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17화 (217/500)

217화 : < 82장. 빌드업 (1) >

2018년도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간 민우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센트럴북스 프로젝트는 물론 번역이론서 작업과 2학기 강의 준비까지 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수빈이가 미국에 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얼굴 볼 시간도 없었겠어.’

그렇게 안도하며 민우는 첫 수업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학기에는 두 과목을 맡았다. 국문과 2학년 전공 강의와 일반교양강좌 하나씩. 국문과 강의는 ‘한국현대소설론’이었고, 교양강의는 ‘번역의 이해’였다.

오늘 있는 강의는 교양강의인 ‘번역의 이해’였다. 지금은 오전 열한 시. 수업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시 교재에서 시선을 뗀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출석부를 들었다. ‘번역의 이해’ 강의 출석부였는데 명부가 세 페이지나 되었다.

민우는 오른쪽 상단에 있는 인원수를 바라보았다. 8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거 과제 하나 잘못 내줬다가는 피 토하겠는데? 시수가 늘어나니 분반 처리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당초 강의를 개설할 때 정원을 40명으로 제한했다. 그런데 수업과에서 여석을 늘릴 수 없냐고 문의가 왔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신입인 처지라 민우는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그걸 두 배로 늘릴 줄이야.

강의실도 바뀌었다. 일반 강의실이 아닌 대형 강의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되면 강의 컨셉이 완전히 달라진다. 민우는 학생들과의 거리를 좀 더 좁히기 위해 40명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아지게 되면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하나 케어를 해 주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우는 수업과에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학생들의 요청이 워낙 많아 그렇게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을 듣고는 단념해야 했다.

‘저 트로피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가?’

민우는 연구실 한쪽 장식장에 놓여 있는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트로피에 시선을 뒀다. 실소가 흘렀다. 자신의 인기가 피부로 실감됐다.

‘어쨌든 잘 해봐야지. 쉽진 않겠지만 과제도 많이 내 주고. 인원이 많으니 시청각 자료 비율을 좀 늘려야겠다.’

그렇게 민우가 강의 계획을 세우는 사이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누굴까. 아직 강의 시작 전이라 안면을 튼 학생들은 없었다.

민우가 들어오라고 말했고,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뭐야?”

한진섭이었다. 내심 학생이기를 기다리고 있던 민우는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칠 진섭이 아니다.

“그 표정이야말로 뭔데? 친구가 말이야 첫 강의를 축하할 겸 찾아왔더니. 뭐 이제 교수됐고 근사한 상도 탔으니 나랑은 급이 다르다 이건가?”

“아침부터 뭔 헛소리야.”

“그나저나 생각보다 넓고 좋네. 이제야 교수 티가 나는구만. 부럽다. 부러워!”

진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더니, 마치 자신의 연구실이라도 된 것처럼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회장님 포스를 풍겼다.

민우도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 진섭이 말했다.

“마실 거는?”

“빈손으로 온 녀석이 겁나 당당하네.”

“쯧, 좋은 교수가 되긴 틀렸군.”

민우가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를 열었다. 가득 쟁여놓은 캔커피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진섭을 추궁했다.

“아침부터 온 용건이 뭐야? 내가 아는 한진섭이라면 단순히 축하하러 왔을 리는 없고.”

“캬. 박민우 클라스. 역시 교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씨익 웃은 한진섭이 가방에서 인쇄물을 하나 꺼냈다. 인상을 찌푸린 민우였지만, 인쇄물의 첫 줄을 보고는 표정을 풀었다.

“논문초록?”

저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한진섭이었다. 진섭이 직접 쓴 논문초록인 것이다. 그가 어깨를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등재지에 한 편 싣게 됐다.”

“오. 대박이네. 드디어 한 건 했구나?”

“대박은 무슨. 넌 매 학기마다 한 편씩은 하면서.”

“형이잖아.”

허물없이 농담을 던지는 두 사람. 잠시 읽어보니 한국어교육에 대한 논문이었다. 그가 계획하던 박사논문의 한 조각인 것 같았다.

민우가 물었다.

“아예 이쪽으로 나가기로 결정한 거야?”

“적성도 맞고 비전도 있으니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 그쪽 연구실적 좀 쌓아뒀다가 전임 노려봐야지. 안 되면 해외로 토끼고.”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손에 쥔 논문 초록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자랑하려면 논문심사지를 가져 왔어야지.”

“번역.”

“야.”

“에헤이, 왜 이래? 너 예전에 선배들 논문초록 번역하면서 우리들한테도 그랬잖아. 영문초록 만들 일 있으면 가져 오라고. 석사 1학기 때 기억은 엿 바꿔 먹었냐?”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전에 이재환 선배에게 부탁해 다른 선배들의 초록 번역작업을 하면서 수빈과 진섭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오래전 일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다니. 민우는 해묵은 짐더미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냥 업체에 맡기면 편한데 뭐하려 여기까지 와? 차비가 더 나오겠다.”

“첫 논문이니까.”

진섭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말했다.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첫 논문이니까 너한테 부탁하려는 거지. 내 논문 초록 만지려면 적어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한 번역가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허세는. 어휴, 말이라도 못하면 모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초록 인쇄본을 책받침대에 놓고 바로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시간 좀 걸리지 않아? 천천히 해 줘도 되는데.”

“천천히 했다가 무슨 욕을 먹으려고.”

민우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민우는 마치 보고 치는 듯 자연스럽게 영어로 번역했다.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진섭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원래 번역은 저렇게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다 됐다.”

“하여간 괴물이라니까.”

민우는 완성본을 인쇄하고 번역 파일을 진섭의 메일로 보냈다. 곧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완성본을 뱉어냈다.

“옛다.”

“땡큐. 뜨끈뜨끈한데?”

진섭은 싱글벙글 웃으며 완성본을 살펴보았다. 민우가 구사하는 영어는 고급스러웠다. 용어는 물론 문장이나 표현이 그랬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진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점심은 내가 사마.”

“양심은 있네.”

민우는 소중한 친구를 위해 청문대 근처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그를 안내했다.

* * *

강의실 문 앞에 선 민우는 심호흡을 했다. 한 학기 강의한 이력이 있어 이번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긴장감이 들었다.

‘얼마나 경력을 쌓아야 떨리지 않을까?’

예전에 그런 질문을 서지훈 교수에게 한 적이 있었다. 대답은 의외였다. 명강사로 소문난 서지훈도 아직도 떨린다고 했다.

‘뭐,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민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대형 강의실은 고요했다. 하지만 모여 있는 인원은 상상 이상이었다. 딱 봐도 100명이 넘어 보였다.

‘아무리 수강정정기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강단에 올랐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첫 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학생들의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한번 훑어 본 민우는 교재와 출석부를 내려놓고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번역의 이해’ 강의를 맡게 된 박민우입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수강자가 많네요. 미리 양해 말씀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모두 청강생으로 받아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된다면 수강 등록한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지금은 청문대에서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 가야 하는 시기다. 무리를 해서 이슈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정원만 가득 채워도 충분했다.

“이번 강의는 당초 40명 정원으로 개설되었습니다. 하지만 학생 여러분들의 요청이 많아서 정원이 두 배로 늘었지요. 이건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그래서 이번 강의는 청강생 없이 80명 정원에 맞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쉽지만 수강 등록을 한 학생들만 출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당초 청강을 목적으로 온 학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민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수강정정기간에는 인원 변동이 있으니 오리엔테이션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진도는 출석부가 확정된 이후에 나갈 생각입니다. 덧붙여 직접 번역할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자료 조사나 독후감 위주의 과제가 나갈 겁니다. 자, 그럼 수업계획서를 볼까요?”

그렇게 강의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민우는 수업계획서를 하나씩 읽으며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고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민우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강의를 마무리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들은 앞으로 나오시거나 연구실로 찾아와 주세요.”

마이크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강을 목적으로 온 학생들이었는데 수업을 들을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민우의 강의는 인기 강의였다. 수강정정기간이 있다고 해도 여석이 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미리 작업을 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네요. 다음 학기에도 강의가 개설되니까 그때 듣도록 해주세요.”

민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학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학생 하나가 있었다.

“교수님. 다른 사람은 안 되더라도 저는 이 강의를 꼭 들어야겠습니다.”

당돌한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으며 똑같은 대답을 했다.

“꼭 들어야겠다면 수강정정기간이 있으니 그때 여석이 나면 신청하도록 하세요.”

“여석은 나지 않을 겁니다. 학교 커뮤니티에 소문이 자자한 강의라서요. 뭐, 웃돈을 주고 자리를 살 수도 있겠지만 신성한 강의를 그렇게 더럽히고 싶진 않습니다.”

신성한 강의라는 말에 민우는 그 남학생에게 흥미가 갔다.

“이름이 뭐죠?”

“남희석입니다. 영문과 3학년이고요.”

“좋습니다. 남희석 학생. 제 강의를 꼭 들어야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꿈이거든요.”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수업을 끝낸 민우는 연구실로 복귀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 남희석이 들어왔다. 민우는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커피 잘 마십니까?”

“좋아합니다.”

민우가 캔커피를 꺼내 건네자 남희석이 정색했다.

“설탕 들어간 건 안 마십니다.”

“취향 확실해서 좋네. 그런데 이것밖에 없는데 어쩌죠?”

“괜찮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마셔보죠. 뭐.”

캔을 받아든 남희석이 바로 따서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렸다. 민우는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번역가가 꿈이라고 했는데, 어떤 언어를 주로 합니까? 영문과니까 영어 쪽인가요?”

“맞습니다. 교수님처럼 훌륭한 번역가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제 롤 모델이시죠.”

“롤 모델은 함부로 정하는 게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번역엔 자신이 있습니다. 좋은 스승만 찾으면 됩니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에서 옛 추억을 발견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강철훈 교수를 찾아갔던 그때. 당장 테스트를 보겠다고 한마디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강철훈 선생님이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인연이라면 이것도 인연일까. 민우는 막연한 설렘을 느끼며 남희석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민우가 책상에 놓인 인쇄물을 가져왔다. ‘인문과학총서’ 원서의 일부분을 복사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과 용어해설집을 남희석 앞에 놓았다.

“테스트를 한번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학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은데.”

“좋습니다.”

남희석은 바로 펜을 꺼내들고 번역을 시작했다.

완성까지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양이 많지 않긴 했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민우는 기대 어린 눈으로 작업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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