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 < 82장. 빌드업 (2) >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기대 이상인데?’
서투른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학부 3학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실력이었다. 번역투도 없었고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조금만 옆에서 방향을 잡아준다면 좋은 번역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역시. 이 정도 실력이라면 프로젝트 어시스턴트를 맡겨도 되겠어.’
애초에 민우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력이 쓸 만하다면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기초부터 차근히 배워 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테스트를 제안했고, 남희석은 생각보다 좋은 결과물을 내 놓았다.
하지만 민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평가해 주는 게 눈앞에 있는 청년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실력이네요. 어휘 선택이 조금 신중하지 못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감사합니다. 정말 기분 좋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께 칭찬을 받다니. 하하하. 꿈만 같습니다.”
“응? 칭찬한 건 아닌데. 초고임을 감안해서 그렇지 이 정도로는 실전에 써먹지 못합니다. 그건 본인도 알고 있죠?”
그렇게 말했는데도 남희석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제 실력을 전부 발휘하진 않았습니다. 교수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실력보다는 가능성을 봐주실 테니까요.”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사실입니다. 교수님에 대한 모든 것은 머릿속에 있지요. 저서는 물론 번역서도 모조리 읽었습니다. 인문학 강의와 KOC에 올라온 동영상까지 모두 봤어요.”
왠지 소름이 돋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다 보기는 어려우니까.
그 사이 남희석이 질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왜 테스트를 제안하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괜히 시키신 것 같지는 않아서요.”
“눈치가 빠르네. 일 잘하겠어요.”
“일 못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군대에서도 이쁨 받았죠.”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민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잔소리를 해주고 싶은데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그런 학생이었다.
“나는 센트럴북스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있어요. ‘인문과학총서’라는 책인데, 혹시 들어봤나요?”
“듣기만 하고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교수님께서 프로젝트를 하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죠.”
“남희석 학생이 본 테스트 샘플이 ‘인문과학총서’의 일부입니다. 실력이 괜찮다면 조수로 쓰려고 했어요. 번역 배우고 싶다고 했으니까.”
“결과는요?”
“일단은 합격입니다. 괜찮다면 같이 프로젝트 해볼래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남희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테이블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나 싶어 깜짝 놀랐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정하고 앉아요. 급여나 이런 조건은 센트럴북스 쪽에 문의를 해보고 알려줄게요.”
“예. 이제는 교수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말씀은 편히 해 주세요.”
“사부님은 됐고, 말은 편히 할게.”
민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새로운 제자를 바라보았다. 좀 더 차분한 친구였다면 어땠을까. 제자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내심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민우는 그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자만심으로만 번지지 않는다면 위협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제자가 한 명 더 늘게 된 건가······.’
갑작스럽긴 해도 민우는 긍정했다. 운명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미소를 짓는 법이니까. 문득 상아대에 있는 또 다른 제자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민재랑은 성격이 정반대네. 민재가 차분하고 꼼꼼하다면 희석이는 대범하고 호방한 면이 있어. 재미있는 구도야.’
한 연구실에 두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민재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급여 외의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 줄게. 확실한 게 서로 좋으니까.”
“전 솔직히 돈 안 받아도 됩니다. 교수님 밑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서요. 오히려 제가 돈을 드려야 하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열정페이는 나쁜 거야.”
대학에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전에 남희석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 했다. 서운한 게 생기지 않게끔.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고 있어. 하나는 단행본 번역이고 하나는 오픈 라이브러리 작업이지. 오픈 라이브러리는 공개형 지식창고라고 생각하면 돼. 얼핏 보기에는 단행본이 더 좋아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픈 라이브러리 쪽이 훨씬 파급력이 있다고 봐. 나중에 구굴 쪽하고도 연계 작업을 할 거거든.”
“와, 구굴이 낀다면 굉장히 큰 규모의 프로젝트인가 보네요?”
“네가 상상하는 이상일 거야. 아무튼 네가 조수로 일을 하지만 번역서에는 이름을 올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대신 오픈 라이브러리엔 이름을 넣어 줄게.”
“정말이십니까?”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일이라 남희석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민우는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행본과는 달리 프로젝트 단위로 들어가니까 이름 넣는 건 가능해. 계약서에 관련 조항 넣어줄까?”
“아뇨. 아닙니다. 교수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그래. 다음 주 중으로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을 할 거야. 그때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줄게. 계약서도 그때 쓰자.”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직 뽑지는 않았는데 이번 주 중으로 몇 명 더 받을 거야. 두세 명 정도?”
“제가 처음으로 발탁된 셈이군요.”
남희석은 나름 의미를 부여하며 기쁨에 찬 미소를 지었다. 민우도 웃었다. 근데 다른 의미였다. 남희석의 패턴이 눈에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해라. 나중에 이 번호로 문자 하나 넣어 주고. 번호 저장하게.”
민우는 명함을 건넸다. 남희석은 즉시 민우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행동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연락처를 핸드폰에 입력했다.
“내가 곧 연락을 줄 테니 오늘은 돌아가 봐.”
“예, 교수님.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남희석이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그가 남긴 번역본을 다시 읽어 보았다. 흠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그보다 좋은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작이 좋아. 그나저나 다음 멤버는 누구로 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민우가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민우는 즉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안녕하세요!”
밝고 쾌활한 목소리. 카페에서 책을 읽던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연갈색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생글 웃고 있었다.
“왔어? 좀 일찍 왔네.”
“선생님 뵙는데 당근 일찍 와야죠. 안 그래도 연락 한번 드리려고 폼 잡고 있었는데 딱 전화주신 거 있죠? 완전 신기했어요.”
“선생님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일단 가서 뭐 하나 시켜.”
민우는 신용카드를 건넸다. 이다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들고 신나게 주문대로 뛰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음료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잘 마실게요. 근데 선생님이라고 안 하면 뭐라고 불러요?”
“글쎄? 마음대로.”
“음흉하시긴. 오빠 소리 듣고 싶으셨구나?”
“형이라고 불러라.”
“그건 안 되죠. 제가 남자가 되는 거잖아요. 민우 씨라고 부를 순 없으니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이다혜는 올해로 스물여섯이다. 민우와는 네 살 차이밖에 안 났다. 게다가 청문대 학생도 아니라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부담되었다.
민우가 물었다.
“요즘 아카데미 모임은 자주 해?”
“아뇨. 저번 달에 수료하고 나서 다들 뜸해졌죠. 데뷔한 사람도 몇 없고 암울하네요. 아카데미에서 일을 좀 맡겨 주면 좋은데 거기까지는 안 해주니까.”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없는 건가?”
“손가락만 빨고 있죠 뭐. 집에서 성화에요. 밥만 축낸다고. 휴우.”
이다혜의 작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스물여섯. 애매한 나이다. 접고 취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번역에 계속 투자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시기였다.
민우도 그 고민을 잘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과 종종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안 바쁘면 같이 일 해볼래?”
“오! 감사합니다!”
“야,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감사하다고 하면 어떡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가 하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줄 서 있는 사람 엄청 있을 거 아녜요?”
그게 아카데미 학생들이 민우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한마디로 민우는 우상이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민우가 정색하며 말했다.
“태안 쪽 갯벌에 조개 캐러 갈 건데? 쉽지 않을 텐데.”
“헉.”
이다혜가 흠칫했다. 생각해보니 너무 밑도 끝도 없이 하겠다고 말했다. 큼지막한 눈이 왔다 갔다 하며 변명을 궁리했다.
“하하하. 반응 참 솔직하네. 농담이야.”
“뭐야, 놀랬잖아요! 진짜 조개 캐러 가는 줄 알았다구요.”
“다른 건 아니고 번역 일이야. 가능성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보고 있어. 일단은 아카데미 출신 중에서 연락을 받은 건 네가 처음이다.”
“설마 그것도 뻥인 건 아니죠?”
“진짜야.”
이다혜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안 그래도 민우에게 이것저것 배워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왔다.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근데 어떤 책이에요?”
“예전에 내가 말한 적 있지? 센트럴 북스에서 하는 프로젝트. 그거야.”
민우는 구체적인 업무 내용과 계약 조건에 대해 설명했다.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인데 조건까지 좋으니 이다혜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무튼 일도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네가 지금까지 공부해 왔던 걸 다시 짚어볼 기회로 삼아. 그러면 길이 보일 거야.”
“정말 감사해요. 와, 진짜 암울했는데 이제야 뭔가 앞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다 오빠 덕이에요.”
민우는 그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컴컴한 길을 헤맬 때 루카치의 유물을 손에 얻었다. 이제는 자신이 등불이 되어 줄 차례다.
“내 덕이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하는 걸로 갚아. 자, 그럼 용건은 끝났으니 먼저 일어난다.”
“벌써 가시려구요?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지.”
“스케줄이 있어서. 다음 주에 연구실에서 보자. 이쪽으로 오면 돼. 그때 같이 하게 될 멤버 소개해 줄게.”
민우는 청문대 명함을 이다혜에게 건네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레아의 차가 카페 앞에 정차해 있었다.
민우가 바로 차에 올랐다. 레아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종로엔 무슨 일이세요? 청문대에 계실 줄 알았는데.”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팀원을 모으고 있어요. 센트럴북스 프로젝트 건으로.”
“팀원이요?”
레아가 살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민우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왔다.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데 그 룰이 지금 깨진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요? 예전에 프로젝트 계약할 때 제임스 편집장님이 어시스턴트를 몇 명 둬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절차상의 문제는 없을 텐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매니저님은 늘 혼자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셨던 분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팀원을 모은다고 하시니 놀랄 수밖에요.”
민우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혼자가 편했는데 이제는 한계가 와서요. 일을 좀 서둘러야 할 이유도 생겼고.”
“혹시 결혼이라도······?”
“아뇨. 뜬금없게 결혼은 무슨.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올해 지나기 전에 번역이론서 출간하는 게 첫 번째 이유예요. 석 달이면 충분하긴 한데 혹시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럼 두 번째는요?”
“그래야 레아 씨도 업무 부담이 줄어드니까요. 요즘 자료까지 찾아주느라 많이 힘들었죠? 부쩍 피곤해진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 왜 미안해하세요.”
그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레아는 내심 민우가 고마웠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데다 성격까지 착하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근데 매니저님. 올해 지나기 전에 번역이론서 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넘어서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때마침 신호가 걸려 레아가 민우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명인대에 기록이 하나 있어요. 서른한 살에 이론서를 써서 유명해진 분이 계신데, 그 기록을 깨고 싶어서요.”
“그래서 올해 안으로 내시려는 거군요? 매니저님이 서른 살이니까.”
“정확해요.”
“그래도 이미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셨으니까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계신 거 아닌가요?”
“좀 달라요. 그건 번역으로 받은 상이니까요. 좋은 번역가가 됐으니 이제 좋은 학자가 될 차례입니다.”
레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다고 선생님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젠간 선생님만큼, 아니 선생님보다 더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겠죠?’
그때 핸드폰이 한차례 울렸다. 메일 알림 푸시였다. 민우는 잠금 모드를 풀고 메일을 확인했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게 왜 나한테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