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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25화 (225/500)

225화 : < 84장. 초대장 (1) [9권 끝] >

「  정말 캠벨 박사님이시라고요?  」

「  맞습니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흐음. 그럴 만도 하겠네요. IAHS가 작년에 열렸으니 좀 오래 된 일이긴 합니다.  」

「  아아뇨. 기억납니다. 실은 좀 당황스러워서요. 이렇게 전화를 주실 줄은······.  」

민우가 어떻게 해야 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 이다혜는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이었다. 민우는 하던 일 마저 하라고 손짓했다.

이다혜가 움찔하며 물러섰고, 곧 핸드폰에서 캠벨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연락이 조금 갑작스럽긴 했네요. 메일을 보내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직접 통화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를 했습니다. 실례가 됐나요?  」

「  아뇨! 전혀요. 실은 IAHS 끝나고 박사님 연락 기다리고 있다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책 드렸을 때, 뭐라고 할까. 좀 언짢아 보이셔서요. 제가 괜히 기분을 망치게 한 건 아닌지······.  」

캠벨 교수의 세션에 참여했을 때 최민식과 공저한 책을 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캠벨 교수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썼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전화를 했다. 대체 무슨 목적일까?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  아아, 그건 미안합니다. 그때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오해를 하셨군요.  」

캠벨 박사가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웃음소리에 민우는 마음을 한결 놓을 수 있었다.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오해도 마찬가지.

캠벨 박사의 해명이 끝날 즈음에 민우는 미소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침부터 기분 안 좋으셨겠어요. 설마 학회장에 그런 사람들이 난입할 줄이야.  」

「  그나마 주최 측에서 손을 써 줘서 험한 꼴은 안 당했지요. 어딜 가나 극성인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때는 좀 예민했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죠.  」

「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죠.  」

여유 있게 대꾸한 민우는 해맑게 웃으며 이어질 캠벨 박사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괜히 안부 차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민우 씨가 그때 준 책은 잘 읽었습니다.  」

「  감사드립니다. 실례지만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겁니까?  」

「  아닙니다. 언어 문제 때문에 다 읽지는 못하고 몇 챕터만 읽었습니다. 여기 대학원생 중에 한국인 학생이 한 명 있어서 번역을 부탁했지요.  」

「  그렇군요. 박사님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큰 실례가 되지는 않았나 걱정이네요.  」

물론 처음에 캠벨 박사는 민우의 책을 읽을 생각이 없었다. 버리려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가 깜빡하기까지 했다.

만약 제임스 편집장이 그 책을 두고 ‘30년 지나 봐. 분명 프리미엄이 붙을 테니까’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조심스럽게 운을 뗀 민우의 온 신경이 전화기에 쏠렸다. 과연 그의 평가는 어떨까. 호평일까, 아니면 악평일까?

「  전혀요. 아주 좋았습니다.  」

민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쾌감이 몰아쳤다. 석사논문 심사를 통과할 때도 이 정도로 짜릿하지는 않았다.

「  제 이론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이해하고 계시더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번역이 잘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쾌하고 좋았습니다. 완역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  정말 다행이네요.  」

민우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대체 무슨 통화일까. 이다혜는 턱을 괴며 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웃을 땐 따라 웃고, 긴장할 땐 같이 긴장했다.

「  덕분에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꽤 높은 수준으로 연구가 되고 있더군요. 학문적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한번 방문해 보려고 합니다.  」

「  예? 한국에 오신다고요?  」

「  그렇습니다.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편집장이 제 친구입니다. 이번 달 말에 한국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동행하려고 합니다. 그때 한번 뵐 수 있겠습니까?  」

제임스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묘한 부분에서 접점이 생겼다.

깜짝 놀란 민우가 잠시 멍하니 이다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신을 차렸다. 민우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  물론이죠! 제가 시간을 내겠습니다. 제임스 편집장님 스케줄은 받아 놨으니 다 비워 놓겠습니다.  」

「  아아. 다 비워 놓으실 건 없습니다. ‘인문과학총서’ 때문에 여러모로 바쁘시다는 거 잘 알고 있지요. 거기에 제 저술도 들어가 있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

「  맡겨만 주세요.  」

「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 혹시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학회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국의 학회는 어떤지 견학을 해 보고 싶습니다만.  」

민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민우는 학회 정보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달 말에 잡힌 메이저 학술대회는 없었다.

물론 그건 문학 분야에 한정한 이야기였다.

신화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학술대회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  일단 제가 알아보고 연락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메일 주소 하나 알려주시면 그쪽으로 일정이나 자료집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민우는 캠벨 박사가 불러주는 주소를 급히 메모했다. 그리고 또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다. 민우는 몸을 축 늘어트리며 의자에 기댔다.

“후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이다혜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렇게 각 잡고 받으세요? 백악관에서 전화라도 왔어요?”

“아니. 외국에 유명한 박사님이 연락을 하셨네. 내 책 흥미롭게 읽으셨다고. 한국에 오신다고 해서 일정 좀 잡느라 그랬어. 나도 깜짝 놀랐다.”

“어머머머. 오빠 인정받은 거예요? 그 유명한 박사님께?”

“글쎄. 아마도 그런 거 같은데······.”

버릇처럼 겸손을 표했지만, 민우는 확신했다. 자신의 책이 명쾌하고 좋았다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이다혜가 박수를 쳤다.

“그럼 좋은 일이네요! 점심 맛있는 거 쏘세요. 네?”

“좋아! 기분이다. 오늘 점심은 특등급 한우야. 희석이한테 톡 넣어.”

“오예! 알겠습니당!”

폴짝 뛰며 좋아하는 이다혜를 뒤로한 채 민우는 창가에 서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었다.

* * *

조수들과 배불리 점심을 먹고 돌아온 민우는 바로 자리에 앉아 학회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신화학 및 인류학 분야의 학회 정보를 뒤졌다.

일정을 모아둔 캘린더를 찾아보던 민우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캠벨 교수와 제임스 편집장의 입국일 다음 날에 열리는 학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학회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회원수도 꽤 많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네.’

학회명은 한국인류학회였다. 학회 홈페이지를 충분히 살펴보고 검토한 민우는 즉시 학회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청문대 교양학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박민우라고 합니다. 예. 예. 반갑습니다. 하나 문의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는데요. 조너던 캠벨 박사님과 함께 학회에 참여하고 싶은데 공식 초대를 받을 수 있나 해서요.”

「  네? 캠벨 박사님이요?  」

총무간사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화학 및 인류학 분야에서 캠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정말 죄송한데 전화 거신 분이 어디에 누구시라고 하셨죠?  」

“청문대의 박민우입니다. 간사님. 너무 놀라지 마세요. 장난전화 아닙니다. 음, 그게 좋겠네요. 간사님도 학회장님께 보고 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까 저희 교양학부 이름으로 공문을 하나 보내드릴게요.”

「  아, 그래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교양학부 조교실로 전화를 걸어 공문을 하나 준비시켰다. 대강의 양식과 내용을 전달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긴, 대뜸 캠벨 박사님이 학회에 참여하겠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어?’

작은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참 후 한국인류학회 총무간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문이 확인되자 학회 초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민우는 한국인류학회 측에 캠벨 박사의 메일을 전달해 직접 초대를 하게 했다.

‘이걸로 학회 건은 얼추 마무리가 됐고. 이제 폴라리스 지원 사업 신청을 할 차례인가?’

민우는 미리 작성해 둔 기획서를 출력해 파일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이라면 연주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어디 가시게요?”

“너희들 돈 벌어다 주러.”

“대박! 뭔진 모르겠지만 후딱 다녀오세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오냐. 좋은 소식 잔뜩 가지고 오마.”

민우는 남희석과 이다혜를 조교로 채용하기로 했다. 아예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것보다 번역 쪽으로 이해가 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보다 할 일이 더 늘어나겠지만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보수도 두 배 정도로 늘어나니 학비는 물론 생활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그렇게 민우는 연주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향긋한 봄 향기가 사무실에 한가득 차 있었다. 연주가 살짝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로 다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서운하네. 우리 연락 하고 와야 하는 사이였나?”

“그런 건 아니지만.”

한달음에 다가온 민우가 들고 있던 파일을 연주에게 건넸다.

“이건 뭐예요?”

“프로젝트를 하나 해볼까 하는데 지원 요청 좀 하려고.”

“폴라리스 프로젝트네요.”

파일을 열어본 연주가 미소를 지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대강의 내용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런던에서 애플티를 마시며 민우는 폴라리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연주는 기획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결재를 했다.

“야, 잠깐만.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막 싸인 해도 되는 거야?”

“읽어보지 않아도 뭔 내용인지 아니까 괜찮아요.”

“아니.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지원내역을 확인해야지. 돈이 걸린 문제인데. 학교에서 해 줄 수 있는 선인지 확인해야 할 거 아냐.”

“학교에서 해 줄 수 없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해드릴게요.”

“개인적으로? 이거 한두 푼 드는 사업 아닌데.”

“얼마면 되는데요?”

싱긋 웃는 연주를 보며 왠지 모를 깊은 허무감을 느꼈다. 민우도 근래에 돈을 만지긴 했지만 금수저식 농담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교들 월급도 나가야 하고 사업 추진에 들어가는 비용 하면 연간 몇 억은 될 거야.”

“그 정도면 그냥 제 사비로 해도 되겠어요.”

민우는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연주의 순수한 미소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무튼 학교에서 지원을 받는 걸로 해 줘. 안 되면 문광부 쪽에 이야기를 해 보면 되니까 무리할 거 없다.”

“이번 달 내로 처리해 드릴게요. 프로젝트 사무실은 제가 따로 알아봐 드릴게요. 넓고 깨끗한 곳으로.”

“편의 봐주지 말고 그냥 공정하게 해. 뒷말 나오면 나도 그렇지만 너도 난처하잖아.”

“글로벌 프로젝트가 시작되는데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드려야죠. 뒷일은 걱정 마시고 저한테 맡겨 주세요.”

“든든하네.”

연주는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용건을 끝낸 민우가 사무실을 나서니 연주가 따라 나왔다.

“어디 가게?”

“교수님 오신 김에 바람 좀 쐬려고요. 사무실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답답하네요.”

사무실 밖에서는 민우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민우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그녀의 배려였다.

“나 교양학부 사무실에 잠깐 들를 건데.”

“그럼 거기까지 같이 갈까요?”

민우는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천천히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번역이론서는 언제 출간돼요?”

“이번 달 말쯤? 지금 최종 작업에 들어갔어. 지인들한테 부탁해서 검토 중이야. 이번 주 내로 원고 확정하고 편집 본 다음 바로 인쇄 들어가야지.”

“한중일 3국에 동시 발간되죠?”

“그렇지.”

“정말 대단하네요. 번역자도 없이 한 저자가 세 언어로 동시에 출간하는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던 거 같은데.”

“몰라. 그런 거엔 관심 없다.”

말은 그렇게 해도 큰 이슈가 될 게 분명했다. 연주의 말대로 지금까지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출판계와 학계가 뜨겁게 달궈질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교양학부 조교실이 나왔다. 민우는 작별인사를 건네고 조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교수님. 마침 잘 오셨네요. 우편 온 거 있습니다.”

“그래?”

행정조교가 민우에게 우편물을 건넸다.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봉투가 고급스러웠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서 온 거지?’

전혀 모르는 곳에서 온 우편이었다. 민우는 일단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꺼냈다. 마찬가지로 금박이 입혀진 고급스러운 편지지가 나왔다.

민우는 편지지를 펼쳤다. 짤막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 당신을 우리 모임에 정식으로 초대합니다. 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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