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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27화 (227/500)

227화 : < 84장. 초대장 (3) >

검은 세단이 시내를 조용히 누볐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이른 시간부터 운전대를 잡았지만, 유진태 실장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회합에는 오랜만에 나가시는 것 같군요. 무슨 바람이라도 부신 겁니까?”

“웬만하면 안 나가려고 했는데······ 지은이가 오랜만에 보자고 연락이 왔어. 따로 보기도 어려우니까 출근하는 길에 보려고.”

“지은 님이라면, 명일그룹의 하성호 사장님 차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물으며 유진태 실장이 룸미러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마침 신호가 걸려 유진태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하품을 하는 연주의 모습이 때마침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 어떤 것보다도 귀엽고 예뻤다.

유진태가 전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벌써 귀국하신 모양이네요. 요 근래 계속 미국에 체류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공부 다 끝내고 왔대.”

“이제 심심하진 않으시겠어요. 또 아가씨 여기저기 끌고 다니실 게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흐음, 아무래도 제 일이 늘어나겠군요. 워낙 왈가닥이셔서.”

“그런가?”

연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유진태 실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진 자신과는 달리 외향적인 친구였으니까.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응.”

차가 골든팰리스 호텔 정문에 섰다. 번호판을 알아본 도어맨이 차 문을 직접 열어주었고, 연주는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꺄! 정연주!”

코트를 걸친 젊은 여자가 연주에게 달려들었다. 단발 보브펌의 귀여운 아가씨였는데, 바로 그녀가 차 안에서 회자되었던 하지은이었다.

두 사람이 반갑게 포옹했다.

연주가 하지은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 이 지지배야. 너 온다니까 이렇게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나저나 이게 얼마만이야? 백만 년 만이던가?”

“백만 년은 무슨. 일 년이지.”

하지은은 얼마나 반가웠는지 두 손으로 연주의 뺨을 감싸 쥐었다. 급기야는 이마를 대고 부비기까지 했다. 친근함의 표시였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좋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아까 플래티넘 회장님께 들었는데 말야. 너 요즘 모임에 안 나왔다면서?”

“굳이 나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서.”

“교육 사업 한다는 애가 그렇게 낯을 가리면 돼? 여기저기 사람도 만나고 다니면서 정보도 얻고 도움도 청해야지. 앞으론 부지런히 나와!”

“생각해 볼게.”

“어허. 생각해 볼게가 아니라 나올게라고 해야지.”

“알겠어. 나갈게.”

그제야 하지은이 싱긋 웃으며 연주의 팔짱을 꼈다.

“자! 어서 들어가자. 추워 죽겠어. 으으.”

“그러니까 왜 나와서 그러구 있었어?”

“보고 싶었으니까.”

“얘도 참.”

하지은은 연주의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될 만한 여자였다. 연주와는 동갑이었고, 가업 때문에 어려서부터 연주와 어울리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독특한 구석이 좀 있다. 집안의 규모를 가지고 친구를 가려 사귀지 않았다. 마음이 맞으면 그날 바로 친구를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워낙 활동적이라 각계각층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 생활은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고, 배울 것도 많았고. 그래도 좀 외롭더라. 역시 한국이 최고라니깐.”

두 사람은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호텔 정문으로 들어가 연회장으로 향했다. 플래티넘 소사이어티 때문인지 아침부터 로비에 사람이 많았다.

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많은 곳에 들어서면 약간 답답함을 느끼는 그녀였다.

“사람 많다.”

“이번에 신입 좀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안 오던 사람들도 왔나봐. 신입 얼굴 보러.”

“신입?”

그때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정중히 카드를 요청했다. 연주가 핸드백에서 금빛 카드를 꺼내 보이곤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하지은도 연주와 똑같은 절차를 밟으며 대답했다.

“회장님이 욕심이 많으셔서 그런지 모임 규모를 좀 키우고 싶으셨나봐. 이번에 세 명 추가로 받았다던데. 아! 맞아. 그 훈남. 박민우 교수. 네가 매번 이야기 하던 그 오빠야 있잖아. 이번에 초대받았다고 하던데?”

“뭐?”

연주는 화들짝 놀랐다. 여기에서 민우의 이름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모르고 있었어?”

“요즘 소식지 같은 것도 잘 안 보거든. 쌓아만 둬서······ 근데 오빠가 오려나 모르겠네.”

“다른 모임도 아니고 플래티넘인데 설마 안 오겠어? 다들 못 들어와서 안달인 곳인데. 여기 다이아몬드 쪽하고 연결되면 대박이잖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구.”

“그건 그렇지만 오빠는 좀 특이한 사람이거든.”

연주가 이해하고 있는 민우라는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 일엔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민우가 이곳에 왔으면 하고 바랐다.

작은 설렘을 품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연주. 그때 시선이 멈췄다. 때마침 민우가 막 호텔 로비로 들어오고 있었다.

환하게 웃은 연주가 손을 흔들었다.

“민우 오빠!”

깜짝 놀란 민우가 가만히 서서 연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민우는 이 상황을 금방 이해했다. 젊은 지성들의 모임이라면 그녀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배경도 훌륭하고 머리도 뛰어났으니까 말이다.

민우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연주 너도 여기 회원이었어?”

“네. 스무살 때부터요.”

“잘됐다. 밑도 끝도 없이 초대만 받아서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혹시 납치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오는 내내 머릿속으로 소설을 썼어. 장소가 골든팰리스가 아니었다면 안 왔을걸?”

납치 부분에서 연주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는 괜히 말했나 싶어 옆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모임에 대해서는 너한테 들으면 되겠다.”

“예, 제가 다 알려 드릴게요.”

그때 따가운 눈빛을 느낀 민우가 연주의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하지은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 교수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하지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민우가 어색하게 인사하자 연주가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미술을 전공하는 자신의 소꿉친구라고. 그제야 민우도 표정을 펴고 다시 인사했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미술 쪽은 문외한이라 말씀 좀 청해야겠네요. 배우는 걸 좋아하거든요.”

“인문학하시는데 미술 공부가 필요하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시야를 넓히면 인간의 행위 자체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미술사조와 문학사조는 서로 관련이 커요. 하나의 예술사조로 묶기에는 다른 점도 많고요. 문학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미술사조를 공부하면 편견이 생길 수 있는데, 지은 씨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네요.”

“연주야. 나 이 오빠랑 완전 말 잘 통할 것 같아!”

하지은이 본색을 드러내자 연주가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에서였다. 그제야 하지은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제가 초면에 너무 날뛰었네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날뛰었다니 어휘 선택이 좀 독특하신데요? 연주 절친이시니까 저한테도 동생인데요 뭐. 신경 쓰지 마세요.”

“동생이면 저도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방금 전에 이미 오빠라고 하셨습니다.”

“앗차, 그럼 말씀 편히 하세요. 동생한테 존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진도가 꽤 빨랐다. 민우는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연주는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고 두 사람을 떠밀었다.

민우가 물었다.

“그냥 들어가도 되나?”

“아뇨. 혹시 초대장 들고 오셨어요?”

민우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연주는 그것이 증표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민우는 직원에게 다가가 초대장을 건넸다.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초대 받아서 왔습니다. 처음이네요.”

“안녕하십니까. 방문을 환영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뭔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 그의 손에 금색으로 된 카드가 들렸다. 민우의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 있었다.

직원이 카드를 민우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이 카드를 소지하고 계셨다가 앞으로 회합이 있을 때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회원 가입은 모임이 끝나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충분히 즐기신 후에 다시 와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카드를 받아든 민우는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연주 일행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족히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허, 생각보다 엄청난데?’

다들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들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민우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곧 자신이 속한 테이블에 집중을 했다.

그 찰나의 순간 민우는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다들 젊다. 마흔 넘은 사람들은 한 명도 없는 거 같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눈썰미가 좋은 민우는 그 사실을 바로 집어냈다.

거의 사실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걸 강조하는 만큼 플래티넘 소사이어티엔 나이 제한이 존재했다. 만 35세 미만만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연주가 말했다.

“아무 데나 앉으면 돼요. 자연스럽게 합석을 해도 좋은데 오빠가 처음이시니까 따로 앉는 게 좋겠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연주가 앞장 서 자리를 안내했고, 세 사람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민우는 주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야? 전부 석박사들은 아닐 거 같은데. TV에서 본 거 같은 얼굴들도 꽤 많네.”

연주가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하지은이 선수를 쳤다.

“아주 다양해요! 각계각층의 전도유망한 분들이 초대를 받으시죠. 연주나 오빠처럼 학문을 하는 분들도 있고 기업을 이끄는 분들도 있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구나. 이거 왠지 내가 초대받을 자리는 아닌 거 같은데. 다들······.”

민우는 ‘집안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은 생략했다. 두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 오빠좀 봐. 왜 아니에요? 인터넷에서 요즘 핫하잖아요. TV에서도 자주 봤어요. 말씀 정말 잘하시던데요? 안 그래도 연주한테 한번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 소개라는 말에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확실히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어 있었다. 임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민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핫하긴요. 인터넷에서 인기는 잠깐이죠. 곧 거품이 꺼질 겁니다.”

“어머, 겸손이 지나치시네. 다른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예능에도 나갈 거라는 기사도 떴었고요.”

“그런 제안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거절했어요. 몸에 안 맞는 옷 입는 거 같아서.”

그때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했다. 뒤늦게 누군가의 등장을 알아챈 하지은도 일어났다. 민우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다.

“환영합니다. 박민우 교수님.”

정장을 단정히 걸친 젊은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민우가 악수를 받았다.

“전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지형입니다. 갑작스런 초대에 놀라지 않으셨나 걱정이네요.”

“좀 놀라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교수님의 최근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맨부커 상도 타시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면서 차분히 명성을 쌓고 계시더군요. 제 눈엔 무척 흥미롭게 보였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긋 웃은 김지형은 몸을 반쯤 돌리며 연회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습니까? 교수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임이 말입니다.”

자랑스러움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하지만 민우는 솔직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아는 친구를 만나서 도움을 받고 있긴 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는 연주와 민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뭐, 큰 부담을 가지실 건 없습니다. 그저 아침에 잠시 모여 식사를 하고 티타임을 갖는 모임일 뿐이니까요. 여기에서 어떤 것을 얻어 가실 건지는 박민우 교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의기투합하여 함께 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잠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겠지요. 모쪼록 충분히 즐겨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군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정중히 인사한 김지형이 물러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우는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의기투합하여 함께 사업을 한다?’

과연 이중에 그럴 사람이 있을까. 민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군상들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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