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 < 85장. 저력(底力) (1) >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대 그룹의 영애였던 정연주, 그리고 하지은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물론 그들은 민우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민우와 대화를 깊게 나눈 건 대부분 교수 등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일부 사람들이었다. 그들만이 민우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 박민우 교수님 아니십니까?”
또다시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수염을 짧게 기른 젊은 사내였는데, 개방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민우는 기꺼이 그와 악수했다.
“예. 반갑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윤오입니다. 한강대 철학과에 적을 두고 있지요. 그나저나 요즘 활약 대단하시던데요?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도 잘 읽었고요. 특히 전에 발표하신 논문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민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여섯 편의 논문을 써서 KCI 등재지에 발표했다. 그중 철학과 교수가 읽고 인상을 받을 만한 논문을 찾았다.
“혹시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의 재조명’을 읽어 주신 겁니까?”
“맞습니다.”
“그러셨군요. 이거 좀 부끄럽네요. 석사 때 쓴 거라 많이 부족했을 텐데.”
“부족하다뇨. 체계적으로 실존주의 수용사를 잘 짚어주신 덕에 가끔 제 수업에 자료로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보니 선생님께 빚을 지고 있었던 셈이네요.”
이윤오 교수는 문학이 아니라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학 관련 논문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건 그만큼 민우의 논문이 대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빚이라는 말씀은 좀 지나친 것 같아요. 일단 앉으시죠.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말씀 좀 나누고 싶습니다.”
“하하.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앉기 전에 두 사람이 명함을 교환했다. 민우의 옆에 앉아 있던 연주는 살짝 목례했다. 이미 두 사람은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윤오 교수가 눈을 빛내며 민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논문을 쓰신 겁니까? 수용사뿐만 아니라 최신의 실존주의 이론이 보이더군요. 프랑스 쪽에 인맥이 없으면 구하기 어려운 논문들인 것 같던데요. 아무래도 트렌드를 많이 타는 분야다보니.”
“소르본에 인연이 한 분 계십니다. 피에르 랑느 박사님이라고, 문학과 철학 등 여러 인문학을 연구하시는 분이죠.”
“아! 랑느 박사라면 저도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박 교수님은 국문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분과 인연이 닿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민우는 점잖게 웃으며 랑느 박사의 인연을 잘 구성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서 그의 저서를 번역한 것도 말했다.
이윤오 교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그럼 석사 1학기 때부터 랑느 박사와 어울리신 겁니까? 아무리 명인대라고 해도 국내 대학이라면 인맥에 한계가 있을 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운이 좋았죠. 때마침 학회가 열리고 랑느 박사님이 연사로 참여하셨으니까요.”
“아무리 운이 좋았다고 쳐도 당시 석사 1학기였는데······ 그 정도로 활약하셨다는 건 대단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겠네요.”
민우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신의 얼굴에만 금칠을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이번엔 이윤오 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단한 건 교수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이 모임에 초대된 분들은 하나같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일가라뇨. 아닙니다.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전 아직 덜 무르익었죠. 어린 나이에 전임교수가 된 것 빼고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확실히 철학계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있더라도 임팩트가 없어 아마 금방 잊었을 것이다.
‘역시 이 교수님도 배경이 좋으신 건가?’
그런 경우라면 연주처럼 가문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 생각을 금세 지웠다. 집안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실례였으니까.
사람을 대할 땐 그 사람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을 연마하는 민우가 가진 하나의 신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당신이 박민우요?”
누군가 자리에 끼어들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였는데 살집이 제법 잡혀 있었다. 그가 앉으니 테이블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목소리도 상당히 오만하고 무례했다.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민우에게 물었다.
무엇보다도 합석하려면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기본 예의였다. 그래서인지 연주와 이윤오 교수는 그를 썩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민우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오늘 처음 회합에 참여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생각보다 젊은데?”
사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민우를 뜯어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윤오 교수가 한마디 하려던 차에 민우가 한발 앞섰다.
“저는 소속과 이름을 밝혔는데 그쪽 분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군요. 이곳도 모임인 이상 나름의 룰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도휘요. 충우대 중문과 교수고.”
사도휘 교수는 못마땅한 눈으로 민우를 흘겨보았다. 마치 전임교수도 아닌 것이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냐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루카치의 안경을 쓰고 있던 민우는 렌즈 너머로 보이는 사도휘의 눈빛에서 탁한 기운을 읽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모임에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닌가보구나. 말 그대로 각양각색이야. 주의해야 할 인물에 가까워. 상아대의 유희윤 교수와 비슷한 성향이라고 할까.’
강제성이 없는 모임이다보니 디테일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사실 룰까지 따질 필요는 없다. 자신을 소개하고 호의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법칙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배제하면 되겠네.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
그래서 민우는 사도휘 교수에게 신경을 끄고 이윤오 교수와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번역이론서 출간 준비가 끝나서 앞으로는 센트럴북스 프로젝트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폴라리스도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고요.”
“말씀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시네요.”
이윤오 교수가 해맑게 웃었다. 그만큼 그는 민우에게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교수님께서 준비하시는 번역이론서 말인데요. 정말 기대가 큽니다. 통합 번역이론서라고 하던데 동시 출간되면 중국과 일본에서도 아주 난리가 나겠어요.”
“저도 내심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원고가 생각보다 잘 나왔어요. 명인대 교수님들께도 피드백을 받았는데 평이 괜찮았습니다.”
민우는 번역이론서 원고를 명인대의 강철훈 교수에게도 보여주었다.
강철훈 교수.
민우가 석사 1학기 때 함께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 명사(名士)로 비교문학과 번역문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그랬던 그가 민우의 원고를 보고 감탄을 했다. 자잘한 부분을 지적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원고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성공은 확실하겠네요. 명인대 교수님들이 좀 까다롭습니까? 웬만한 해외 대학 교수들 저리가라죠. 그런 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면······.”
그때 사도휘가 이윤오 교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이론서, 뭐 좋지요. 그 전에 박민우 교수님은 박사논문부터 완성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듣기로는 아직 박사과정생이라고 하던데요.”
“뭐라고요?”
반응한 것은 민우가 아니라 이윤오 교수였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은 연주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이 듣는 데도 그 정도인데 민우의 심정은 어쩔까.
하지만 오히려 민우는 태연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야. 이런 부류의 교수들은 패턴이 뻔하구나. 유희윤 교수를 대할 때와 똑같이 하면 되겠어.’
사도휘 교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여유까지 보였다. 연주의 도움으로 민우는 이 모임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사도휘 교수님. 학위가 이 모임에서 중요합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은 되어야지요. 당신은 학계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까? 플래티넘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 박사학위는 있어야지.”
“석박사 백만 명 시대입니다. 학위보다는 학자로서의 인성과 역량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학위가 아니라 업적일 텐데요.”
민우는 교묘히 웃으며 반문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사도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반문은 자신의 불손한 태도를 꼬집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도휘 교수는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앞으로 종종 봅시다. 박민우 교수.”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채 사도휘 교수가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이윤오 교수도 실례의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테이블엔 민우와 연주 두 사람만 남았다.
“웬 미꾸라지가 한 마리 있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생기곤 해요. 드문 일이긴 한데······ 사도휘라는 사람 오빠 아는 분이에요?”
“전혀.”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휘 교수와의 접점은 찾을 수 없었다.
원한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한번 찔러본 것 같았다.
“오빠가 부러웠나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줄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연회장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이윤오 교수님이 말씀하신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는 뭐야?”
“플래티넘이 국내 모임이라면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 모임이에요. 각 국의 플래티넘 회원들이 모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말하자면 본선 같은 건가?”
“그런 느낌이에요. 최근에 중동 쪽에서 새로운 멤버들이 많이 늘었는데 그래서 규모가 상당히 커졌어요. 아무래도 자본력이 있는 사람들이다보니까요.”
“석유 왕자님들인가.”
“비슷해요.”
“다이아몬드 모임은 언제 있는데?”
“비정기적이에요. 보통 한 달 전에 개최 알림이 가요. 플래티넘 회원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요.”
민우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가능성과 사업 아이템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모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잘 이용한다면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겠어.’
김지형 회장이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뭔가 큰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 강의.’
시계를 한 번 살펴본 민우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연주도 잔을 내려놓았다.
“난 슬슬 일어나야겠는데? 이따 강의가 있어서.”
“청문대로 가실 거죠?”
“그래야지.”
“같이 가요. 저도 어차피 출근해야 하니까요.”
“유 실장님 기다리고 계시나? 그럼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겸 신세 좀 져 볼까.”
하지은은 이미 다른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우와 연주는 그쪽으로 가 지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곤 연회장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 민우는 플래티넘 소사이어티의 회원가입신청서를 작성했다.
곧 회원 가입이 완료되었다.
* * *
청문대에 도착한 민우는 유진태 실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연구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디 갔나?’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봐서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민우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커피를 한 잔 채웠다.
그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선배님!”
민우는 깜짝 놀랐다. 손님은 주예린이었다. 그 뒤로 한진섭의 모습도 보였다.
“웬일들이야? 연락도 없이.”
“저 보고 싶어 하실 거 같아서 왔어요.”
“야 진섭아. 얘 약은 제때 먹이고 있냐?”
“선뱃!”
주예린이 발끈했다. 눈치가 빠른 한진섭은 소파에 앉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민우는 오랜만에 주예린과 안부를 나눴다.
박사 입학을 단념한 뒤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밀린 이야기가 꽤 많았다. 주예린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자랑했다.
“드라이브 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오늘 오전에 차 나왔지롱.”
주예린이 차키를 손가락에 넣고 한 바퀴 돌렸다. 벤츠 로고가 선명히 보였다.
“자랑하러 왔구나? 딱 각 나오네.”
“겸사겸사요.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으니 섭이 오빠 태우고 온 거예요.”
“뭐 샀다고 했더라?”
“E클래스요.”
“생각보다 덜 비싼 거 샀네. 좋은 차 산다고 노래를 부르더니만.”
“첫 차기도 하고 그냥 싼 맛에 타는 거죠.”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돈 좀 만지더니 허세가 많이 늘었다. 물론 그녀가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비싼 차는 아니긴 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옛 정을 생각해 꾹 참았다.
그때 진섭이 물었다.
“너 모임 다녀왔냐? 초대장 받았다며. 오늘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아, 거기.”
민우도 소파에 앉았다. 그에게 해줄 말이 정말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