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 83장. 폴라리스(Polaris) (1) >
민우의 강의는 연일 호평을 이어갔다. 그의 지식과 전문성은 물론, 진심을 담은 강의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청문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빠르게 소문이 퍼져 나갔다.
― 박민우 교수님 수업 또 들엉 두 번 들엉
― 울학교에서 강의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과제 피드백 해주시는 교수님 첨봄;;
― 나 번역론 듣는데 강의 듣고 있다 보면 교수님이 맨부커 상을 왜 타셨는지 알게됨 ㅇㅇ
― 민우 쌤 웃을 때 겁나 훈훈하지 않음?ㅎㅎ 막설레 꺅!
대부분 반응이 호평이었다. 중립적인 시각에서 민우의 강의를 비평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장점을 빼놓지는 않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번역의 이해’ 강의도 마찬가지. 학생들이 민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있다.
민우가 마이크를 들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간혹 번역물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드문 경우죠.”
싱긋 웃은 민우가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을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번 가리킨 여학생이 부끄러운지 홍조를 띄었다.
민우가 물었다.
“나지민 학생에게 하나만 물을게요. 번역서를 읽을 때 원서와 대조해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좋습니다. 대답 고마워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 번역서를 읽을 때 원서를 같이 읽는 학생 있습니까?”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민우가 둘러봤지만 손을 드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한두 명 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외였다.
‘발표 시킬까봐 손 안 들고 있는 거겠지?’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민우라 그들의 속이 빤히 보였다. 한차례 웃으며 민우가 설명을 계속했다.
“보통은 이렇습니다. 번역서를 읽을 때 원서를 배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물론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대학원생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용어를 대조해 보거나 문장의 적합성을 따질 때 원서가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컨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돌아선 민우가 마커로 칠판에 단어를 적었다. ‘독립성’과 ‘완결성’이라는 단어였다. 마커를 내려놓은 민우가 다시 학생들을 바라보고 섰다.
“제가 지금 칠판에 적은 두 단어가 오늘의 핵심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대부분의 번역은 원서를 접하지 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때문에 번역된 텍스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독립성과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강의는 알기 쉬우면서도 명료했다. 설명의 과정이 굉장히 촘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역물의 독립성, 혹은 완결성이란 무엇일까요?”
민우가 질문을 던질 그때 뒷문이 열렸다.
고급스러운 여성복을 걸친 젊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의 시선이 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민우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민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정연주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맨 뒷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학생인 척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민우는 수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누가 들어왔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개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이번엔 누구에게 물어본다······ 그래요. 거기 맨 뒤에 있는 학생?”
연주가 화들짝 놀랐다. 민우가 지목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리는 점입가경의 상황. 당황한 연주는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하지만 민우는 봐주거나 하지 않았다.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채근했다.
“정연주 학생. 수업에 들어왔으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지요. 아무 의견이나 좋으니 한번 얘기해 봐요. 학생이 생각하는 번역의 독립성, 혹은 완결성이란 무엇입니까?”
조용히 수업만 지켜보다 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연주는 명인대가 배출한 불세출의 천재.
또한 비교문학의 대가 강철훈 교수의 밑에서 오래도록 번역 프로젝트를 해 왔다. 번역에 대해서만큼은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 중 누구보다도 이해가 깊었다.
연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전에 용어의 정의부터 하고 싶은데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독립성과 완결성은 유사한 개념인가요, 아니면 서로 다른 개념인가요? 맥락상으로는 유사한 개념으로 쓰신 거 같은데.”
연주가 당차게 질문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학생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즉석 토론이 열린 것 같은 분위기.
“용어의 정의라······.”
마치 논문을 쓰는 것 같은 느낌. 단상에서 내려온 민우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과거의 연주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라졌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민우가 기쁜 마음으로 그 증명을 받아들였다.
“하고 싶은 말은 몇 가지 있는데 일단 유사한 개념이라고 칩시다. 맥락상 그렇게 느꼈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용어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싶네요.”
연주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학생들은 숨죽여 그녀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과연 저 어린 학생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우선 독립성이란 번역 텍스트의 내용과 관계됩니다. 원문을 의지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기능한다는 입장에서요. 반면 완결성이란 형식과 관계됩니다. 자연스러운 어법과 문장이 여기에 속하지요. 때문에 독립성과 완결성은 유사한 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할을 따져볼 때 상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라는 양 측면에서 번역이라는 행위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군요.”
“예. 맞습니다.”
주변에서 오 하는 탄성이 들렸다. 학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연주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아주 훌륭하네요. 에이플러스급 답안입니다. 저 대신 정연주 학생이 나와서 강의를 해도 되겠는데요?”
민우가 박수를 치자 다른 학생들도 박수를 쳤다. 연주는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민우는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연주가 방금 이야기 한 부분을 자세히 풀어서 학생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는 나머지 연주는 초롱초롱한 눈을 숨기지 못하고 강의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우의 인사말을 끝으로 강의가 모두 끝났다.
학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학생들의 은밀한 시선을 받으며 연주도 강단으로 내려갔다. 민우는 마이크를 정리하고 있었다.
“교수님?”
민우가 몸을 돌렸다. 연주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이크 선을 둘둘 말아 접으며 민우가 잔소리했다.
“도강은 나쁜 거야. 나 이 강의 청강생 안 받기로 했단 말이야.”
“아, 몰랐네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나저나 아까는 대단하던데? 장난삼아 던졌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을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정연주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겠어.”
“재평가요?”
“너 요즘 너무 달라졌어. 예상범위를 훌쩍 넘어섰다고 할까.”
마이크를 다 챙긴 민우가 연주와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복도를 걸어 연구실로 향했다.
“요즘 학교에서 지내기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그거 물으러 왔구나?”
“아무래도 제가 모셔온 분이니 잘 케어를 해드려야죠. 양한선 교수님은 연구에 바쁘시니까 이런 쪽으로는 잘 못하실 것 같아서요.”
“하긴, 얼굴 뵌 지 좀 되긴 했네.”
두 사람은 연구실로 들어왔다. 안에는 남희석과 이다혜가 프로젝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민우가 지시한 자료를 찾아서 한쪽에 정리해 놓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우는 그 자료를 읽게 해서 사고의 폭을 넓히게 했다.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번역을 시켜 스킬 향상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명작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또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가만, 옆에 계신 그 엄청난 미녀 분은 누구세요?”
이다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주가 부끄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정연주입니다. 박민우 교수님하고 같은 학교 다녔어요. 대학원에서 프로젝트도 같이 했고요.”
“어맛, 그러셨구나. 안녕하세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
민우와 연주는 안쪽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남희석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참, 교수님. 아까 이창호 교수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오시면 연락 좀 달라고 하시던데요.”
“그래? 알았어.”
민우는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차피 논문 일이라서 급하진 않을 것이다. 이따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연주가 물었다.
“이창호 교수님이라면 국문과에 계신 분 맞죠?”
“응. 맞아. 어쩌다보니 논문을 봐드리게 됐는데······ 요즘 이론 부분에서 좀 도움을 드리고 있어. 신화학 쪽으로 논문을 쓰시거든.”
민우에게 크게 배운 이후로 이창호 교수는 종종 연구실로 찾아와 논문에 대해 상의를 했다. 수정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반대로, 민우는 나중에 이창호 교수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논문을 쓸 일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게 민우가 생각하는 ‘동업자 정신’이었다. 편법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방법으로 상생을 추구하는 것.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것들이 하나둘 모이다보면 분명 좋은 미래가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역시 오빠는 대단하세요.”
“대단할 게 뭐 있어?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래도요.”
‘오빠’라는 표현에 이다혜의 귀가 쫑긋했다. 눈도 큼지막해졌다.
곧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며 손가락으로 민우와 연주가 앉은 곳을 가리켰다. 남희석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맡은 일이나 하라는 사인이었다.
그 사이 연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국문과로 바로 모셔오고 싶었는데 여러모로 어려웠어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일을 잘 풀어볼게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거든.”
“그치만.”
“조금만 기다려. 내후년까지 어떻게든 해서 국문과 선생님들이 이쪽으로 와달라고 사정하게 만들 테니까. 두고 봐.”
민우의 말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연주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이내 기운을 차렸다. 민우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 매일 사무실에 나오고 있어요.”
“매일? 일 열심히 하네.”
그 말에 민우가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시침이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온 김에 도움 한 번 주고 갈래? 저기 일하는 친구들 저녁 좀 사줘. 맨날 맛있는 거 타령해서 지치던 차야.”
“그건 도움 축에도 못 끼는데······ 좋아요. 같이 가요.”
“얘들아! 저녁 먹고 좀 쉬었다 하자. 오늘은 여기 정연주 선생님이 사주실 거야.”
“와, 감사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선 남희석과 이다혜는 식당에서 정연주의 진짜 정체를 듣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래도 저녁은 싹싹 맛있게 먹었다.
* * *
다음날, 서지훈 교수의 호출을 받은 민우는 명인대에 잠시 들렀다. 날이 많이 선선해져서 걷기 좋았다. 민우는 정문 옆에 차를 세우게 했다.
레아가 물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혹시 수빈 씨가 귀국하나요?”
“멀었어요. 두 달 남았나? 그냥 왜 그런 날 있잖아요.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요.”
민우는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햇빛이 내리쫴 약간 덥긴 했지만, 초가을이라 걷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민우는 여유롭게 캠퍼스를 걸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에 반가운 이름이 떴다. 한일대의 서강일이었다. 민우가 바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늦어?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 누구는 논문으로 대체해서 박사 수업 안 들으니까 널널하시겠지. 안 그래도 좋은 소식 물고 왔다.
“좋은 소식이라면······.”
― 그래. 완성됐어. 드디어.
그 한마디에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