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16화 (216/500)

216화 : < 81장. 사람이 사람에게 (3) >

과연 8월의 여름이었다. 민우는 인문관으로 가는 내내 땀을 뻘뻘 흘렸다.

저 멀리 인문관이 보이자 민우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오니 쾌적한 공기가 땀을 식혀 주었다. 천국이었다.

‘후우, 다음부터는 레아 씨한테 인문관 앞까지 태워다 달라고 해야겠다. 주변 시선 신경 쓰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네.’

민우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계단을 올랐다.

명인대에 오면 가장 먼저 서지훈 교수 연구실에 찾아가 인사를 하지만, 당분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뒤늦게 신혼여행을 간 것이다.

‘지금쯤 잘 쉬고 계시려나.’

싱긋 웃은 민우는 310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피서철이라 그런지 그 흔한 한진섭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잘됐다. 오늘은 조용히 작업할 수 있겠어.’

요 몇 주간은 센트럴북스의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짐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노트북 부팅이 끝나 작업 캘린더를 열었다. 레아와 일정을 공유하는 캘린더였다. 민우는 월간 계획으로 바꾸고 전체적인 흐름을 살폈다.

‘완전 까마득하네.’

1부 번역은 2019년 6월에 끝날 예정이다. 원래는 내년 8월 중으로 마치기로 했지만, 일전에 송승현 실장과 협의를 해서 6월로 당겼다.

‘이거 너무 날짜를 당겼나?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는데. 자칫하다간 마감이든 퀄리티든 어느 한 쪽에 문제가 생기겠어.’

민우는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 4월 지음사에서 열렸던 미팅이 떠올랐다. <태엽시계>가 맨부커 쇼트리스트에 올라갔을 때 기분이 좋은 나머지 속도를 내보겠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인문과학총서가 단순히 번역만 하는 프로젝트는 아니니까.’

센트럴북스의 ‘인문과학총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때문에 국내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조사해야 했고,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물도 뒤적여야 했다. 그래서 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고민해도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진 않았다. 민우는 한숨을 쉬며 캘린더를 껐다.

‘그간 개인적인 일 때문에 너무 소홀히 한 건 사실이야. 오해가 없어야 할 텐데. 제임스 편집장님에게 전화라도 한 통 넣어야겠다.’

매번 레아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니 직접 통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민우는 이따 시차를 맞춰 한번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인문과학총서’ 4권 원서와 관련 자료를 준비할 때 핸드폰이 울었다.

먼저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민우.

저장되어 있는 번호는 아니었지만, 앞자리 국번을 보니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청문대에서 사용하는 국번이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청문대 교무과 안치윤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말씀하세요.”

― 교수님 연구실 나와서 연락 드렸어요. 오늘 혹시 학교에 오십니까? 안내를 좀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은 좀 어려울 거 같고, 내일 갈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 그럼 내일 잠시 교무과에 들러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네요. 감사해요.”

― 고생은요. 제 일인데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설렜다. 초빙교수라 공동연구실을 사용해야 하지만 민우는 예외였다. 전임 승진 보장이 되어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개인연구실을 받게 된 것.

‘내일 간단히 짐 싣고 가면 되겠다. 레아 씨한테 미리 얘기를 해놔야겠네.’

민우는 톡으로 레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다시 원서를 손에 쥐었다. 루카치의 안경을 쓴 그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해 또 전화가 왔다.

‘오늘따라 전화가 왜 이리 잦아?’

웬만하면 받지 않으려 했는데 액정을 확인한 민우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번역사업 담당자였다.

“네,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 바쁘신데 제가 방해가 안됐나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작업 중이긴 한데, 과장님 전화 받을 여유는 내야죠.”

―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화를 한 곽준우 과장은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이었다. 문광부에서 주최한 ‘번역인의 밤’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민우가 상아대에 자리를 잡고 번역관련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서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됐다.

업무적인 관계이긴 했지만, 호감이 가는 인상과 목소리가 매력적인 사내였다. 주요부처 과장급이라면 으레 어깨에 힘을 주기 마련인데 곽준우 과장은 소탈했다.

애초에 별로 욕심이 없이 묵묵히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 다름이 아니라 상아대에서 신청한 번역지원사업 건으로 연락을 드렸는데요.

“네? 상아대요?”

민우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그쪽하고는 계약이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청문대로 적을 옮긴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더 엮일 일은 없는데 곽준우 과장의 입에서 상아대 이야기가 나왔다. 민우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장님. 혹시 저 청문대로 옮긴 거 모르고 계셨습니까?”

― 아아뇨. 당연히 알지요. 좀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에······ 혹시 아직 상아대 쪽 번역사업에 관여하고 계신 부분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 역시 그렇죠? 어쩐지. 청문대로 옮기셨다는 이야기를 꽤 오래 전에 들었는데 서류에서 박 교수님 이름이 언급되니 좀 이상했어요.

이름이 언급됐다는 그 말에 민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 이름이요? 어떤 서류인데요?”

― 번역사업지원금 관련 서류입니다. 규모가 꽤 커서 여러 대학에서 서류를 보내왔는데, 상아대 것도 있었지요. 그래서 눈여겨봤더니 사업 취지에 대한 설명에 교수님 이름이 떡 하니 있지 않습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책임자가 누구로 되어 있나요?”

― 어디보자······ 유희윤 교수네요.

예상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민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람과는 끝까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이름을 팔고 다니는 거지?’

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대학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머리를 못 굴릴까. 조금만 조사해도 금방 들킬 일인데.

물론 민우가 상아대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둘러댈 구실이야 만들 수는 있다. 해 온 작업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역시 무리수였다.

이걸 어떻게 돌려주면 좋을까 고민하던 민우가 방법을 찾았다.

“저는 그 사업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불협화음이 있었죠. 그러니까 제 이름은 빼고 판단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나저나 유 교수님 배짱 좋으신데요? 정부 기관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려고 하다니.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뇨, 아닙니다. 박 교수님께서 사과하실 문제는 아니죠. 아무튼 이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곽준우 과장의 목소리는 엄중했다. 아무래도 상아대가 지원금을 타기는 틀린 것 같다. 그제야 민우의 얼굴에 미소가 폈다.

― 참, 교수님. 하나 개인적으로 좀 여쭙고 싶은데······ 국제번역기구요. 그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어요. 메일도 꾸준히 오고 있고, 여러 사람들하고도 만나고 있고요. 아, 홈페이지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 정도면 윤곽이 나올 것 같네요.”

―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국제번역기구는 가칭이라고 하셨었는데.

“그건 아직 고민 중이에요. 두어 가지 생각해 보긴 했는데 결정을 못 내렸어요. 친구들하고 좀 더 의논해 보려고요.”

―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장관실 비서와 점심을 먹는데 슬쩍 그 이야기를 물어보더라고요. 그 말은, 장관님도 궁금해하신다는 이야기라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 이후 김강현 장관과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조만간 다시 이어질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받았다.

‘나한테 손해될 일은 없겠지. 오히려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될 거야.’

그렇게 판단한 민우가 말했다.

“다음에 한번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과장님께도 좋을 것 같네요. 점수 따셔야죠.”

― 그래 주신다면야 언제든 환영이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연락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민우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핸드폰이 몇 번 울렸지만, 민우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 * *

“여기입니다.”

교무과 안치윤이 민우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문 옆에는 청문대 로고와 민우의 이름, 그리고 직급이 정사각형 판에 적혀 있었다.

민우는 내부를 살펴보았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넓고 깨끗했다. 신경을 많이 써준 티가 났다.

“마음에 드네요. 오늘부터 사용해도 되는 거죠?”

“예. 그리고 이건 연구실 사용 규정을 정리해 놓은 건데 한번 참고해 주시고요.”

민우는 투명한 파일에 들어있는 인쇄물 뭉치를 건네받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는데 주의사항 같은 것들만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도어락 세팅법도 거기에 적혀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시고요.”

안치윤은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민우는 우선 도어락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하고 주차장으로 나가 레아와 함께 짐을 옮겼다. 무거운 짐은 택배로 부쳐서 그나마 힘은 덜 들었다.

레아가 안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와, 멋진 연구실이네요!”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레아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민우가 그 기색을 읽었다.

“멋지다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직 짐이 다 안 왔으니까요. 가구도 좀 더 들여놔야 할 것 같고. 책이 들어오면 그나마 좀 나을 거예요. 연구실은 책이 없으면 빈 껍데기니까.”

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소만 다른 게 아니라 사람도 다르네요.”

“사람이요?”

“제가 너무 맥락을 건너뛰었군요. 죄송해요. 다른 건 아니고 상아대에서 매니저님 후배들이 케이크를 준비해 주던 그 장면이 떠올라서요.”

그제야 민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공간만 다른 게 아니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구성원도 완전히 다르다.

레아는 마치 허상을 훑듯 아련한 눈으로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말했다.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이었죠. 학생들의 웃음에서 진심을 느꼈어요. 내년까지 잘 버티면 촛대 두 개 꽂아준다던 조교의 위트도 훌륭했고.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게 없어서 그런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맞아요. 생각해보니 그러네.”

요컨대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무언가가 없었던 것이다.

레아의 곁에 선 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워서가 아니다. 기합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저한테는 도움이 될 겁니다. 하나둘 기대기 시작하면 발전이 없거든요. 묘하게 배타적인 청문대 국문과 선생님들도 제게는 큰 자극이 될 거고요.”

청문대 국문과 교수들의 반대로 민우는 교양학부에 소속됐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겉으로 그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좋은 어조로 ‘박민우 교수는 교양학부에 더 어울린다’만 주장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민우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교수들의 행동을.

그럼에도 이해했다.

아직 자신은 철저한 남이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들을 원망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명인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니까.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 대명제는 여전히 민우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상해요?”

“매니저님께 더 발전할 곳이 있던가요? 이미 완벽하신데요.”

레아가 두 눈을 빛냈다. 완벽하다는 말에 사심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민우는 소리 내어 웃으며 상황을 흘려보냈다.

“오늘따라 농담이 짓궂으시네. 자, 일단 정리부터 합시다. 슬슬 배고프네요.”

민우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레아도 그의 옆에서 짐을 하나 둘 제자리에 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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