. 게다가 성실하지. 연예계에서 사고 안 치기로 유명한 친구잖아. 인물 좋고 성격도 좋은데 아직까지 솔로인 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때 이다혜의 두 눈에 사심이 번득였다.
“그럼 저 소개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일 열심히 하면.”
“잠깐 녹음 좀 해도 될까요?”
피식 웃은 민우가 시선을 돌렸다. 웬 스크랩 자료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이건 뭐야?”
“교수님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습니다.”
민우는 남희석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스크랩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맨 앞장을 넘겨보니 꽤 오래전 기사가 나왔다.
“근데 이걸 왜 하고 있냐? 내가 시킨 기억은 없는데.”
“제 취미입니다.”
“······.”
취미라는 말에 왠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남희석은 진지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교수님의 역사가 제 역사기도 하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스크랩할 생각입니다. 음? 표정이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식은땀이 흘렀다. 스토커가 따라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이 모두가 자신과 관련된 기사였으니까.
인문학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해 경한신문 박윤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것을 시작으로 여러 활약상들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학회에서 김교제의 <비행선>의 원작을 밝힌 기사도 있었고, 영국 가디언지의 기사도 보였다. ‘독서의 밤’과 관련된 뉴스도 있었다.
‘2년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을 했구나. 이렇게 보니 정말 새롭네.’
정신없이 읽다 보니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다.
가장 최근 기사는 민우가 쓴 <번역의 이론>에 대한 것이었다. 번역가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일본에 동시 출간한 것이 화제가 됐다.
생각보다 파급력이 컸다.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에서 민우의 업적을 조명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덕이 컸다.
‘이론서가 이 정도라면······ 일반서를 냈을 때는 반응이 정말 좋겠는데? 잘 기획해서 근사한 걸로 하나 써봐야겠다.’
결국 민우는 흡족한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제야 이다혜가 다가와 스크랩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헐. 오빠. 얘 완전 스토커 아녜요? 남자끼리 징그럽게 이게 뭐야.”
“뭐 어때? 취미라는데 존중해 줘야지. 참, 희석아. 나중에 그 자료 좀 빌리자. 스캔 떠 놓게.”
“이미 스캔 떠 놓은 자료 있는데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 땡큐.”
민우는 커피메이커에 가득 담긴 커피를 한 잔 따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폴라리스 사이트에 접속한 뒤 로그인했다.
홈페이지 제작이 완료된 이후, 민우의 국제번역기구 사업에 동참하기로 밝힌 번역가들은 모두 폴라리스 홈페이지에 가입했다. 총 회원수 70여 명.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벌써부터 회원 전용 커뮤니티에는 각종 번역관련 정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수 도서 추천은 물론 각종 지원 사업 정보가 올라왔다.
모든 외국어에 능통한 민우는 마치 물고기 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 감고도 월척을 낚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슬슬 프로젝트를 시작해 봐야지? 섭섭이도 열심히 하니까 나도 뭔가 보여줘야 해.’
회원 게시판에 새로 올라온 글이 있나 확인한 다음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민우가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글로벌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내용을 적어야 했다.
‘댓글이 많이 달려야 할 텐데. 리스트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민우는 게시물을 통해 아랍어권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동이나 동유럽 쪽에도 회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내용을 완성한 민우가 다시 한 번 읽으며 보충할 것이 없는지 살폈다.
‘리스트가 확보되면 한번 검토해보고 현기혁 팀장님하고 일을 진행해 봐야지. 굵직한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추진만 하면 돼.’
얼마 전 아랍어권 출판시장 진출에 대해 라온북스 측과 미팅을 했다. 때마침 아부다비 국제 도서전에 다녀온 현기혁 팀장은 민우의 제안에 적극 협력을 밝혔다.
민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폴라리스 커뮤니티를 통해 아랍어권의 우수 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우수한 도서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시장을 개척한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책을 아랍어권 시장에서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게 되면 그쪽에서도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다아이몬드 소사이어티에 참여해서 인맥을 확보하면 일이 더 수월해질 거고.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접촉하기도 쉬워지겠지.’
계획은 모두 민우의 머릿속에 완성되어 있었다. 밑그림 작업이 끝났으니 이제는 하나하나 색깔에 맞게 덧칠해 나가면 되었다.
딸깍―
게시물이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 창을 껐다. 댓글이 달리면 메일로 받을 수 있게 해놔서 휴대폰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득 폴라리스에 달린 댓글을 직접 핸드폰 푸시로 받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외주를 써서라도 스마트폰 앱을 만들어야겠다. 지금 상태로는 편의성이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강일이 열정페이로 만든 홈페이지였으니까. 아마추어의 실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민우는 대강의 아이디어를 메모해 놓았다. 그리고 ‘어플리케이션 개발 계획’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집어넣었다.
일련의 작업이 끝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이다혜는 점심시간만 되면 목소리에 기운이 넘쳤다.
* * *
그날 밤, 민우는 수빈을 배웅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움직였다.
밤늦은 시간이라 레아의 차 대신 만만한 주예린의 차를 얻어 탔다. 물론 운전은 한진섭의 몫이었다.
민우가 주예린을 흘겨보며 물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분고분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님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 가식 봐라.”
“가식이라뇨. 서운하네요. 후배의 애정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시다니······.”
민우가 본격적으로 아랍권 시장 개척에 나서자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된 그녀였다.
곧 차가 공항 주차장에 멈췄다. 민우는 트렁크에서 수빈의 짐을 챙겨 공항으로 걸었다. 진섭과 예린도 그 뒤를 따랐다.
탑승 수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진섭이 나섰다.
“마실 것 좀 사 올게.”
진섭이 예린을 끌고 한쪽으로 사라졌다. 아마 당분간 두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피해준 것임을 민우는 잘 알았다.
민우와 수빈은 의자에 앉았다.
“왔을 땐 좋았는데 막상 보내려니까 서운하네. 그냥 12월에 봤으면 좋았을걸.”
“그러게요. 그냥 가지 말고 한국에 있을까?”
“뭔 소리야. 어렵게 얻은 기회 그냥 걷어차려고?”
“그냥 해본 소리지.”
수빈이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말보단 체온을 나누고 싶은 순간이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수빈의 표정에 아쉬움이 깔렸다.
“이제 가야겠다.”
이수빈이 일어섰다. 마침 한진섭과 주예린도 커피를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민우는 수빈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오빠도.”
포옹이 길어졌다. 아쉬운 마음에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수빈은 짐을 들고 게이트로 향했다.
두어 발자국 앞서 걷다 뒤돌아섰다. 수빈은 애써 웃어 보였다.
“다들 건강히 잘 지내요. 12월에 올게요.”
“조심히 가!”
“민우 걱정은 하지 말고. 이 오빠가 잘 감시해 줄 테니.”
이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뿐만 아니라 가까이 지냈던 두 사람의 아쉬운 표정이 자꾸 눈에 밟혔다. 진짜 가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입술을 깨문 수빈은 손을 한 번 크게 흔들고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수빈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숨을 내쉰 진섭이 한마디 던졌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네.”
“그러게.”
민우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이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진짜 꿈같은 일은 따로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