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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26화 (226/500)

226화 : < 84장. 초대장 (2) >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에서 마무리할게요. 오늘 배운 내용은 중요하니 복습 잘 하고요. 과제는 인트라넷에 공지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 출석 못 부른 학생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질문이 있는 학생들도.”

민우가 선 연단으로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각 체크를 끝내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준 뒤에야 강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민우가 잠시 멈추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보였다. 가로수에는 짙게 물든 단풍이 한창이었다. 그 밑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캠퍼스를 거닐고 있었다.

‘처음엔 학생들이 남처럼 보였는데 이젠 아니란 말이야. 모두가 내 제자인 것처럼 묘하게 정이 가기 시작했어.’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청문대의 여러 학생들과 어울리며 점차 마음을 열어가는 중이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이곳도 모교인 상아대 이상으로 정을 붙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나저나 벌써 가을이구나······ 시간 참 빠르네.’

상아대를 졸업하고 명인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박사 2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건 그만큼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틈은 없지. 내년엔 박사논문을 미리 써놔야겠어. 박사 수업은 피할 방법이 있지만 논문은 피할 수 없으니까. 한 번에 통과할 수 있게끔 신경 써서 써야해.’

민우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일단 번역이론서가 출간되면 바로 <더 위자드> 3부 번역에 들어간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박사논문을 쓸 계획이었다.

민우는 이번 박사논문의 기초를 송현우 교수의 선집으로 정했다. 그의 문학사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할 생각이었다. 대강의 계획은 이미 세워 둔 상황이었다.

그때 문득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애틋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수빈인 이번 겨울에 오려나? 요즘 많이 바빠졌다던데 못 오거나 하진 않겠지?’

날이 쌀쌀해지니 옆구리가 시려진 민우였다. 아무리 자주 연락한다고 해도 몸이 멀리 있으니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우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민우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다.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국에서도 예쁜 여자들을 만날 일이 많았다. 유명세를 올릴수록 그에게 접근하는 이성이 늘어갔다.

그는 누가 봐도 일등 신랑감이었다. 외모도 준수한 편인 데다가 최근에는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독서의 밤’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번역가’라는 타이틀보다 ‘문화평론가’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입담이 늘었다. 거기에 굳은 신념과 인문학적 지식까지 갖추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꼴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민우는 수입 면에서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번역일도 했고, 방송 출연도 겸하면서 센트럴북스의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그의 수입은 웬만한 전문직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한 상황.

그래서일까. 실제로 민우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중엔 방송국 아나운서와 게스트로 출연한 가수도 있었으며 동료 교수도 있었다. 나이와 직종을 가리지 않고 많은 여자들이 민우에게 호감을 표했다.

이쯤 되면 보는 눈이 높아져 애인에게 소홀해질 만도 한데, 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굳건한 그의 신념처럼 수빈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움이 커질수록 그녀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져갔다.

‘학기 마치고 미국에 좀 다녀올까? 하버드 구경도 좀 하고. 몰래 가서 놀래키면 재미있겠는데. 간 김에 센트럴북스 본사도 견학하면 좋겠어.’

현실성 있는 스케줄이었다. 어차피 센트럴북스 본사에 한 번은 가봐야 하니 이번 기회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가 그의 등을 쿡쿡 찔렀다.

“어?”

살짝 놀란 민우가 돌아보곤 싱겁게 웃었다. 다름 아닌 정연주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에 고급스러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지금 수업 끝나신 거예요?”

“그래. 연구실에 가는 길에 단풍이 예뻐서 잠깐 넋 놓고 보고 있었네.”

연주도 민우의 곁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고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에 단풍을 담은 풍경이 한아름 들어왔다.

확실히 문학도들이 감수성을 느낄 만한 경치였다. 연주도 마음에 들었다.

“청문대는 캠퍼스가 참 예쁜 거 같아요. 교수님은 못 보셨겠지만 봄에 꽃이 피면 정말 예쁘더라고요. 명인대는 약간 황량한 느낌이 나는데.”

“여긴 캠퍼스가 작으니까 꾸미기 쉬웠겠지. 아무튼 봄이라······ 내년이 기대되는데? 돗자리 깔고 맥주 한 잔 하면서 꽃놀이 하면 딱이겠어.”

“내년엔 꼭 다 같이 모여서 꽃놀이해요.”

“좋지.”

민우가 다시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바싹 연주가 따라 붙었다.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있죠. 전에 주신 기획서 통과됐어요. 다음 달부터 바로 지원에 들어갈 거예요. 예산 집행 서둘러 달라고 특별히 얘기해 놨어요.”

“벌써? 생각보다 빨리 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 일인데 신경 써야죠.”

민우는 멋쩍게 웃어 넘겼다. 연주는 단풍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민우는 이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구실은 어디로 배정이 됐어?”

“지금 쓰시는 곳에서 멀면 좀 불편하실 것 같아서 근처에 있는 빈 연구실 중 가장 넓은 곳으로 잡았어요. 지금 쓰시는 곳보다 세 배는 넓을 거예요.”

“세 배? 그렇게 넓은 곳은 필요 없는데.”

“나중에 아카데미 수업도 연구실에서 하면 좋을 거 같아서 넓은 곳으로 잡았어요. 강의실을 따로 받기는 번거로우니까요.”

“아, 확실히 그러네. 강의 공간을 연구실에 따로 마련하면 되겠구나. 좋은 생각이다. 땡큐.”

확실히 연주가 기획서를 괜히 안 읽은 게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폴라리스 프로젝트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근데 정 실장은 어디 가는 길이야?”

“교수님 뵈러 가는 길이었어요. 지금쯤이면 수업이 끝났을 거 같아서 강의실로 가다가 마침 만난 거예요.”

“그랬구나.”

“저······ 괜찮으시면 오늘 저녁 같이 드실래요?”

연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민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어려울 거 같네. 요즘 일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거든. 아니면 내일 잠깐 점심이나 같이 하는 건 어때?”

“좋아요. 그럼 제가 시간 맞춰서 교수님 연구실로 갈게요.”

“그럼 애들한테도 말해 둔다.”

연주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서운했다. 애들이라면 두 조수들도 합석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붙잡는 것. 그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연구실로 들어온 민우는 이다혜가 준비해 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몇 시간 되지 않지만 서서 강의를 한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스테미너를 회복한 민우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한창 작업 중인 조수들을 불렀다.

“전에 말한 기획안이 통과됐다. 그래서 너희들이 프로젝트 어시스턴트 겸 조교로 일할 수 있게 됐어. 나 약속 지켰다?”

“오예!”

이다혜가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남희석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혜가 물었다.

“그럼 월급도 더 받는 거죠?”

“당연하지. 대신 일은 좀 늘어날 거야. 행정업무가 추가 되니까. 다혜는 어차피 전업이니 상관없을 거고, 희석이가 좀 걱정이네. 넌 학생이니까 잘 생각해 보고 확답을······.”

“휴학하겠습니다.”

남희석은 마치 전쟁을 앞둔 장수처럼 진지하게 한마디 했다. 이다혜는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고,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희석아.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응? 졸업은 빨리 하는 게 좋아. 어차피 너 취업 안 하고 바로 번역일 할 거니까 학위는 빨리 따야지. 곧 방학이니 3개월 정도 해 보다가 안 되면 쉬면서 하는 방향으로 하자.”

“교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니 네 생각을 얘기해 보라니까.”

“교수님의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오빠는 무슨 교수가 아니라 교주님이 된 거 같은데요? 이 정도면 신앙이라구요. 신앙!”

이다혜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민우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로 나오는 연구실 설명까지 마친 민우는 두 사람을 돌려보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액정을 확인한 민우가 반가운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어땠어?”

― 이 자식 급하긴 했나보네.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으면 안부부터 물어 줘야 하는 게 예의 아니냐?

“뭐가 오랜만이야? 일주일 전에 봤는데. 사내들끼리 일주일이면 자주 보는 거 아닌가?”

― 난 정말 빡센 한 주를 보냈다고. 누구 덕분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강일이었다. 민우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곧 서강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 아무튼 바쁘니 본론부터 말하마. 이런 말하기 정말 부끄러운데 내 수준으로는 피드백할 부분이 안 보여. 교수님들께 보여드리는 게 좋지 않나 싶다.

“이미 교수님들껜 피드백 받았어. 얼추 다 수정하고 마지막으로 너한테 맡긴 거야.”

― 나를 마지막으로? 왜?

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해주는 게 좋을까 싶었던 것이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나랑 가장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내가 쓴 내용을 잘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최종보스로 설정했지.”

―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영 헷갈리네.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아무튼 고맙다. 다음에 술 한잔 살게.”

― 그걸로 퉁 칠 생각하지 마라. 조만간 박사논문 초본 들고 쳐들어갈 테니까.

“얼마든지.”

전화를 끊은 민우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번역이론서 원고를 USB메모리에 옮긴 뒤 청문대 출판문화원 사무실로 향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명저의 출간이 마무리단계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 * *

현관문을 연 민우는 힘겹게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목소리가 꽤 지쳐 있었다. TV를 보던 어머니가 민우를 맞았다.

“왜 그렇게 매가리가 없니? 저녁은?”

“대충 먹었어.”

“대충 먹으면 돼? 엄마가 볶음밥 맛있게 해줄까?”

“됐어. 밤늦었는데. 어서 주무세요.”

방으로 들어온 민우는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번역이론서 작업을 하는 내내 운동을 쉬어서 그런지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민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방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쩐다. 참가해야 하나?’

민우는 침대에 누운 채로 금박이 입혀진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열었다. 초대의 말 뒤에는 모임 일시와 장소가 써 있었다.

거기엔 간단한 소개와 함께 단체 이름도 적혀 있었다.

‘플래티넘 소사이어티······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긴 한데. 플래티넘이라면 각 분야의 최고들이 모인 단체라 이건가?’

민우는 그렇게 추측했다.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게, 소개문에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다만 ‘새 시대를 이끄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이라는 불친절한 설명만 있을 뿐이었다.

모임 장소는 골든팰리스 호텔이었다. 모임 시간은 다음 주 월요일 오전 7시 40분.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민우는 초대장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한번 가 보지 뭐. 초대를 받았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가서 어떤 곳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오자. 학자적 마인드로.’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 민우는 눈을 감았다. 잠에 곯아떨어진 것은 금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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