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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29화 (229/500)

229화 : < 85장. 저력(底力) (2) >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모임이었어.”

민우는 서두를 그렇게 장식했다. 진섭이 호기심을 보였고, 민우는 오늘 모임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학술모임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참석자들 보니까 각계각층에서 모였더라. 규모가 상당히 컸어. TV에 얼굴 비추는 사람들도 많았고.”

“예를 들면?”

민우는 인상 깊었던 사람 몇몇의 이름을 말했다. 진섭은 인상을 폈다 구기기를 반복했다. 결국 두 표정이 섞여 이상해졌다.

“모임의 정체성을 알 수가 없잖아? 이미지가 좋은 사람도 있는데 나쁜 사람도 있다니 뭔가 이상한데. 회장은 대체 무슨 꿍꿍이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주최 측에서 나서서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굉장히 중립적인 느낌이 들더라. 자리만 만들어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흐음, 문제가 되는 회원들도 안고 간다 이건가. 신기한 모임이네.”

“무조건 안고 가는 건 아니고 몇 가지 페널티가 있긴 해.”

“뭔데?”

“가장 큰 건······ 문제가 되는 회원들은 다이아몬드 그룹에 초대를 받지 못한다는 거야.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태가 될 수밖에 없더라고.”

실제로 연주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회원들은 대개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매스컴이 주목하는 부분도 있고, 굳이 모임에 나오지 않아도 필요한 인맥은 대부분 갖추고 있으니까.

“다이아몬드? 그건 또 뭐냐.”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는 모임이야. 플래티넘의 다음 단계라고 생각하면 돼.”

“모임 회장이 롤 랭겜하나 보네. 백프로야 그냥. 다이아 다음은 챌린저냐?”

실없는 농담에 민우가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이아몬드 다음 단계는 없다고 들었다. 물론 이건 현재의 이야기다. 역사가 깊어지면 회원의 세분화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 책장에서 책을 뒤적이던 주예린이 자리에 합류했다.

“인맥 쌓기는 좋겠네요. 쉽진 않겠지만 다이아몬드 모임에 나가면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는 거 아닌감?”

“그렇지. 유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억만장자도 꽤 있는 모양이야. 연주한테 들었는데 석유재벌들도 요즘 가입해서 규모가 굉장히 커졌대.”

“어? 연주도 그 모임 회원이야?”

“아닌 게 이상하지.”

“하긴, 그런데 다이아몬드 모임에 나가서 석유왕자님들하고 잘만 엮이면 대박이겠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오일 머니잖아.”

민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섭의 입에서 그 질문을 이끌어 내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설명한 것이었다.

모임에 가입한 것을 자랑하려고 그에게 떠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더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공감이 필요했다.

“요즘 아랍권 출판시장이 뜨고 있어. 작년 아부다비 국제 북페어도 성황리에 마무리가 됐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지.”

그 말에 주예린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신의 책이 아랍어로 번역되면 어떨까 하고 김칫국을 마셨다. 반면 진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시장 개척은 좋은데 네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어? 출판사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뭐야 그 표정은······ 설마 번역? 아랍어도 할 줄 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데?”

“졸라 개연성 없잖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아 씨, 더 세기도 힘드네. 암튼 외국어란 외국어는 다 하면서 아랍어까지 한다고? 좀 있으면 아프리카어도 한다고 하겠다? 외계어는 언제 마스터 하는데?”

민우는 한 번 웃고 말았다. 믿든지 말든지 그건 그의 자유다.

‘그래도 공부가 필요하긴 해.’

아랍어는 모국어처럼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줄은 몰랐다. 아직까지 필요한 적이 없기도 했고, 생소한 문자라 쓰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단어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상 그 외적인 것들은 시간만 투자하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시간 내서 틈틈이 아랍어 쓰는 연습도 좀 해야겠다. 회화도 좀 해야겠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민우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우선 아랍 쪽 출판 시장에 내 이름을 알리는 게 먼저다. 번역이든 논문이든 뭔가 수를 써보자. 맨부커 상으로 이슈를 만들었으니 눈에 드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몇 가지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린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출판과 번역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민우는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를 기대했다. 진섭의 말대로 잘만 엮이면 큰 걸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랍어로 이것저것 번역해 볼 생각이야. 당연히 아랍어로 된 책도 우리나라에 들여와야겠지. 그래야 공정한 교류가 되는 거니까. 당분간은 논문 위주가 될 거고 차차 일반서로 넓혀 갈 거야.”

“······진짜 할 줄 아는 거야? 진심?”

“공부 중이야. 그리고 나 혼자 할 것도 아니다. 본격적으로 하려면 역시 폴라리스 통해서 해야지.”

혼자 할 생각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변명하지 않으면 진섭과 예린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일단 폴라리스 이름을 팔았다.

진섭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 그렇게 얘길 했어야지. 확실히 폴라리스만 잘 돌아간다면 어렵진 않겠네. 번역 협동조합 같은 거니. 아랍 쪽에서도 회원들이 있나봐?”

“좀 있지.”

“그럼 열심히 해보셔. 하는 김에 짬나면 우리 예린이 책도 좀 팔아주고.”

“오늘 와서 차 자랑하는 거 보니 얘는 틀렸어. 좀 굶어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작가들은 통장 잔고가 비어 있어야 열심히 일하니까.”

“서, 선배님!”

주예린이 애처롭게 민우를 바라보았다. 물론 농담이었다. 소설에서 첫 번역작은 주예린의 <세계수>로 이미 낙점한 상황이었다.

“성공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차기작 구상 잘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번역 안 할 거야. 알았어?”

“힝. 알았어요······.”

주예린을 믿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충고였다. 돈은 그만큼 무서운 거니까.

하지만 당장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그 대상은 주예린이 아니라 한진섭이었다.

“그보다 진섭이 너. 앞으로 논문 좀 더 많이 써. 국제어학원에 요청해서 강의 시수도 더 늘려달라고 하고. 박사학위도 최대한 빨리 따 놔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한 얘기의 연장선인데. 지금은 아랍에서 한국어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어. 하지만 앞으로 몇 년 사이에 크게 바뀔 거야. 한국어를 배우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라는 소리야. 관련 업계도 크게 성장할 거고. 그렇다면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겠지? 어디에서 어떤 제안이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친구가 진지하게 말을 꺼낸 만큼 진섭도 그 말을 차분히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동남아에서 한국어 열풍이 불어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측을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랍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확률은 낮다. 진섭은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더운 나라 가서 고생하고 싶진 않어. 일단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해 봐야지. 아랍 갈 바엔 차라리 동남아가 낫겠다.”

“조건이 어마어마할 텐데 생각 잘해라. 연봉 자릿수가 다를걸? 국왕이 널 국빈으로 초대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진섭이 움찔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민우처럼 국경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민우가 계속 그를 설득했다.

“너라고 거물이 되지 못하리란 법 있어? 없지. 그러니까 안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일단 해보자. 우리 아직 젊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네가 말 같은 소리를 해야 고개라도 끄덕일 거 아니냐? 아니, 초빙은 둘째 치고 아랍에서 한국어문학을 유행시키는 거 자체가 가당키나 한 일이야?”

“그건 걱정 마.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한마디였다. 여전히 진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속은 달라졌다. 민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민우는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패 자체를 걱정하지 않았다.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리고 잘 안 풀린다고 해도 너한테 나쁜 건 아니잖아. 논문 많이 쓰고 강의 많이 한다고 해서 너 손해 보는 거 있어?”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진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우가 싱긋 웃었다.

“그럼 얘기 끝났네. 내일부터, 아니.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열심히 달려 봐. 쓸데없이 외제차타고 다니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자자, 어서 가서 공부해! 주예린 너는 다음 작품 준비하고!”

민우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너나 잘하라며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특별했다. 두 커플은 얌전히 연구실을 나서야 했다.

* * *

10월의 마지막 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민우는 기대를 한가득 품으며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동행한 레아는 차분히 게이트 전광판을 바라볼 뿐이다.

“비행기 연착됐나요? 생각보다 늦어지는 거 같은데.”

“쇼핑이라도 하고 있으시겠죠. 돈 쓰는 게 취미인 분이라서. 물론 캠벨 박사님이 아니라 제임스 편집장님 얘기입니다.”

“평가가 너무 냉정한데요.”

“냉정이라는 표현보다는 객관적이라고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제임스 편집장과 캠벨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제임스 씨! 캠벨 박사님!  」

민우가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반가운 마음에 제임스는 민우와 포옹을 했다. 이번엔 레아와 포옹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단번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  민우 씨. 이렇게 마중을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

캠벨 박사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민우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IAHS에서 남은 아쉬움이 일거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  박사님이 오신다는데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서 말씀 나누고 싶었습니다. 비행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

「  끔찍했죠.  」

캠벨 박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불만스런 눈빛으로 제임스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다시 민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  제임스 저 친구 옆자리에 앉는다는 건 늘 큰 시련입니다. 입이 쉬지를 않아요. 재앙에 가깝죠. 어떻게 보면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운명이라고 할까요.  」

「  하하하! 맞아요. 좀 그런 면이 있으시긴 하죠.  」

신화학적 위트에 민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발뺌했고, 레아는 시계를 보더니 슬슬 이동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주차장으로 가 레아의 차에 올랐다. 제임스 편집장이 배려를 해준 덕에 민우는 뒷자리에 캠벨과 나란히 앉았다.

차가 출발하고, 민우가 캠벨 박사에게 물었다.

「  박사님. 한국인류학회에서 보낸 메일은 잘 받으셨죠?  」

「  덕분에 잘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친절하게 식순과 논문집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한국어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초록 정도만 영어로 되어 있더군요.  」

「  확실히 학술 교류에 있어서 언어는 큰 장벽인 것 같아요.  」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민우는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인쇄물을 하나 꺼냈다. 차 안은 어두웠다. 그것을 받아든 캠벨 박사는 뒤쪽 라이트를 켰다.

「  인류학논총이라. 유니버설한 제목이군요. 날짜를 보니 내일로 되어 있고. 혹시 이번 학회에 발표될 논문집입니까?  」

「  맞습니다. 발표가 어떤 내용인지 알아야 더 의미가 깊을 것 같아서 번역을 해봤어요. 박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문판입니다.  」

「  놀랍군요.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

담담한 어조로 고마움을 표했지만 캠벨 박사의 두 눈은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보람이 있었다.

캠벨 박사가 물었다.

「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

「  순항 중입니다. 얼마 전에 어시스턴트를 두 명 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좀 여유가 생겼어요. 번역이론서 출간 작업도 다 끝났고요.  」

「  다행이군요.  」

캠벨 박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바라던 일이 잘 풀렸다는 그런 기색이었다.

「  아주 좋습니다. 제가 제안을 드리기가 한결 수월해졌군요.  」

「  어떤 건데요?  」

「  그건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나누도록 하죠. 여긴 귀가 많으니까요.  」

앞자리에 앉은 제임스 편집장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캠벨 박사는 본 척도 않고 눈을 감았다.

피곤에 지친 표정이라 민우는 그가 쉬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 거지?’

왠지 그 제안을 하기 위해 그가 한국까지 온 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차가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민우의 가슴이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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