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 < 83장. 폴라리스(Polaris) (3) >
폴라리스 홈페이지는 회원제로 운영된다. 일단 창립 멤버가 필요하므로 민우가 초청한 세계 각국의 학자 및 번역가가 정회원이 될 예정이다.
서강일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홈페이지를 직접 시연했다. 페이지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여기가 커뮤니티고, 그리고 여긴 커뮤니티 내의 회원 게시판이야. 인증제로 운영되고 네가 초대를 해야만 들어올 수 있게 해 놨다.”
“심플하게 잘했네. 접근성이 상당히 좋은 느낌이야. 너 디자인 쪽으로도 소질이 있었구나?”
“알잖아. 나 만능형 인간이라는 거.”
“괜한 얘길 꺼냈네.”
한쪽에서 웹툰을 보던 강민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딴짓을 하면서도 이쪽 대화에 귀를 열어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강일이 물었다.
“근데 회원 모집은 어떻게 할 거냐? 창립멤버에서 끝나진 않을 거 아냐.”
“안 그래도 지금 회칙 다듬고 있어. 일정 기준을 충족시켜야 회원이 될 수 있게끔 하려고 해.”
“하긴, 무분별하게 받으면 물이 흐려질 수 있으니. 그래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폴라리스의 가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냐는 거겠지?”
“맞아.”
폴라리스는 비영리 번역기구로 운영된다. 인류의 공공이익과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 번역으로 힘을 보탤 사람을 찾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스펙보다는 그 사람이 지닌 열정과 가능성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수치화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쪽이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서강일이 폴라리스에 합류하게 된 것도 단순히 친구라서가 아니었다. 폴라리스의 철학이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우가 턱을 괴며 신중하게 설명했다.
“일단 공통적인 기준을 만들고 미팅을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 때로는 우리가 먼저 합류 의사를 전달하는 것도 좋을 거 같고.”
“모범 답안이네.”
궁금증을 모두 해소한 서강일이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시연을 계속했다.
“이쪽은 정보 공개 영역이야. 업계 정보 같은 걸 업로드하면 돼. 번역 관련 지원사업이나 신간 소식, 업계 현황을 카테고리별로 올릴 수 있어.”
“오케이.”
폴라리스는 기본적으로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이트였지만, 공개 영역을 따로 만들어 회원이 아닌 사람들도 번역관련 뉴스나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해 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정보공개요청 게시판’도 만들어 회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끔 했다.
나머지 기능도 모두 시연을 끝내자 민우가 환하게 웃으며 서강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주물렀다.
“아무튼 고생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그대로 구현돼서 정말 마음에 드네.”
“다행이군. 또 이것저것 달아달라고 할까봐 맘 졸였었는데.”
“나중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게 있긴 해.”
“뭔데?”
“지금 이야기 중이라 확답은 못해주겠는데······ 정부나 각 기관과 연계해서 번역 아카데미를 진행해 볼 생각이야. 폴라리스 이름으로.”
“너무 처음부터 이것저것 하려는 거 아니야? 당분간은 차분히 내실을 다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자신도 고민을 해본 내용이었다. 처음엔 서강일처럼 하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처음부터 몰아쳐야지 안 그러면 금방 흐지부지될 거야.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계속 이슈를 만들고 회원들을 이끌어 나가야지. 무엇보다도 지금이 몰아치기에 적기야. 맨부커 상도 그렇고, 최근 해외에 진출한 책들이 연일 호평을 받고 있어서 번역 관련 이슈가 많잖아. 한마디로 노 젓기 좋은 타이밍이지.”
“추진력 쩐다. 너 그러다 정치도 하겠다?”
“됐다. 허수아비 노릇엔 취미 없어. 아무튼 이걸로 오픈하고 창립 회원들한테는 내가 직접 연락을 할게. 당분간은 원고 검토 좀 해줘.”
“젠장. 왜 그 얘기 안 나오나 했네.”
서강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끊이질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본심은 아니었다. 민우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 증거로 서강일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다.
만약 민우라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할 말을 떠올린 서강일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하게 말했다.
“폴라리스 운영하려면 관리자가 두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회원 관리도 해야 하고 게시판 관리도 해야 하니까. 기타 잡일도 많을 거고. 사무실도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너 여유 좀 되냐?”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굳이 내 돈 안 쓰더라도 그 정도 도움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
“어떻게?”
“청문대에 요청하면 돼. 프로젝트나 벤처사업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거든. 신청해서 연구실이랑 조교 배정 받으면 될 거 같은데.”
턱을 긁적이며 서강일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런 제도가 대학별로 있긴 했다. 다만 선정 기준이 너무 높아서 문제였지만.
그래서 물었다.
“될 확률은?”
“백 퍼센트.”
“······뭔 자신감이야?”
서강일뿐만 아니라 웹툰을 보던 강민희도 기가 찬 눈으로 민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연구지원사업부문 책임자가 아는 동생이야. 지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번 폴라리스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도가 깊은 사람이지. 번역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거든.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했으니 도움을 청해 볼까 해.”
“그러다 안 되면?”
“안 되면 문광부 장관님께 제안을 해서라도 만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만 믿고 따라오기나 해.”
“이야. 인맥 쩐다 진짜.”
서강일은 못 말린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신과 집안이라는 무기로 인맥을 쌓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쌓은 인맥이었으니까.
민우의 실력이 늘어갈수록, 그의 주변에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서강일은 그런 민우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더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 * *
다음 날, 민우는 강의를 위해 아침 일찍 청문대로 향했다. 업무가 줄어들어서인지 레아는 요즘 무척 표정이 밝았다.
“덜 피곤해 보여서 좋네요.”
“예?”
“레아 씨 얼굴이요. 조수 구하기 전에는 아침에 늘 피곤해 보였었는데 요즘은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다 매니저님 덕분이죠.”
레아는 싱긋 웃었다. 확실히 민우가 말한 대로였다. 잔업 부담이 줄어드니 보다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달 말에 제임스 편집장께서 한국에 온다고 하시더군요. 들으셨나요?”
“처음 듣는 얘긴데. 무슨 일로요?”
“프로젝트 관련 미팅이라고는 하는데 관광이 목적이겠죠. 아마 동아시아 한 바퀴 돌고 서울에 오실 겁니다. 쌀쌀한 날에 먹는 라멘이 그렇게 맛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분이셔서.”
“제임스 편집장님······ 신뢰받고 있지 못하시네요.”
“매번 그러시니까요. 여비 제한에 걸려서 이코노미석을 탔다고 투덜거리는 거 모르는 직원들이 없죠.”
말은 그렇게 해도 레아는 제임스를 잘 따랐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채용한 것도 제임스였다고 들었다.
“그럼 조수들한테도 얘기를 해둬야겠네요. 소개를 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러시는 게 좋겠네요. 아주 값진 경험일 거예요. 세계적인 출판사의 편집장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흔치 않으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어느새 차가 청문대 주차장에 멈췄다. 민우는 레아에게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연구실로 향했다.
‘맞다. 이창호 선생님 논문 다 끝내셨다고 했지?’
민우는 살짝 방향을 바꿔 이창호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안에 있는지 마그네틱이 ‘재실’에 맞춰져 있었다. 민우가 살짝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 박 선생님! 안 그래도 연구실에 가보려던 차였는데 이렇게 오셨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확실히 논문이 끝난 게 맞긴 한가보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들렀어야 했는데 갑자기 술자리에 끼게 돼서 늦었네요.”
“아아. 뭘 그런 거 가지고. 괜찮아요.”
이창호 교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리 인쇄해 놓은 논문을 민우에게 건네며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민우는 차분히 논문을 검토했다. 전체를 볼 필요는 없었다. 체크했던 부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곧 민우가 웃으며 논문을 다시 돌려주었다.
“굉장히 잘 마무리가 됐네요. 이 정도라면 바로 게재 가능 판정 받으시겠어요. 역시 이 선생님이십니다. 감각이 있으시네요.”
“하하하. 내가 뭐 한 게 있습니까? 박 선생이 레퍼런스 찝어 준 거 읽고 쓴 거밖에 없는데.”
과한 칭찬에 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이가 가까워진 만큼 이창호 교수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진짜로. 박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 못 썼을 겁니다.”
“까마득한 후학의 의견을 오해 없이 잘 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어? 그렇게 까마득하진 않은데······ 박 선생 올해로 서른 아닙니까? 그럼 나이 다섯 개 차인데요 뭘.”
“다섯 개면 까마득하죠. 선생님 대학생일 때 전 중학생이었으니.”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확 와 닿네.”
분위기가 훈훈하게 이어지다 보니 사적인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다. 최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민우는 이창호 교수 덕분에 청문대 국문과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요컨대 이창호 교수가 청문대 국문과와 자신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논문 게재되면 연락할게요. 후문 근처에 괜찮은 포차가 있는데 거기 한번 갑시다. 내가 살 테니.”
“좋죠.”
민우는 이창호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때 마침 복도를 지나던 류재혁 교수와 마주쳤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박 선생이 여긴 어쩐 일인가?”
민우는 교양학부 소속이다. 이곳은 국문과 연구실이 모여 있는 곳이라 민우가 올 일은 별로 없었다.
“이창호 선생님 좀 만나고 가는 길입니다.”
“아하. 얘기는 들었네. 논문 많이 도와줬다면서? 이창호 선생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인데 박 선생 칭찬은 그렇게 입이 닳도록 하데.”
류재혁 교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을 흥미롭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쉰 넘은 정교수의 눈치는 대단했다.
“난 이번 심사 건으로 자네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더군. 정연주 이사가 어려서부터 미국 유명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은 천재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람 보는 눈까지 있을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이 선생님이 많이 양보해준 덕분이죠.”
“과연 그럴까?”
류재혁 교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논문 심사지를 받아든 그는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회유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민우가 단순히 실력만 갖춘 엘리트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잘 풀어간다면 우리 과 선생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겠지. 국문과로 오고 싶다고 들었는데······ 목표를 꼭 달성하길 바라네.”
“선생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내가 뭔 힘이 있나. 그저 지켜보는 정도지. 허허허. 그럼 다음에 또 보세. 내 갈 길이 바빠서 말이야.”
류재혁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곤 갈 길을 갔다. 민우도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이다혜가 일어서서 맞았다.
“오셨어요?”
“그래. 아침은 먹었어?”
“말도 마세요. 오빠 덕분에 요즘 매번 진수성찬이에요.”
“나 때문에?”
“유명 출판사 프로젝트 하게 됐다니 엄마 태도가 싹 바뀌는 거 있죠. 매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리세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좋은 거겠지. 몸도 건강해지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잖아. 잔소리 때문에 시달렸다며? 그나저나 월급날 조심해야겠네. 너희 어머니 무서운 분이잖아.”
“와. 생각만 해도 소름이네요.”
연구실 안에는 이다혜뿐이었다. 남희석은 학부생이라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다. 대신 밤늦게까지 남아 맡은 일을 해낸다.
“참, 어제 끝낸 분량은 책상에 올려뒀어요. 한번 확인해 주세요.”
“그래. 수고했다.”
민우가 책상에 앉았다. 어제 두 조수가 끝마친 작업물이 한쪽에 쌓여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차분히 내용을 검토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굉장히 긴 번호가 떴다.
‘해외전화? 랑느 박사님인가.’
민우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는 맞았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랑느 박사가 아니었다.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 제 이름은 조너던 캠벨입니다. 예전에 IAHS에서 세션에 참가했을 때 저한테 책을 준 일이 있었지요? 거기 껴 있던 명함 보고 연락을 했습니다. 」
조너던 캠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