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30화 (230/500)

230화 : < 85장. 저력(底力) (3) >

레아의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캠벨 박사는 잠에 취했는지 반쯤 눈을 감은 채 차에서 내렸다. 레아가 체크인을 하는 사이 세 남자는 로비에서 대기했다.

캠벨 박사는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자연스레 민우가 제임스에게 물었다.

「  제임스 씨. 출국일은 언제죠?  」

「  다음 주 금요일입니다.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연장을 하게 되면 레아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

「  생각보다 오래 계시네요.  」

「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곳이 쉽게 올 수가 없는 곳이니까요. 워낙 멀어서. 온 김에 밀린 일도 처리하고 만날 사람들도 만나야지요.  」

제임스가 씨익 웃으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  그런데 민우 씨. 제가 왜 한국에 온 줄 아십니까?  」

「  프로젝트 건으로 미팅하려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레아 씨한테요.  」

「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목적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잖습니까.  」

그렇게 말을 꺼낸 제임스가 슬쩍 윙크하며 손가락 총으로 민우를 겨냥했다.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민우는 곧 정신을 차렸다.

「  설마······ 제 출판기념회 때문에 오신 겁니까?  」

「  빙고! 초대장을 안 주셔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십니까? 레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일정을 잡았죠.  」

거기까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민우는 일부러 그에게 출판기념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괜히 초대장을 보내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제임스 씨가 부담감 느끼실까봐 일부러 초대를 안 했습니다. 초대장 보내면 왠지 와달라고 하는 것 같잖아요. 그렇게 중요한 이벤트도 아니고요.  」

「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우 씨 일인데 저한테는 매우 중요한 이벤트죠. 무엇보다도 출판계에서 전무후무한 책이 출간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닙니까? 당연히 저도 참석을 해야지요.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챙겨 주십시오!  」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이번에 출간되는 번역이론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뿐만 아니라 민우는 향후 어떤 책을 쓸지도 설명했다.

「  번역이나 이론서 말고 일반인들을 위한 책도 써볼까 해요. 인문학적 지식이나 개념을 쉽게 표현한 책이라든지, 학문이나 지식에 관한 것들을 재미있게 구성한 책도 좋고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소설도 써보고 싶네요.  」

「  역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민우 씨도 일반서로 진출하시는 거군요.  」

턱을 괸 제임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번역으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도교수님하고 상의를 해봤는데······ 그런 결론이 나왔네요.  」

당시 민우의 이야기를 들은 서지훈 교수는 흔쾌히 해보라고 말했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조금은 의외였다.

만약 민우가 송현우 교수의 선집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지훈 교수는 선집 작업을 함께하면서 제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른 살, 글로 무언가를 논하기에는 젊은 나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우는 명인대 대학원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히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았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한번 도전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학원 지도교수이자 은사, 그리고 롤모델인 사람에게 허락을 받았다. 또한 자신을 전방위적으로 도와줄 출판사들도 줄을 섰다. 그래서 민우는 두려울 게 없었다. 이젠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제임스 편집장이 물었다.

「  역시 TV 출연 때문입니까? 독서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그런 프로그램을 하게 되다보면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죠. 욕심도 생기고.  」

과연 센트럴북스의 편집장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정확한 지적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임스의 눈이 번뜩였다.

「  혹시 출판 계약은 하셨습니까?  」

「  아직 계약을 하진 않았습니다. 아마 라온북스 쪽하고 작업을 하게 될 거 같아요. 물론 급한 일이 아닌 만큼 가능성은 열어 두고 있고요.  」

「  오, 그럼 북미 쪽 출판은 저희 센트럴북스에서 진행하면 되겠군요.  」

「  예?  」

갑작스러운 제안에 민우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제임스 편집장은 왜 모른 척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가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  하하하.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순진해지셨습니까? 민우 씨라면 좀 더 진취적인 분인 줄 알았는데요. 당연히 해외 출판도 생각해 보셨을 텐데.  」

「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 봤어요.  」

「  굉장히 유리할 겁니다. 번역가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쓰면 되니까 의미 전달도 더욱 정확할 거고요. 그 장점을 잘 살릴 수만 있다면 명저가 나올 거 같은데요?  」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 풀어 쓴다는 건 확실히 큰 메리트였다.

하지만 민우는 신중을 거듭했다.

「  국내 반응 보고 결정해 봐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만약 반응이 좋으면 그때는 제가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

「  나중에 샘플 나오면 한번 보내주시죠. 어떤 물건이 나올지 참 기대되는군요. 아, 이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아시죠?  」

「  물론이죠.  」

그때 민우는 확신했다. 제임스 편집장과 자신을 잇는 것이 단순히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적인 신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때 눈을 붙이고 있던 캠벨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가 그를 주목했다.

「  박사님.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

「  아닙니다. 이렇게 오래 비행을 한 건 거의 처음이라서. 누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 같군요. 민우 씨. 미안한데 이야기는 내일 해야겠습니다.  」

「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에 제가 호텔로 올 게요. 학회에 가면서 말씀 나누시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가 어떤 제안을 할지 궁금했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밤은 뜬 눈으로 지새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레아가 체크인을 마치고 돌아왔다. 캠벨 박사는 짐을 왼손에 옮겨 쥐고 민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오전 아홉 시에 로비에서 만나죠.  」

「  알겠습니다. 푹 쉬세요.  」

캠벨은 제임스와 함께 객실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로비에 앉아 밤을 새우고 싶었지만, 민우는 호텔을 나서 레아의 차에 올랐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 *

― 어떻게 됐어요?

“아무 말도 못 들었어. 피곤하다고 오늘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 세계적인 석학이라 그런지 밀당도 제대로 하는 느낌이네요. 오늘 같이 학회 간다고 했죠?

“어.”

― 울 오빠 한숨도 못 잤겠네.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이잖아.

수빈의 웃음소리가 달달하게 들렸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수빈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민우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공부는 어때?”

―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읽어야 할 책이 줄지를 않네. 에휴. 고3 시절로 돌아온 느낌이야. 그래도 이번 겨울엔 한국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네.”

― 목소리가 왜 그래? 나 안 보고 싶어요?

“아니. 그럴 리가. 아아아~주 보고 싶지.”

― 흥. 설마 나 없다고 한눈파는 건 아니지?

“내가 할 소리 대신 해 줘서 고맙네.”

수빈이 꺄르르 웃었다. 가끔 이렇게 장난스럽게 묻곤 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워낙 확고해 농담 이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 딱 한 달만 참아요. 12월 중순에는 출국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오빠랑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크리스마스? 와. 생각도 못했는데 얼마 안 남았구나. 미리 준비해 놔야겠네. 스위트룸 잡아놓을게.”

― 아침부터 뭔 소리래. 오빠 요즘 많이 외롭구나?

“알면 빨리 오기나 해. 이제 도착했다. 거긴 곧 저녁이지? 밥 맛있게 먹고.”

― 응. 또 전화할게요.

핸드폰 너머로 쪽 하는 입맞춤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시간이 빨리 흘러 크리스마스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캠벨 박사가 묵고 있는 비즈니스호텔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민우는 어제 앉았던 소파로 걸어갔는데, 그곳에 캠벨 박사가 다리를 꼰 채 영자신문을 읽고 있었다.

「  박사님. 벌써 내려오셨어요?  」

「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먹고 바로 내려왔어요. 룸에서는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

「  제임스 씨는요?  」

「  볼일이 있다고 먼저 나가더군요.  」

그렇게 대꾸한 캠벨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신문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었다.

「  민우 씨. 이르긴 하지만 바로 학회장으로 갈까요?  」

「  좋습니다.  」

민우는 캠벨 박사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민우는 목적지를 말했고, 캠벨 박사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서울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때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캠벨 박사가 말했다.

「  민우 씨는 신화학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긴장감이 들었다. 어제 제안하려는 것과 연관이 있진 않을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민우가 고개를 살짝 젖혔다.

「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신화를 연구하고 그곳에서 가치 있는 걸 발견하는 게 아닐까요?  」

「  놀랍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퀴즈의 한 고비를 넘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신화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반영하는 만큼 구분점이 명확히 존재하죠. 그러나 공통점도 분명히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태양에 관한 신화나 자연 재해, 특히 홍수에 대한 것들이 그렇죠. 때문에 학계에서는 글로벌한 신화 연구의 필요성이 늘 제기되어 왔습니다.  」

마치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그만큼 민우는 조수석에 앉은 것을 후회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 사이 캠벨 박사의 말이 계속되었다.

「  그래서 최근에 관련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화를 다루는 작업이지요. 특히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

「  쉬운 일은 아니겠네요.  」

「  모든 연구가 쉽지는 않지요. 역시나 언어적인 장벽이 문제입니다. 민우 씨도 문학을 전공하셔서 아시겠지만 구전(口傳)되는 것들은 수집하기가 무척 까다롭지요. 해당 국가의 표준어가 아니라 방언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

「  맞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렇게 구전되는 것들이 꽤 많아요.  」

그렇게 한동안 신화 연구의 어려움에 대한 캠벨 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민우는 한 단어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하나같이 피와 살이 되는 말들이었다.

덕분에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버렸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가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학회 시작까지는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다.

「  박사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근처에서 이야기 더 나누실까요?  」

「  좋습니다. 한국의 가을은 만만치가 않네요.  」

「  저쪽으로 가시죠.  」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아무튼, IAHS 세미나가 끝나고 당신이 준 책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제법 다양한 신화들이 존재하는구나. 그리고 한국 문학에서도 신화적 모티프들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구나 하고. 높은 연구 수준에 감탄도 했지요. 그래서 아시아 전체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겁니다.  」

민우는 캠벨 박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점점 확신을 가졌다. 그가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혹시 공동연구를 제안하려 오신 건 아닐까?’

그 생각에 미치자 민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공동 연구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석학으로 이름난 캠벨 박사와의 작업이다.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제안 드립니다. 민우 씨. 혹시 저와 함께 공동으로 연구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

막연한 추측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짜릿한 감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하지만 민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했다.

「  제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하시려는 게 어떤 연구인지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제 역량이 부족할까 걱정이 되어서요.  」

「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

캠벨 박사가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냈다. 연구 개요와 목적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민우는 잠시 실례의 말을 남기고 정독에 들어갔다. 동시에 냉정하게 자신이 캠벨 박사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를 판단했다.

곧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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