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19화 (219/500)

219화 : < 82장. 빌드업 (3) >

보낸이: 안유진

제목: 국제비교문학회 논문 심사 요청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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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민우 선생님.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 안유진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저번 학회에서 뵙지 못해 이렇게 메일로 안부를 여쭤봅니다. 날씨가 한창 더운데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희 학술지에 투고된 논문 중 하나를 박 선생님께 심사를 부탁드리려고 메일 드렸습니다. 조너던 캠벨의 신화학을 다룬 논문이며 비교문학과 제법 연관성이 있는 논문입니다. 첨부파일을 확인하신 후 심사 가능 여부를 회신해 주시면······.

민우는 신중히 스크롤을 내렸다. 아래부터는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학회 일정 소개와 회신을 꼭 부탁한다는 당부가 들어가 있었다.

민우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학술지 논문 심사가 들어온 거야? 박사학위도 없는 나한테?’

민우는 좀 의아했다. 물론 심사에서 중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전문성이지만, 아직 누군가의 논문을 심사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업적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까지 정신없이 읽고 쓰기만 해서 객관적으로 돌아본 적이 없었다.

‘초짜라고는 할 수 없지. 신화학 쪽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었으니까. 특히 저번 학기 때 발표한 논문은 반응이 좋았어. 석사 때는 단행본도 출간했고. 그래서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납득이 간다. 신화학계에서 민우는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일단 논문을 좀 보자.’

민우는 회신 여부를 따지기 전에 첨부파일로 걸려 있는 논문을 열었다. 안유진 간사의 설명대로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바탕으로 적힌 논문이었다.

이름이나 저자가 누구인지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전부 지워져 있었다. 공정성을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민우는 속독으로 초록을 읽었다.

행간을 따라 눈이 움직일 때마다 민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꽤 흥미롭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근데 내가 누군가의 논문을 평가할 짬이 되려나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민우는 결정을 내리고는 바로 답장 버튼을 눌렀다. 심사 요청을 수락하는 내용을 적어 답장을 보냈다.

‘까짓것 해보지 뭐. 예전에 서지훈 선생님께서 인문학 강의 제안할 때도 그러셨잖아.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고. 심사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다.

곧 차가 일산 오피스단지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레아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카페로 올라갔고, 민우는 라온북스 사무실로 향했다.

<세계수>의 흥행으로 돈벼락을 맞은 건 주예린만이 아니었다. 판권을 가지고 있는 라온북스도 말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물론 번역가인 민우도 제법 돈을 만졌다.

내년에 만약 수빈과 결혼한다면 신혼집을 서울에 있는 아파트로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사한 차도 사고 말이다.

“어서 오세요. 민우 씨.”

이유리가 반갑게 맞았다.

<세계수>의 성공으로 이유리는 직급이 한 단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 초년생 마인드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민우가 미리 준비한 먹거리를 건네며 물었다.

“승진 축하드려요. 기분이 어떠십니까?”

“월급보다 일이 더 많이 는 것 같아서 슬프죠.”

“그거 안 됐네요.”

민우는 싱긋 웃었다. 사적인 자리였다면 농담이라도 한 번 던졌을 텐데.

민우는 다른 직원들과도 인사를 하고 이유리와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준비물을 모두 챙긴 현기혁 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책 세 권이 들려 있었는데, 바로 <더 위자드> 3부 원서였다.

“아아, 이거 준비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직접 오실 것 까지는 없었는데. 저희가 퀵으로 쏴드릴 수 있었는데요.”

“이런 핑계라도 안 만들면 뵙기 어려우니까요. 겸사겸사 왔어요.”

“하하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민우 씨와 언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너무 격조하긴 했죠.”

표정에 여실이 나타나 있었다. 마치 몇 달간 술을 마시지 못해 안달 난 주당 같았다. 민우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좀 그렇고, 조만간 제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볼게요. 사실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좀 정신이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건가요? 날도 더운데 건강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더 위저드>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이미 계약이 끝났고, 민우가 마감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더 위자드>는 민우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인문과학총서’처럼 자료를 조사해야 하는 거 없이 그대로 번역만 하면 되니까. 세 권이라고 해도 넉넉잡아 2주일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일단 프로젝트 팀을 안정화시키고 번역이론서 집필을 끝낸 다음 <더 위자드> 번역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민우 씨. 요즘 이론서 집필하신다는 소문이 출판업계에 돌고 있던데 사실입니까? 영 뜬소문이 많은 곳이긴 합니다만 꽤 구체적이라서요. 청문대 출판문화원 쪽에서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사실입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정확히는 번역이론서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민우는 간단히 저서에 대해 설명했다. 현기혁도 이유리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계획이었다.

“대단히 흥미롭군요. 통합 번역이론서라······.”

하지만 말과는 달리 현기혁 팀장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리도 비슷한 얼굴을 했다.

민우는 그 심정을 이해했다. 청문대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면 라온북스에서 나갈 책이었으니까.

“많이 서운하시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운하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민우 씨도 다 계획한 바가 있으시니 청문대 쪽하고 작업을 하시는 거겠지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현기혁 팀장도 민우가 청문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쪽 출판문화원과 작업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민우 씨의 첫 단독 저서인데 나름 아쉽네요. 대신 다음 책은 꼭 저희에게 주십시오.”

“예. 약속할게요. 다음에는 인문학에 대한 책을 써볼까 합니다. 이론서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는 책을 남기고 싶어졌어요.”

그 말에 이유리 주임이 벌떡 일어섰다.

“팀장님! 기획서 가져올까요? 아니면 계약서? 어떤 게 좋을까요?”

“하하하하! 이 주임. 진정해.”

그제야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주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세 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민우에게 조금 뜬금이 없는 전화가 걸려 왔다.

* * *

저녁 무렵, 민우는 다시 청문대로 돌아왔다. 레아가 차에서 내려 민우를 배웅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요?”

“별일은 아닐 거예요. 밥이나 먹으러 오라고 하셨으니까 자리 좀 지키다가 와야죠. 레아 씨는 바로 퇴근하세요.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네요. 집에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세요. 매니저님.”

레아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던 민우는 청문대 근처에 있는 회식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엄밀히 따지면 난 교양학부 소속인데······ 왜 부른 거지?’

의구심이 들었다.

전화를 한 것은 류재혁 교수였다. 나이가 쉰을 넘긴 원로급 교수였는데, 국문과 교수들끼리 회식이 있다며 자신을 부른 것이다.

‘날 교양학부로 가게 했으면서 회식에 껴주는 건 무슨 심보야? 느낌이 안 좋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아니,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민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과민한 거라고. 요즘 일이 많다보니 생각도 부정적으로 치우쳐지는 것 같았다.

곧 회식 장소에 도착한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국문과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재빨리 머릿수를 세어 보니 총 열 명이다. 청문대 국문과 교수진이 도합 열두 명이었으니 두 명 빼고 모두 온 것이다.

‘여교수님들 빼고 다 모였네.’

민우가 정장 재킷을 한번 바로잡은 다음 그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 박 선생 왔구만. 이쪽으로 앉아. 어서.”

류재혁 교수가 민우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다른 교수들도 인사말을 건넸다. 다들 술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빨갰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과 간단히 통성명을 한 뒤 민우도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생 무리에서 놀았던 그였다. 이렇게 교수들끼리의 회합은 처음이라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좀 불편하다고 할까.

“그나저나 바쁜 일 있었나 보구만? 전화한 지 좀 됐는데 이제야 나타난 걸 보니.”

“바쁠 만하지요. 박 선생이야말로 요즘 청문대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분 아닙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요.”

“이번에 교양 강좌도 대박 났다면서요? 듣기론 개강 당일에 120명 정도 몰렸다던데. 원래 40명이었던 정원도 수업과에서 배로 늘린 거라면서요.”

“허어, 120명? 역대급인데요.”

교수들 사이에서 민우의 이야기가 한바탕 쏟아졌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물론이고, 예전에 큰산번역문학상을 받은 것을 기억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민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제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오니 부끄럽네요. 아무튼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양학부 소속이다 보니 제가 껴도 되는 자리인지 처음엔 좀 고민을 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소속이 뭐 중요하나? 이번 학기에 박 선생도 우리 과 전공 강의를 하니까 서로 친목 다져 놓으면 좋은 거지.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자자자. 한잔 받아!”

류재혁 교수가 민우의 잔을 챙겨주었다. 그는 주량을 묻지도 않고 소주를 가득 부었다. 곧 건배사와 함께 술이 한 순배 돌았다.

그 자리에서 민우가 제일 어렸다. 민우는 빼지 않고 과감히 술을 마셨다.

그때 류재혁 교수가 은근히 물어왔다.

“그런데 말이야. 박 선생. 이번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논문 심사 청탁 받았다며?”

깜짝 놀란 민유가 류재혁 교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야? 그 싱거운 반응은.”

“아니, 그게······ 논문 심사는 비공개가 원칙인데 어떻게 아셨나 싶어서요.”

“응? 하하하하!”

그 말에 교수들이 하나같이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마치 민우를 어린아이 보는 듯한 그런 태도들이었다.

류재혁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직 박 선생이 초짜라 잘 모르는구만. 한 다리 걸치면 다 알게 되어 있는 걸 가지고 뭘 그러나? 아마추어 같이. 이 바닥처럼 좁은 곳이 또 어디 있다고.”

“하지만.”

민우는 뭐라고 반론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박사학위도 없는데 논문 심사를 한다니 정말 대단한데?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거니 괘념치 말고 잘해 보시게.”

“예. 알겠습니다.”

씨익 웃은 류재혁 교수가 잔을 훌쩍 비웠다. 그때 마침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앉은 젊은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창호 선생. 이번에 쓴 거 국제비교문학회에 낸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곧 심사 들어갈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심 놀란 민우가 조심스레 이창호 교수에게 물었다.

“혹시 어떤 테마로 쓰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박 선생님도 참 짓궂으시네. 하하하. 정말 모르셔서 여쭤보는 겁니까?”

이창호 교수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건배를 하자는 의미였다. 잠시 멍해있던 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설마 안유진 간사님이 보낸 그 논문이 저 사람 거였어?’

민우는 이 자리에 왜 불려 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류재혁 교수가 자신을 괜히 부른 게 아닐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자정이 되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3차를 가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민우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물러나 택시에 몸을 실었다.

집으로 들어오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현관 쪽으로 나왔다.

“술 마셨니?”

“조금. 청문대 선생님들이랑 마셨어.”

“내일 콩나물국 끓여야겠구나. 어서 씻고 쉬어라.”

“엄마도 들어가서 자.”

민우는 방으로 들어갔다. 소주를 꽤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옷을 갈아입고 대강 씻은 뒤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안유진 간사가 보낸, 이창호 교수가 쓴 것으로 추측되는 그 논문을 인쇄했다. 그리고 침대에 편히 누워 정독을 시작했다.

‘잘 쓴 논문은 아니네.’

몇몇 부분에서 논리의 비약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 컸다.

‘이거 어떻게 한다······.’

안유진 간사에게 받은 심사지 양식을 바라보며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여러 이해관계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곧 민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론을 내렸다.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쓰자. 그게 이창호 선생님께도 도움이 되겠지.’

민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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