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31화 (231/500)

231화 : < 86장. 두 번째 출판기념회 (1) >

공영방송 KBC의 한 스튜디오.

환한 조명이 가득한 그곳에서 ‘독서의 밤’ 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장영한 PD와 스태프들이 모니터를 주목하는 가운데 무대에서는 한창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미모의 여자 아나운서가 민우에게 물었다.

“박 교수님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최근에 젊은이들에게 화제가 된 책인데요. 교수님도 젊으신 만큼 여러 가지로 공감할 게 많으셨을 것 같아요.”

“최근 쏟아지고 있는 자기계발서의 문제는 돈으로 타인의 인생을 엿본다는 것에 있는데요. 근데 이 책은 좀 다르네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해 줍니다.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자기성찰서에 가깝다고 할까요?”

지적인 미소를 짓는 민우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수십 년간 업계에 몸담은 카메라감독은 물론 장영한 PD까지 주목하게 만드는 좋은 장면이었다.

물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그런 그의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 마치 후광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아나운서가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기성찰서요. 듣기엔 조금 어렵고 막연한 느낌인데 시청자분들을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찰이죠. 인간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게 아닌가 싶어요.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민우는 이제 방송에 완전히 적응을 했다. 자연스러운 몸짓과 차분한 어조로 출연자들은 물론 방청객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민우의 설명이 끝나자 출연진들의 코멘트가 이어졌고, 준비된 순서가 이어지며 녹화가 마무리되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오가는 가운데 민우가 재빨리 무대에서 내려와 가방을 열었다. 미리 넣어 온 출판기념회 초대장을 꺼내 다시 무대에 올랐다.

마침 출연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민우는 고정 출연자인 허윤과 아나운서들에게 초대장을 각각 하나씩 나눠 주었다.

“와! 드디어 올 것이 왔네요.”

허윤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미 그는 민우가 출판기념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스케줄 괜찮겠어?”

“그날은 다 빼놨죠. 형님 출판기념회인데 제가 안 가면 누가 갑니까?”

“무리할 필요 없는데. 너 요즘 드라마 하는 것도 있잖아. 촬영장 오가기 좀 어렵지 않나?”

“괜찮아요. 전 아직 젊으니까요.”

녹화를 함께 하며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녹화를 마치고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 말도 놓고 친해진 것이다.

허윤이 어깨를 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가서 딱 얼굴 비춰야 형님 위신도 살고 좋죠. 이번 기회에 연예인 인맥 자랑하시는 겁니다! 하하하. 그런데 사인 받아다 달라는 사람들 없어요?”

“아직까지는. 이제 생기겠지. 내가 너랑 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다 해드립니다!”

민우는 웃으며 허윤의 어깨를 다독였다. 든든한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럼 다들 수요일날 볼 수 있으면 봐요.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 놓을게요.”

“예. 들어가세요. 민우 씨.”

“연락해요! 형!”

손을 흔든 민우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직 초대장을 줘야 할 사람이 하나 남았다.

“피디님.”

“오. 민우 씨.”

모니터를 돌려보던 장영한이 바로 일어났다. 대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독서의 밤’ 코너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건 민우였으니 당연했다.

민우가 두 손으로 공손히 초대장을 건네자 장영한 PD가 반색했다.

“이거 깜빡하고 있었네. 다음 주에 출판기념회 있다고 했죠?”

“바쁘시겠지만 그래도 초대장은 드리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요.”

“꼭 가야죠. 우리 출연자 기념회인데. 어디보자······ 수요일 저녁. 오케이. 접수 완료. 근데 참, 민우 씨. 그때 얘기했던 건 어떻게 생각 좀 해봤어요?”

얼마 전 장영한 PD를 통해 민우에게 고정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인지 결정했냐는 질문이었다.

‘마녀클럽’이라는 이름의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들이 줄줄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민우는 거절의 뜻을 표했다.

“아무래도 힘들 거 같습니다. 최근에 일이 많아져서 너무 바쁘다보니 여유가 안 나네요. 한두 회 출연은 몰라도 고정은 어려울 거 같아요.”

“끄응, 그거 너무 아쉬운데? 요즘 ‘마녀클럽’ 인터넷에서 핫한 거 알잖아요. CF 섭외도 들어올 가능성도 있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지.”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안이 들어온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우의 결심을 바꾸는 건 어렵다. 장영한 PD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촬영을 기약했다. 민우도 스튜디오를 나서 레아의 차에 올랐다.

“촬영은 어떠셨어요?”

“늘 똑같죠. 특별한 건 없었어요.”

“요즘 ‘독서의 밤’ 인터넷 댓글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 매니저님 팬들이 많더라고요. 수빈 씨가 보면 안 될 댓글들도 많던데요?”

레아가 영악하게 웃었다. 며칠 전에는 민우의 팬카페가 생겼다며 호들갑을 떨던 그녀였다. 민우는 안전벨트를 매며 쿨하게 대답했다.

“수빈이 출연할 때는 제가 보면 안 될 댓글들도 많았는데요 뭐. 그런 거에 신경 안 씁니다. 수빈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아마 인터넷 할 시간도 없을 걸요? 자, 이렇게 떠들 시간 없습니다. 출발하죠.”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명인대로 가주세요. 오늘 좀 빨리 움직여야 할 거 같아요. 시간이 부족하네요.”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은 레아가 즉시 엑셀을 밟았다.

* * *

“왔어?”

“어서오세요. 선배님.”

“다들 안녕?”

민우는 오랜만에 310호에 들렀다. 그간 바빠서 오지 못한 사이에 내부 인테리어가 바뀌어 있었다. 책장의 위치가 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민우가 진섭에게 물었다.

“뭐 옮겼어? 배치가 좀 달라진 거 같은데.”

“자리 하나 더 만들어야 해서 인테리어 좀 바꿨다. 책상 하나 더 들어갔어.”

“힘들었겠네. 나 불러서 같이 하지.”

“하이고! 우리 귀하신 교수님께 어떻게 막노동을 시킵니까? 잉여로운 박사과정생들이 알아서 해야지. 안 그래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하!”

그 말에 다른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도 따라 웃긴 했지만 왠지 떠받들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여간 사람 무안하게 하는 데 재주 있다니까. 자리 따로 만들지 말고 내 자리 쓰지. 어차피 자주 오지도 못하는데.”

“써도 부족하니까 만든 거야. 내가 돌머린 줄 아나. 안 그래도 내 자리 영호한테 주고 내가 네 자리 쓰고 있었어.”

“잘하고 있네.”

민우는 가방에서 초대장을 한 뭉텅이 꺼냈다. 그리고 하나씩 나눠주었다.

“출판기념회 초대장이야. 시간 안 되는 사람들은 무리해서 올 필요 없어. 안 주면 서운할 것 같아서 나눠주는 거야.”

“꼭 가겠습니다. 선배님.”

“가야죠. 서지훈 선생님 기록이 깨지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그런데 서지훈 선생님도 오십니까?”

“오시겠지. 민우 선배 출판기념회인데 안 오시겠냐?”

박사과정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고학번 선배들이 없어서 자유롭게 떠드는 분위기였다. 다들 민우와 같거나 아래였다.

민우가 손을 내저었다.

“이상한 얘기들은 그만하고. 철주하고 민호 오면 초대장 좀 전해 줘. 오늘 서울 한 바퀴 돌아야 해서 가봐야 돼.”

“바쁜 척은. 나한테 맡겨 주시게.”

진섭에게 초대장을 넘긴 것으로 명인대 일정은 모두 끝났다. 민영환 교수를 포함한 다른 교수들에게는 이미 초대장을 돌린 후였다.

민우가 가방을 손에 쥐고 310호의 문을 열었다.

“그럼 다들 수고해.”

“형. 자주 좀 오세요. 혼자 너무 잘 나가시면 나중에 외롭습니다.”

“안 그래도 수빈이 나가 있어서 외로워 죽겠다. 다음에 다들 모여서 거국적으로 쏘맥 한번 말자고.”

“좋죠!”

민우가 밖으로 나가자 진섭이 따라 나왔다. 남자끼리 배웅 같은 건 안 하는 거라고 떠들던 사람이라 무슨 일인가 싶었다.

민우가 돌아섰다.

“왜?”

“다른 건 아니고······ 그, 뭐냐. 나 다음 학기에 강의 시수 세 시간 늘렸다. 겨울 학회에도 발표 신청했고. KCI급 학회야.”

“벌써?”

민우가 눈을 반짝였다. 모임에 대해 말하고 더 열심히 하라고 부추긴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민우가 흥미롭게 웃었다.

“생각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네? 기대 이상이야. 아주 잘하고 있어. 한 선생.”

“나 진짜 개빡세게 뛰고 있으니까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다. 어? 꼭 석유왕자님 잘 꼬셔서 나 국빈으로 초청받을 수 있게 해줘. 넌 말빨이 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믿는다. 친구.”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일단 커리어부터 착실히 쌓아. 그러면 저절로 기회는 올 거야.”

“캬! 교수 되더니 아주 그냥 교수님 같은 소리만 하고 있네. 알겠습니다. 박 교수님.”

농담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진섭은 민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공부와 연구에 몰두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일이다. 민우의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쌓은 지식과 커리어는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니까.

영리하게도 진섭은 이번 일을 자신의 터닝 포인트로 삼았다.

“공부도 좋지만 먹을 거 잘 챙겨 먹어. 누구처럼 쓰러지지 말고.”

“그런 미련한 짓은 안 하지. 조심히 가셔. 멀리는 안 나간다.”

“오냐.”

진섭과 헤어진 민우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일정이 좀 바빴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저녁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시간은 빨리 흘렀다.

초대장을 돌리고 강의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사이 수요일이 밝았다. 청문대 리셉션홀에서 민우의 두 번째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 * *

‘생각보다 많이 왔네.’

참석자가 아니었다. 민우는 리셉션홀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화려한 화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간 인연을 맺은 여러 단체에서 축하 화환을 보냈다. 상아대 국문과와 명인대 국문과, 그리고 지음사와 라온북스, 거기에 대한그룹 비서실 이름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KBC 교양제작국에서도 축하 메시지를 적어 보냈고, KERIS의 도유진 원장도 성의를 표했다. 경한신문 사장 이름으로도 화환이 하나 왔다.

학계에서도 민우의 출판을 축하해 주었다. 국제비교문학회와 현대문학연구학회, 그리고 한국근대소설학회 등 민우가 가입한 학회에서도 마음을 표했다.

‘가만, 저건?’

민우는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살짝 놀랐다. 줄지어 서 있는 화환 중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강현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장관님도 알고 계셨구나. 하긴, 곽 과장님께 초대장 드렸으니 보고가 올라갔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플래티넘 소사이어티’에서 온 화환도 하나 놓여 있었다.

‘아무런 말도 안했는데 알아서 화환을 보냈네. 역시 비밀 모임이라 이건가.’

그러고 보니 김지형 회장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에 연주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이. 박 선생.”

“아, 선생님. 오셨어요?”

서지훈 교수였다. 물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단아하게 꾸민 송승현 실장도 옆에 서 있었다. 민우는 그녀에게도 꾸벅 인사했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축하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서운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네요. 우리 쪽에서 작업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출판기획실 직원들의 실망감이 대단했어요.”

“죄송합니다. 그게······.”

“농담이에요. 후후. 사정은 전해 들었어요. 나름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던데 잘 완성되길 바랄게요.”

송승현 실장이 웃었다. 결혼을 하고 나더니 더 차분해지고 여유가 생긴 것 같은 모습. 회사에서는 깐깐하고 빈틈없는 일처리를 보여주는 그녀였지만 왠지 좋은 어머니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서지훈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오늘 캠벨 박사도 온다고 했나?”

“네. 이따 제임스 편집장님하고 같이 오실 겁니다. 조금 늦으신대요.”

“공동연구는 정말 뜻밖이었지만 기회가 왔으니 잘해 봐라. 내가 가르쳐줄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럼 이만 하산해도 됩니까?”

“박사논문에 도장 필요 없으면 하산해도 된다.”

“죄송합니다. 다시 산에 오르겠습니다.”

“하하하!”

두 사제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때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민우는 옆에 쌓아둔 책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서지훈 교수에게 내밀었다.

“이번에 출간된 제 책입니다.”

“그래.”

서지훈 교수가 책을 받아들고 펼쳐보았다.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초고를 검토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실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죄송하게도 제가 선생님 기록을 깼네요. 서른 살에 단독으로 이론서를 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그럴 리가요.”

민우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여느 때보다도 진지한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