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23화 (223/500)

223화 : < 83장. 폴라리스(Polaris) (2) >

서강일이 끝낸 작업은 자료 조사도 아니고 논문 작성도 아니었다. 바로 홈페이지 제작이었다.

예전 민우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시상식에서 국제번역기구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기구의 중추가 될 홈페이지가 완성된 것이다.

작업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국제번역기구의 이름을 정하는 부분이었다. 민우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댔고, 고심 끝에 ‘폴라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어로 풀어 쓰면 ‘북극성’이라는 의미였다.

“안 그래도 한번 전화해 봐야 하나 싶었는데 안 하길 잘했네. 하마터면 잔소리 들을 뻔했어.”

―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아직도 나란 사람에 대해 그렇게 몰라서 쓰겠어? 친구한테 관심 좀 가져.

민우는 웃었다. 확실히 요즘 번역이론서 집필을 마무리하느라 바쁘긴 했다. 서강일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연락을 잘 하지 못했다.

어느새 걷다 보니 눈앞에 인문관 건물이 보였다. 민우는 걸음을 살짝 늦췄다.

“관심은 민희가 알아서 주겠지. 같은 남자한테 관심 받아서 뭐하게? 아무튼 그건 그렇고 홈페이지 말이야. 지금 외부에서도 접속할 수 있는 거야?”

― 서버에 연결만 하면 돼. 이따 링크 보내줄 테니까 한번 접속해 봐.

민우는 알았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문득 어제 완성한 번역이론서 원고를 떠올렸다. 타이밍이 꽤 좋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강일이 너 지금 연구실이지? 내가 여기 일 끝내고 그쪽으로 바로 갈게. 고생했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지.”

― 수작이 왜 그렇게 얄팍하냐? 밥 한 끼로 때울 생각 하지 말고 양손 무겁게 와.

“야,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지 설마 밥 한 끼로 때우겠어?

가볍게 농을 던지며 서강일의 근황을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다고 한다. 강민희가 석사논문을 쓰고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했다는 말을 전했다.

민우는 홈페이지 제작 건으로 한일대에 자주 오가며 강민희와도 말을 텄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서강일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강민희에겐 2년 전 이수빈의 모습과 비슷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민우가 물었다.

“아직도 마음 안 받아주고 있는 거야? 이 자식 은근 독한 구석이 있네. 나쁜 남자였어.”

― 학생이 대학원에 왔으면 말이야. 공부를 해야지 연애를 하면 쓰나? 명인대 국문과의 누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꼬시거나 하진 않아.

“꼬신 거 아니거든요? 암튼 너도 마음이 없는 거 같진 않던데 좀 잘 해보지 그래. 잘 어울리던데.”

― 됐어. 곧 제풀에 지쳐 떨어지겠지.

민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듣기론 학부 때부터 서강일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지금 그녀가 박사 1학기니까 지나온 세월이 적지가 않다.

민우가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선수를 뺏겼다.

― 그러는 넌. 수빈이하곤 별일 없고?

“뭐 별일이 있을 틈이 있겠냐. 서로 바빠서 안부만 묻는 수준인데. 빈이도 심화과정 들어가서 정신이 없어.”

― 하여튼 우리 박 선생 바쁜 척 하나는 SCI급이지. 그러지 말고 잘 챙겨. 괜히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랑 눈 맞아봐. 속 뒤집어질걸?

“너나 잘해 인마.”

어느새 인문관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4층으로 올라가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을 노크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일찍 왔네? 잠깐만.”

서지훈 교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받던 전화를 계속했다. 민우는 커피메이커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컵 받아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통화를 모두 끝낸 서지훈 교수가 커피를 한 잔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민우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역시 신혼이시네요. 깨가 쏟아지네.”

“와이프 목소리 다 들렸냐?”

“들린 건 아닌데 선생님 얼굴만 봐도 다 써 있어서요. 칼퇴하시겠네요? 오늘은.”

“인석이 교수되더니 눈치만 늘었네.”

그렇게 구박하긴 해도 서지훈 교수는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모습이었다. 인간미가 느껴진다고 할까.

그만큼 좋은 것이다. 신혼 생활이, 그리고 송승현이라는 사람이.

민우가 물었다.

“아침은 드세요? 예전에 지음사에서 일할 때 들었는데 인문사회팀 팀장님은 맨날 아침 사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편의점에서.”

“서로 바쁘니 아침 같은 건 못하지. 간단히 토스트나 시리얼 먹고 나오는 정도야.”

“하긴, 그게 서로 편하고 좋겠네요.”

“와이프도 나도 요리에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이제 취조는 그만. 이창호 선생하고는 어떻게 됐어?”

“선생님 덕에 잘 풀었죠. 논문 수정도 다 끝났고 곧 재심사 들어갈 거 같습니다. 이 선생님이 젊으셔서 그런지 아집이나 그런 게 없더라고요.”

민우는 이창호 교수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서지훈 교수는 커피를 음미하며 고개를 간간이 끄덕여 주었다.

“아주 잘했다. 역시 너라면 해낼 줄 알았어.”

“운이 많이 따라줬죠. 선생님 도움도 컸고요. 이창호 교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면 그렇게 강하게 나가진 못했을 거예요.”

“확실히 강하긴 했네. 토론은 좀 의외다? 무슨 자신감으로 현직 교수한테 맞선 거야? 밀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비전임이긴 하지만 저도 현직 교수고,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그 당돌한 모습에 서지훈 교수는 허허거리며 웃었다.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박민우. 자신감도 좋지만 말이다.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그럴 경우도 충분히 대비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운과 도움에 의존하지 말고 플랜 B를 잘 만들어 둬. 그래야만······.”

서지훈 교수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서지훈 교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가 미리 이창호 교수에 대해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일은 더욱 어렵게 꼬였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겪으며 민우는 깨달았다. 교수가 되고 나서도 아직 배울 게 산더미라고.

교수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한편으로는 좁고 폐쇄적인 곳이기도 했다. 민우는 여전히 그 실체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보다 많은 경험이 필요해. 활동도 많이 해야 하고. 학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쪽 소식에 귀를 열어두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어.’

교수 사회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다. 때문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 유연성이 필요한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민우가 아첨을 하거나 처세술을 발휘하기 위해 귀를 열려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많이 동료를 만들어서 학계를 키우고 싶어. 크고 아름답게. 그리고 젊게.’

IAHS와 소르본의 밤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아직도 머리와 가슴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못할 거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뛰어나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사람들과 어울리고 내 뜻을 알리는 작업도 필요해.’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의욕이 가슴에 충만히 쌓였다. 그제야 민우는 다시 서지훈 교수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심사위원 건 말고도 학계엔 불합리한 일들이 많아.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도 그렇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재단에서도 흔하지. 특히 사학재단은 비리니 뭐니 말들이 많은데, 잘 해낼 수 있겠어?”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니 해볼 만합니다.”

“누구?”

“대한그룹의 정연주 이사요.”

“아, 그 친구가 청문대로 갔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서지훈 교수도 정연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민우가 꺼낸 말에 흥미를 보였다.

“교수연구지원파트 실장으로 왔더라고요. 교수 섭외나 연구 지원 같은 걸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서지훈 교수는 턱을 어루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민우를 응시했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이.

“그래봐야 재단의 실세는 아닐 거야. 나이도 어리고 그룹 내에서 위치도 애매하니까. 너무 그 친구 믿었다가는 난처해질 수도 있어.”

“제가 바라는 도움은 그런 도움이 아니에요.”

“그럼?”

“제가 하고 싶은 연구와 저술활동에 충분히 지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 손으로 알아서 해야죠. 학내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나아가서 학계를 바꾸는 것도.”

“뭐, 정론이긴 하다만······.”

서지훈 교수가 말을 줄였다. 침묵이 길어졌다.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던 서지훈 교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어디 네 마음대로 뜻을 펼쳐 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감사해요. 늘 신경 써 주셔서.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알면 됐다.”

서지훈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우는 커피를 홀짝이며 책장에서 적당한 책 하나를 골랐다.

통화는 꽤 길어졌다. 서지훈 교수가 다시 합석하자 민우가 책을 덮었다.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겠는데. 너 바로 청문대로 가나? 그쪽 방향이면 태워다 주마.”

“아뇨. 한일대에 가야 해서요.”

“그렇군. 그쪽은 반대네. 그런데 한일대엔 왜?”

민우가 살짝 놀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오늘 폴라리스 홈페이지 완성됐어요. 강일이네 연구실에 가서 한번 확인해 보려고요.”

“오, 그래? 생각보다 일찍 만들어졌구나. 어떤 물건이 나왔는지 기대가 되는군. 그나저나 이름 잘 지었네. 북극성이라······ 북극성은 예로부터 길잡이 역할을 하던 별이지. 세계 번역계의 길잡이가 되겠다, 뭐 이런 의미로 붙인 이름인가?”

“정확하십니다.”

“느낌이 좋다. 아무튼 사이트 주소 알려주는 거 잊지 말고. 슬슬 나가자.”

민우는 서지훈 교수와 함께 인문관을 나섰다. 서지훈 교수는 친절하게도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 * *

“강일이는?”

“지도교수님 호출이요. 근데 일찍 오셨네? 저녁에 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볼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바로 왔어. 너도 저녁 같이 먹을 거지?”

“그래야죠. 크게 쏘신다는데 빠질 수 있남.”

강민희는 여전히 메로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연구실엔 그녀밖에 없었다. 민우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냈다. 읽기 좋게 제본이 되어 있었다. 새하얀 표지에는 ‘통합 번역이론서’라고 적혀 있었다. 제1부 동아시아 편이었다.

멀뚱히 민우를 바라보던 강민희의 눈매가 좁아졌다.

“또 우리 오빠야한테 뭐 시키려고 들고 온 거예요?”

“시키려는 게 아니라 부탁이지.”

“그게 그거죠 뭐. 이상하게 울 오빠야는 아저씨 부탁을 거절 못 하더라.”

“착해서 그래.”

민우가 툭 던진 한마디에 제대로 낚인 강민희는 반론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서강일이 들어온 것이다.

“뭐야. 벌써 왔어?”

“일이 일찍 끝났어.”

서강일이 무언가를 찾는 듯 민우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빈손으로 왔냐? 명인대 놈들은 왜 이렇게 개념이 없어?”

“아직 의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뭔 소리야? 홈페이지 다 만들었는데. 가만, 이거 왠지 느낌이 싸한데?”

서강일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자 민우가 손에 쥔 인쇄물을 그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민희는 한숨을 내쉬며 보던 웹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우가 말했다.

“그거 검토 좀 해 주라.”

“이게 뭔데?”

“예전에 말한 번역이론서. 너 비교문학 전공하잖아. 전공자의 입장에서 어떤지 한번 봐달라는 거야.”

“설마 그 통합이론서? 이거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구만. 어떻게 두 달도 안 돼서 책 한 권을 써? 그것도 이론서를······.”

“형이잖아.”

좀 재수가 없었지만 서강일은 입을 다물고 책을 펼쳤다. 두께가 제법 있었고 이론과 실전 두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잠시 앞부분을 살펴보던 서강일은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동갑내기 박사 2학기 학생이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도 이론서를. 석사 때까지만 해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한참 뒤처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강일은 그 모든 잡스러운 감정을 떨쳐내고 긍정했다.

민우가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과정에 들어왔다. 거대한 벽이지만, 못 넘을 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는 인쇄본을 손에 쥔 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거 언제까지 봐야 하는데?”

“사흘.”

“맨입으로는 안 해.”

“나중에 너 박사논문 쓸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테니까 잘 좀 봐줘. 품앗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말이 품앗이지. 너 이거 3부까지 쓴다며?”

“그걸론 만족 못하지. 3부까지 다 쓰고 다른 책도 쓸 거야.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미리 얘기하는데 그때도 잘 부탁한다.”

피식 웃은 서강일은 민우의 이론서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폴라리스 사이트 주소를 입력했다.

“와서 홈페이지나 구경해.”

“좋지.”

민우가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서강일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모노톤의 심플한 홈페이지가 모니터에 펼쳐졌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음에 쏙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