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 < 82장. 빌드업 (5) >
곧 문이 열렸다.
“누가 이렇게 큰 소리로 노크를 하는 거야?”
낯선 목소리였다. 문앞에 서 있던 이창호 교수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곧 열린 문으로 서지훈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응? 가만, 누구시더라······ 아, 생각났다. 이창호 선생님이시죠? 오랜만이군요.”
“아, 안녕하세요. 서지훈 선생님이시지요?”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연하지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선생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창호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서지훈 교수와는 학회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지식과 천재성에 좌절한 적도 물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오른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했다.
“전임 되셨다는 얘기 듣고는 축하 한 마디도 못 보냈군요. 이제 앞길이 탁 트이셨겠습니다.”
“트이긴요. 갈 길이 멀지요.”
“확실히 정년을 보장받으려면 좀 고생은 해야 할 겁니다. 연구 실적도 잘 쌓으셔야 하고, 문제도 일으키면 안 되겠지요.”
서지훈 교수는 연구 실적 부분에 강조점을 넣었다. 이창호 교수는 조금 의아했지만,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창호 교수가 조심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여기에 어쩐 일로······?”
“아아, 박민우 선생이 내 제자거든요. 학부 때부터 쭉 가르쳤지요. 이번에 연구실이 나왔다고 해서 구경 겸 들렀습니다.”
“그러셨군요.”
이창호 교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민우의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서지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학부 때부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말은 민우가 그의 수제자라는 이야기인데.
‘뭔 놈의 뒷배가 이렇게도 화려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야말로 여기에 무슨 일로?”
서지훈 교수가 넌지시 물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문을 세게 두드린 것에 대해 책망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자연 이창호 교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요. 잠시 박 선생님과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하도 노크를 세게 하셔서 박 선생이 사채라도 썼나 싶었지 뭡니까. 하하하. 안 그래도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씀 나누시지요. 이봐, 박 선생. 이만 갈 테니 다음에 보자.”
“예,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서지훈 교수가 민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라. 알아서 잘 하겠다는 의미였다.
곧 서지훈 교수가 나가고 이창호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기세가 바뀌었다. 민우를 바라보며 의지를 불태웠다. 호랑이가 사라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럽시다.”
이창호 교수가 소파에 앉는 사이 민우는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냈다. 하지만 이창호 교수는 커피는 됐다며 성의를 물리쳤다.
멋쩍은 표정을 민우가 캔커피를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그런데 저녁은 드셨습니까?”
“못 먹었지요.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더군.”
“역시 심사 때문에 오신 거죠?”
“제법 눈치가 빠른데?”
“심사평 쓸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자리에서 제가 선생님 논문을 심사하게 됐다는 걸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이런 식으로 심사평을 쓰게 되면 분명 오셔서 한 소리 하실 거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심사를 그딴 식으로 하셨다?”
“전 제가 가진 지식에 입각해 객관적인 사실만을 서술했을 뿐입니다. 그딴 식이라는 말씀은 조금 지나친 것 같네요.”
민우는 조금의 굽힘도 없었다. 이창호 교수의 맞은편에 앉아 캔커피를 따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싱긋 웃기까지 했다.
‘이 자식이······ 지금 면전에서 웃음이 나오나?’
이창호 교수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전긍긍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정상인데, 민우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불길하다고 해야 할까.
때마침 류재혁 교수의 경고가 떠올랐다. 무리수를 던지지 말라는 말. 하지만 이창호 교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손을 깍지 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 이창호 교수가 사냥을 시작했다.
“어쩌다보니 박 선생님의 심사평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됐지 뭡니까. 수정 후 재심사를 때렸던데? 구구절절 태클도 거셨고.”
“그건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설마 안유진 간사님이 알려 주신 건 아닐 테고.”
“자꾸 순진한 척하지 마시죠. 술자리에서 류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바닥은 좁다고. 조사하면 안 나오는 게 없지요.”
“서운한 일이네요.”
민우가 캔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눈매를 좁혔다.
“심사위원의 신상정보는 비밀이 원칙입니다. 학회 정관에도 나와 있는 건데, 모른척하고 넘어가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들추고 다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민우의 일침에 이창호 교수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하지만 대뜸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민우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자, 이창호 선생님. 심사평의 어느 부분이 못마땅하셔서 이렇게 오신 겁니까?”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더군요. 모두가. 특히 내가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이론에 대해 한번 토론을 해보실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주 길게.
“뭐요?”
“정당히 토론을 해 보자고요. 선생님께서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다면 그 지식을 마음껏 펼쳐 보시면 될 거 아닙니까?”
민우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이창호 교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감 앞에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뭘 믿고 이렇게 똥배짱을 부리지?’
물론, 민우가 조너던 캠벨의 신화학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창호 교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고작 박사과정 학생일 뿐이다. 지식의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론을 소개한 건 우연이라고 치부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서론 부분부터 풀어가 보죠. 내가 이해한 조너던 캠벨의 이론은······.”
이창호 교수의 설명이 시작됐다. 그는 괜히 청문대 교수가 된 게 아니라는 듯 유창하게 설명을 해 나갔다.
민우는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하지만 곧 허점을 발견한 민우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민우가 잠시 손을 들자 이창호 교수는 설명을 멈췄다. 민우는 즉시 그가 실수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올바른 해석을 제시했다.
“결국 현대인에게 있어 신화란 그런 겁니다. 개인의 일상에서 단절과 분리를 느낄 때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것. 모험의 길은 외부의 조건이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속임수예요. 오히려 우리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개인과 개인은 국가와 인종, 나이와 사회적 포지션이 모두 다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공통의 성질이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개인의 성찰입니다. 안을 들여다보는 것.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동굴에 어떤 괴물이 숨어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모험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창호 교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논문에서 전개한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창호 교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포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않나요?”
“포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조너던 캠벨이 한 말이에요. 어디였더라······ 맞아. <현대의 신화> 제2권 중반부에 들어가 있는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출처를 읊어주자 이창호 교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현대의 신화? 처음 듣는 제목인데요.”
“출간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요. 조너던 캠벨은 현역 학자답게 이론이 늘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저널이 나올 때마다 읽어두는 게 좋지요.”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서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조너던 캠벨이 낸 모든 저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번역되지 않는 책도 상당했는데, 그가 지금 책장에서 꺼내온 책도 영어로 된 원서였다.
민우가 책을 들어 보였다.
“이게 바로 그 책입니다.”
이창호 교수는 말없이 민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민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이리저리 페이지를 넘겨보더니 원하는 페이지를 찾았다.
“여기 있네요. 이 부분을 한번 읽어 보시죠.”
민우가 책을 돌려 테이블에 놓았다. 이창호 교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우가 짚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민우가 설명한 내용이 그대로 책에 적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민우가 부연했다.
“올해에 발간된 책이라 놓치셨을 것 같네요. 국내 논문에도 언급된 게 없을 겁니다. 제가 저번 학기에 논문 쓸 때도 관련 레퍼런스를 모조리 조사했는데 언급된 논문이 없더라고요.”
이창호 교수는 섣불리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괸 채 <현대의 신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제가 게재 불가가 아니라 수정 후 재심사로 판정한 것도 바로 그 부분 때문이에요. 이 책을 읽고 논문을 다시 고쳐 쓰신다면······ 분명 의미 있는 논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심사평에서는 이 책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이 찾아오실 줄 알았다고. 오시면 자세히 설명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는 게 오해가 덜할 테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결국 이창호 교수는 책을 거칠게 덮었다. 그리고 민우를 노려보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봅시다. 박 선생님은 박사학위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심사를 할 수 있는 겁니까?”
“다른 분야였다면 심사 청탁을 거절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화학은 좀 달라요. 제가 제일 자신이 있는 분야입니다.”
이창호 교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민우가 신화학계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처음 소개한 것 외에 알려진 업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민우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석사 1학기 때 학교 선배 박사논문을 도와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이론을 찾기 위해 전 세계의 신화학 관련 저널을 빠짐없이 모조리 읽었었죠.”
“전 세계의 저널을 전부?”
“예. SCI, A&HCI급은 물론 등급 외 학술지까지 전산 조회가 가능한 저널은 모조리 찾아 읽었어요. 그때 고생한 게 컸습니다. 그 지식들이 제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탕!
이창호 교수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마 박 선생님이 스스로 천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런 코미디는 사양합니다.”
그러나 이창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민우가 그 당시에 루카치의 안경을 사용했다는 것. 논문에 담긴 모든 지식은 오롯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민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실력을 뽐내려는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창호 교수의 논문이었다.
“천재라뇨. 전 그냥 평범한 노력파입니다. 그러니까 믿으셔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잠시 말을 끊은 민우는 책상으로 돌아가 인쇄물을 한 부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창호 교수 앞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붉은 펜으로 꼼꼼히 첨삭이 들어간 그것은 다름 아닌 이창호 교수의 논문이었다.
“저는 선생님께서 논문을 잘 수정해서 꼭 국제비교문학회에 게재하셨으면 합니다. 진심으로요.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까운 논문이라서요.”
이창호 교수는 조용히 자신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정성이 느껴지는 첨삭이 모든 페이지에 걸쳐 들어가 있었다.
‘이건······.’
붉은 글씨의 흔적을 더듬던 이창호 교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일반적인 첨삭이 아니었다.
어디가 잘못됐고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 대신 어떤 논문과 저널, 그리고 단행본을 보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꽤 정중한 어조로 말이다.
이창호 교수는 피식 웃었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야에 방대한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첨삭이야.’
적어도 민우는 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백과사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창호 교수는 마치 대학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지도교수에게 첨삭을 받던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을까. 그가 극적인 변화를 겪는 사이 민우가 책상에서 인쇄물을 하나 더 가져왔다.
“예전에 IAHS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조너던 캠벨 박사님의 세미나가 열렸었습니다. 그때 캠벨 박사님이 발표한 내용이니 한번 읽어 보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이창호 교수는 인쇄물을 받았다. 어느새 그의 표정에서 민우의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연구실로 돌아가 민우가 체크해 준 레퍼런스를 읽고 싶었다. 논문을 제대로 수정할 자신이 생긴 것이다.
애써 고맙다는 말을 남긴 이창호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일이 잘 풀렸다. 민우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역시 서지훈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 실력은 배신하지 않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본인의 길을 가라. 그게 본인과 학계를 위하는 일이다. 그 충고를 되뇌며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작은 일들이 하나씩 모여 큰 물결을 일으키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