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32화 (232/500)

232화 : < 86장. 두 번째 출판기념회 (2) >

“애썼다.”

서지훈 교수는 담담히 웃으며 민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인간인 이상 감정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일부분이긴 해도 자신의 업적을 뛰어 넘은 첫 제자였으니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자신의 업적이 묻혔다는 것보다 제자가 믿음에 부응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남은 말은 나중에 하자꾸나. 바쁜데 이만 가 봐. 손님들 맞아야지.”

“예, 선생님. 이따가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

하나둘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민우는 반갑게 손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보며 서지훈 교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놓칠 송승현 실장이 아니었다.

“한숨을 다 쉬네. 서운해요? 민우 후배가 당신 기록을 깨서.”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일찍 알을 깨고 나올 줄은 몰랐지. 그래도 내 책무는 다 한 거 같아.”

“책무요? 무슨?”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듯 서지훈 교수가 싱겁게 웃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민우에게 향해 있었다.

“지도교수이자 선학의 책임과 의무지. 후학이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좋은 말이네요.”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웠으니까.”

“아······.”

그 한마디가 송승현 실장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송승현 실장은 곧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눈빛에 포근한 기운을 담았다.

“뭐야 그 눈빛은. 남편이 시원찮은 사람이 돼서 실망했어?”

“뭐라구요?”

송승현 실장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정 어린 눈빛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니. 하지만 이해했다. 그런 농담이 그만의 애정 표현이었으니까.

송승현 실장이 서지훈 교수의 팔짱을 꼈다.

“당신은 누가 뭐래도 최고예요. 적어도 나한테는요.”

“어어, 이거 무슨 바람이 부셨을까? 우리 여왕님이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다하고.”

“신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예요. 여왕이니까.”

“뭐? 하하하.”

그렇게 두 부부가 소소한 애정을 나누는 사이, 민우는 손님 접대에 정신이 없어졌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안녕하세요. 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힘드셨죠?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 출판기념회 때는 최민식과 분담할 수 있어서 여유가 있었는데, 오늘은 완전 달랐다. 한 번에 두 사람 이상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청문대 출판문화원에서 행사장을 넓게 잡은 탓이 컸다. 출판기념회라기보다는 디너파티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규모였다.

그리고 그 규모에 딱 맞는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공은 근사한 드레스를 걸친 정연주와 하지은이었다. 아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뒤편에는 부록처럼 유진태 실장도 슬쩍 껴 있었다.

연주의 손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꽃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연주의 손에 들려 있어 느낌이 좀 수수해졌다.

“박 교수님. 축하해요.”

민우가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빈손으로 온 게 무안했는지 하지은은 애교 섞인 박수를 쳤다.

“고마워. 근데 유 실장님도 오셨네요. 괜히 저 때문에 추가근무 하시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추가근무라뇨? 섭섭한데요. 제 개인 시간을 내서 축하드리러 온 겁니다.”

“당연히 농담이죠. 감사합니다.”

민우가 유진태 실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지은이 연주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근데 왜 갑자기 오빠한테 교수님이라고 불러?”

“학교잖아.”

“아~ 두 사람 직장 동료지? 그럼 누가 상사야? 재단 쪽이니까 네가 더 위인가? 그림 재미있네. 상사의 권위를 이용해 민우 오빠를 확······!”

“그, 그런 거 아냐! 직책이 아예 다른걸. 누가 위라고 할 수는 없어.”

“얘 좀 봐. 누가 뭐래? 확 승진시킨다는 이야기였는데.”

연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가자고 조르는 탓에 데려오긴 했는데 의외로 발목을 잡혔다. 민우와 이야기할 시간을 뺏긴 것이다.

어느새 민우는 다른 손님을 맞으러 저 멀리 가버린 상황이었다. 뚱한 표정을 지은 연주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테이블에 앉았다.

그때 작은 소란이 들렸다.

“가만, 저거 허윤 아냐?”

“꺅! 진짜! 진짜!”

실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이비색 카스케트를 쓴 허윤이 나타났다. 홀 안으로 들어온 그가 자연스레 살인미소를 날리며 팬들의 호응에 응해 주었다.

“짜잔! 형! 차 막힐까봐 일찍 왔어요. 잘했죠?”

“그래. 잘했다.”

주변으로 여성 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주인공이 바뀐 것 같은 상황. 민우는 한 걸음 물러서며 허윤에게 신호를 보냈다.

“알지?”

“척하면 딱이죠.”

고개를 끄덕인 허윤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자자, 사진 찍고 싶으신 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은 제가 존경하는 민우 형님 출판기념회니까 특별히 팬서비스 하겠습니다!”

“저요! 저!”

“오빠!”

허윤이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민우가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녀석, 나름 쓸 만한데?’

덕분에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든 테이블이 가득 찼다. 100명 이상이 모였다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물론 만삭인 누나와 매형인 최민식, 그리고 수빈을 제외한 307호 멤버들도 모두 모였다. 지음사 인문사회팀 식구들도 와 있었고, 명인대에서 온 사람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민우는 명인대 식구들이 모여 있는 쪽을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민영환 선생님은 안 오셨나보네. 바쁘신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대답을 듣긴 했지만 조금 아쉬웠다. 그간 여러 일이 있었다. 그래도 민영환 교수는 민우의 마음속에 한 사람의 선생으로 남아 있었다.

‘일이 바쁘시겠지. 겨울 학회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중에 따로 찾아뵈어야겠다.’

민영환 교수의 책을 하나 챙겨놔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박 교수님!”

출판문화원의 배만식 팀장이었다. 뚱뚱한 몸을 이끌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뜻밖의 흥행에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야, 정말 손님들이 많이 오셨네요! 교수님의 진가를 여기서도 확인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슬슬 시작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죄송한데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으셔서요.”

“예예. 얼마든지요. 오늘의 주인공은 박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럼 사회자에게 미리 말을 해 놓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때마침 제임스 편집장과 캠벨 박사가 느긋한 걸음으로 홀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민우가 자리를 뜨며 배만식 팀장에게 당부했다.

“팀장님. 5분 뒤에 시작할게요.”

“옙!”

민우는 한걸음에 달려가 귀한 손님을 맞았다. 풍채 좋은 외국인 두 명이 나타나 영어를 쓰기 시작하니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  좋은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우 씨.  」

「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박사님.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

민우가 먼저 캠벨 박사와 악수를 나눴다. 그래서일까. 그 모습을 보던 제임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 팔을 벌렸다.

「  이런 이런, 민우 씨. 벌써 이 친구와 친해진 겁니까? 연구 한 번 같이 하게 된 게 뭐 대단하다고. 이거 서운하네요.  」

「  제임스 씨도 질투를 다 하시는군요. 이번 공동 연구는 제겐 가문의 영광입니다. 세계적인 석학과 연구를 하게 됐는데 학자로서 그 이상의 명예는 없죠.  」

다소 과장된 표현에 제임스가 입을 떡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캠벨 박사를 노려보았다.

「  자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

「  그래. 세상에서 자네만 모르는 진실이지.  」

「  오, 주여!  」

제임스가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위트는 여전했다.

「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여러분들 기다리느라 시작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

「  이런, 저희가 좀 늦은 모양이군요. 미안합니다.  」

「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

민우가 직접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VIP석은 특별히 없었고, 완전히 빈 테이블도 없어 합석을 해야 했다.

「  그럼 이따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

무대로 향하려던 그때, 흠칫 놀란 민우가 걸음을 멈췄다.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응? 내가 잘못 봤나?’

혹시나 싶어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환영이 아니었다. 그래서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민우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민우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쏠렸다.

대단한 장관이 펼쳐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곳엔 여행용 캐리어를 손에 든 한 여자가 서 있었을 뿐이다. 연분홍 목도리를 한 그녀는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휴, 다행히 안 늦었네.”

“이수빈.”

민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미국에 있어야 할 그녀가 도대체 여기엔 어떻게 온 걸까. 온갖 의문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귀신 본 사람처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것.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닿자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대체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긴. 비행기 타고 날아 왔지.”

“농담하지 말고.”

혀를 살짝 내민 이수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민우의 옷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상냥한 손길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기념일인데 빠질 수는 없잖아. 조금 무리하긴 했는데······ 뭐, 괜찮아. 이 정도는.”

“조금이 아니잖아. 아직 학기 끝나지도 않았을 텐데.”

“이 오빠가 참.”

이수빈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민우의 입에 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눈치 없게 자꾸 이러기에요?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어?”

그제야 민우의 감각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걸렸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념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부끄러움과 설렘이 뒤섞여 붕 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민우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울렸다. 민우가 수빈을 껴안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바람이 낙엽을 쓸어내며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했다.

그 너머로 백발의 노신사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때로 뜨거운 게 생각날 때면 그는 손을 뻗어 진하게 우린 우롱차를 홀짝였다.

일본의 명문인 이곳 도쿄대에서도 흔히 볼 수는 없는 풍경이었다.

확실히 책의 행간을 따라가는 그의 눈빛엔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지식이 담겨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마에 잡힌 주름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올린 지식과 지혜의 골짜기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바람이 불어오고 낙엽이 뒹굴기를 반복할 그때.

「  선생님!  」

익숙한 목소리에 노신사가 책에서 시선을 뗐다.

책을 허리에 낀 젊은 남학생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노신사는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책을 덮고 안경을 벗어 한쪽에 놓았다.

「  추운데 밖에서 뭐 하고 계세요?  」

「  낙엽 냄새가 썩 좋구나. 가끔은 이렇게 자연과 교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연구실은 좀 답답하잖니.  」

「  그러다 감기 걸리세요. 저번에도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이제는 몸 생각도 좀 하셔야죠. 정년도 얼마 안 남으신 분이.  」

손자의 잔소리쯤으로 들었을까. 백발의 노신사는 그저 소탈하게 웃었다. 보란 듯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우롱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  그런데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평소라면 내가 잔소리를 듣기 전에 연구실로 돌아갔을 텐데. 벌써 수업이 끝난 게냐?  」

「  휴강돼서 도서관 들렀다 왔어요. 아참. 오늘 신간 들어온 것 중에 재미있는 책이 하나 있어서 빌려왔는데. 혹시 읽어 보셨어요?  」

「  무엇이기에?  」

노신사가 관심을 보였다.

그만큼 제자는 책을 고르는 데 까다로웠다. 문학도답게 평이 좋은 책들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혹평을 듣기 일쑤였다.

류타로는 허리에 끼고 있던 책을 백발의 노신사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 노신사는 다시 안경을 끼고 책을 살펴보았다.

「  <번역의 이론>이라······.  」

노신사가 나지막이 제목을 읽었다. 그때 류타로가 옆에서 설명했다.

「  평범한 이론서가 아니더라고요. 일종의 통합 이론서인데 동아시아의 주요 언어를 다루고 있어요. 물론 우리나라 편도 있고. 꽤 정교하게 쓰였더라고요.  」

「  네가 그렇게 평가할 정도라면.  」

노신사의 시선이 제목에서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시야에 저자의 이름이 보였다. 한자로 ‘박민우’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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