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 < 82장. 빌드업 (4)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아침, 민우의 연구실로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명은 얼마 전 제자가 된 남희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번역가 지망생 이다혜였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만났는지 뻘쭘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문을 열고 같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빠.”
“교수님. 저 왔습니다.”
호칭도 제각각이다. 민우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때마침 같이 왔네. 혹시 둘이 아는 사이는 아니지?”
“아녜요.”
“일단 앉아라.”
두 학생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남희석은 자신이 선망하는 사람을 오빠라고 칭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 반면 이다혜는 약간의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경쟁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민우가 그 기색을 눈치채고 먼저 말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사이니까 서로 인사들 해. 아마 다혜가 누나일 것 같은데. 희석이가 올해로 스물다섯이라고 했었지?”
“예. 맞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누님. 남희석입니다. 박민우 교수님 제자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이다혜예요. 그런데 누님이라니······ 그렇게 말하니까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그냥 편하게 누나라고 해요. 말 놔도 되죠?”
“바라던 바입니다.”
복학생 남희석은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졌는지 지나치게 깍듯했다. 민우와 다혜는 그의 독특한 화법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남희석이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뭐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 너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지?”
“예. 몇 달 안 됐습니다.”
“말투에서 아저씨 냄새 나. 엄청. 오빠는 안 그래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이다혜가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본인에겐 상처가 된 모양이다. 기세등등하던 남희석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다혜가 어깨를 움찔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미안. 농담이었는데. 화났어?”
“아뇨. 실은 요즘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어서 자아비판 좀 했습니다. 그런데 박민우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십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선생님이었다가 오빠가 된 사이라고 할까.”
“선생님이었다가 오빠가 됐다고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남희석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민우의 사적인 것까지 속속 잘 알고 있었다. 이수빈이라는 애인이 있으며, 그녀가 하버드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민우가 피식 웃었다.
“그 눈빛은 뭐야. 애인 놔두고 한눈을 파냐, 뭐 그런 의미인가? 그건 아니고 예전에 문광부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여했는데 그때 만난 동생이야. 네가 생각하는 만큼 특별한 사이는 아니지.”
“그렇군요.”
“다혜 너도 어디 가서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마. 내 여친 무섭거든. 비행기 타고 한 달음에 달려올지도 몰라.”
이런 저런 농담이 오가자 분위기가 유쾌해졌다. 희석과 다혜는 은근히 잘 어울렸다. 멋진 팀플레이를 기대해 봐도 좋을 거 같았다.
‘분위기는 얼추 잡혔고. 일단 아쉬운 대로 이 두 명으로 가야겠어.’
생각보다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팀에 잘 녹아들어갈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민우가 뭔가를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왔는데 마실 것도 안 챙겼네. 다들 커피 괜찮지?”
“네―!”
민우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캔커피가 한 종류에서 두 종류로 늘었다.
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무가당 캔커피를 따로 준비한 것이다.
남희석이 반색했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커피인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 설탕 든 거 안 마신대서 따로 준비한 거다. 감사히 마셔.”
“옙.”
민우는 책상 위에 올려둔 계약서를 챙겼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일단 계약서부터 쓰고 시작할까?”
“좋아요.”
“기대하던 바입니다.”
“푸훕! 진짜 아저씨 같다니깐?”
이다혜가 참지 못하고 또 웃음을 터트렸다. 남희석의 표정이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민우는 간인이 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동생 그만 놀리고 계약서나 확인해.”
“네~!”
두 사람은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는 눈으로 민우가 내민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중간 중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했고, 민우는 친절히 답해 주었다.
애초에 계약 조건보다는 경력을 쌓기 위해 팀에 합류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계약서 검토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희석과 이다혜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서명이 완료된 계약서 한 부를 나눠주고 민우는 나머지 계약서를 파일에 갈무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뜻 하겠다고 나서줘서 고마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두 사람 모두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거 잘 알고 있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책을 한번 만들어 보자. 다같이.”
“네!”
이어 민우는 작업 방식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번역보다는 자료를 더 많이 찾게 될 거라는 말에 다혜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냥 번역을 하지 않고 왜 자료를 찾아보는 거예요?”
“제대로 번역을 하려면 원서에 쓰인 레퍼런스도 체크해야 하거든. 학술서니까. 그다음 그 자료를 이해하는 게 중요해. 그래야 맥락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민우가 다시 질문이 나올 것 같은 부분을 앞질러 설명했다.
“용어를 통일하는 것도 같은 이치야. 어떤 개념에 대해 A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는데 우리 멋대로 B라는 용어로 바꾸어 쓰는 건 효율적이지 않을 수 있거든. 물론 A라는 용어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바꾼 다음 각주를 달든가 해야겠지.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할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당.”
“더 질문은?”
이번에도 이다혜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오늘 첫 모임인데 회식은 안 하나요?”
“벌써부터 놀 궁리를 하는 거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민우는 두 사람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고급 중식당에서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 * *
올해 막 조교수를 단 이창호 교수는 연구실에서 하품을 하며 야구 중계를 시청했다. 그때 띠링,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맞아, 슬슬 심사 결과가 나올 때가 됐지?’
그 생각이 들어 이창호 교수는 허리를 펴고 앉았다. 야구 중계창을 내리고 메일 서버에 접속했다.
역시나 국제비교문학회에서 온 메일이었다.
이창호 교수는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이번 논문은 실적 때문에 쫓기듯 쓴 것이었다. 논문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도 박민우 선생한테 얘길 잘 했으니 수정 후 게재 정도는 받겠지!’
그런 기대감으로 심사 결과지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인상이 팍 구겨졌다.
“이런 젠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수정 후 게재가 아닌 수정 후 재심사가 뜬 것이다.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두 사람이 수정 후 재심사를 때리고 한 명이 게재불가를 때렸어. 박 교수가 어떤 판정을 내린 거지? 게재불가 쪽인가?’
세 심사위원의 평가를 빠르게 훑었다. 뼈아픈 비판의 말들이 훅훅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창호 교수는 어금니를 깨물고 단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어찌해서 민우가 심사에 들어갔다는 것은 알게 됐지만, 심사위원 A와 B, 그리고 C중 누가 민우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아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귀찮은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전화를 해봐야겠어. 마침 유진이가 총무간사를 하고 있으니 알아내기가 수월할 거야.’
이창호 교수는 즉시 총무간사 안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창호 교수는 한일대 출신으로 안유진의 선배이기도 했다.
― 안녕하세요. 선배.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네. 무슨 일이세요?
“어, 그래. 오랜만이다. 다름이 아니고 그 뭐냐, 심사 결과 때문에 말이다.
― 제가 방금 보내드렸는데 메일 보신 거죠?
“대체 누가 심사를 한 거야?”
이창호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시 전화기가 조용해졌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기에 안유진 간사가 차분하게 답했다.
― 선배. 심사위원은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인 거 잘 아시잖아요. 학회 정관에 잘 나와 있는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인마. 네가 안 알려 줘도 장소필 선생님께 연락하면 다 나와! 내 논문 심사에 박민우 선생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심사위원 누구야?”
―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안유진. 학회 관리는 너만 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너한테 전화한 것도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고. 좀 이해하고 넘어가라. 응?”
― 그래도 전 알려드릴 수 없어요.
“너 자꾸 이럴래?”
하지만 안유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나운서 톤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 전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입니다. 직분을 지키고 싶어요.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면 제3자 심사 요청을 하세요. 한 번에 한해서 가능하니까요.
그 뒤로 이창호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고 살살 달래보기도 했지만 안유진 간사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녀는 심사위원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다.
결국 이창호 교수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화만 돋운 채 전화를 끊어야 했다.
“제엔장. 어쩔 수 없이 레퍼런스를 뒤져야겠군. 심사평을 역추적하면 누군지 얼추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다짐한 이창호 교수가 지도제자 둘을 불렀다. 남학생 두 명은 열심히 키워드로 검색을 했고, 곧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키가 큰 남학생이 보고했다.
“이게 박민우 선생님이 쓰신 심사지 같습니다. 나머지는 심사지 위에 이름 적어 놨습니다.”
“좋아. 수고들 했다.”
이창호 교수는 자리에 앉아 민우가 쓴 심사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민우는 그에게 ‘수정 후 재심사’ 판정을 내렸다.
‘석사 주제에 나한테 수정 후 재심사를 때렸다 이거지?’
분통이 터졌다. 게다가 민우는 명인대를 나왔고 이창호 교수는 한일대를 나왔다. 두 학교는 누구나 다 아는 라이벌 관계였다.
‘구구절절 그럴싸한 말들만 적어놨구만. 누가 이론을 이해 못해서 그렇게 썼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나름 항변을 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민우의 심사가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우의 심사지는 담담한 어조로 논문의 부실한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민우가 아예 융통성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 처세술을 발휘했다.
심사 말미에 이창호 교수의 논문에 숨겨진 가치가 있다고 서술한 것. 그리고 잘 보완된다면 초록에서 보여준 흥미로움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썼다.
다행히 그 부분에서 이창호 교수의 화가 좀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좋은 말을 써준 건 박 선생밖에 없구만. 쯧. 다른 놈들은 눈이 썩었나? 특히 백은대 윤가람이, 두고 봐라. 게재 불가를 때려? 그대로 돌려주마.’
조삼모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굉장히 큰 차이였다.
좋은 말을 쓰고 비판을 하는 것과 비판을 하고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민우는 들은 바가 있어 그것을 잘 적용했다.
그래도 이창호 교수는 납득하지 못했다. 적어도 수정 후 게재는 받아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어디 박 선생한테 가서 좀 이야기를 들어볼까? 술잔을 나눴는데도 이렇게 박한 점수를 준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이창호 교수가 연구실을 나가려던 그때 류재혁 교수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가던 참인가?”
“예. 잠시 박민우 선생 좀 만나러.”
“박 선생은 왜?”
그렇게 물은 류재혁 교수는 이창호 교수의 손에 들려 있는 프린트물에 시선을 두었다.
“심사 결과가 나왔나? 왜, 점수가 박했어?”
“수정 후 재심사 맞았네요. 박 선생이 겁도 없이 수정 후 재심사 때렸습니다.”
“허허, 그래? 동업자 정신이 부족하구먼.”
류재혁 교수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는 이창호 교수를 더는 두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길을 막았다.
“그래도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마.”
“그냥 정중히 따져볼 생각입니다. 도저히 수정 후 재심사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박 선생이 어리고 경험이 없어 보여도 뒷배가 장난이 아니라고.”
“뒷배요? 양한선 선생님이 데려온 사람 아니었습니까?”
“실제로는 그 뒤에 하나 더 있어. 대한그룹 이사 정연주. 둘이 절친이야. 예전에 기사 못 봤나? 박 선생이 큰산번역문학상 수상할 때 직접 꽃다발을 건넨 사진이 화제였었는데. 원, 자네도 그렇게 정보가 없어서야. 쯧쯧쯧.”
류재혁 교수가 혀를 찼다. 그러니 처음부터 논문을 잘 쓰면 되지 않냐는 책망도 묻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이창호 교수의 편이었다.
“좋은 참고가 됐네요. 아무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할 말은 해야 하니까요.”
“무리수는 던지지 말고. 심사위원 정체 까발린 게 떳떳한 일은 아니잖아.”
“좋게 타이르고 오겠습니다.”
이창호 교수가 성큼성큼 걸어 민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그네틱이 ‘재실’로 되어 있었다. 문 앞에 선 그가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했다.
쿵쿵쿵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